[벚꽃] 도쿄의 봄, 영화 속 벚꽃 이야기
[벚꽃] 도쿄의 봄, 영화 속 벚꽃 이야기
  • 이향진(일본 릿쿄대 교수, 베를린 자유대 한국-유럽연구소 글로벌 패컬티 교수)
  • 승인 2023.04.03 10: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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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췌장을먹고싶어〉 스틸컷 (주)NEW

“팥소에 벚꽃잎이 들어갔어! 너무해, 너무해” 도라야키 가게의 좁은 의자에 줄지어 앉아 웃고 떠드는 여중생들이 못내 못마땅한 센타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단팥빵을 하나씩 안기며 꼬맹이들을 쫓아낸다. “얏타!” 아이들은 공짜로 생긴 빵을 안아들고 신나서 밖으로 나서고, 단골 소녀 와카나가 가게 안으로 들어온다. 생활형편이 어려워 진학을 포기하려는 와카나는 ‘슬픈 눈’을 한 센타로의 유일한 말동무이다. 센타로는 아이에게 방과후 간식 챙기듯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와카나에게 따라 준다. 그리고 카메라는 두 사람 사이로 난 가판대 창을 향하고, 긴 벚꽃나무 터널에서 걸어나온 듯한 작고 귀여운 할머니 도쿠에가 손짓을 한다. 팥소에 들어간 벚꽃잎처럼 센타로와 와카나의 무채색 일상 속에 핑크빛 팥물이들 듯 도쿠에가 살그머니 내려앉는다.

가와세 나오미의 2016년 작품, 〈앙: 단팥 인생 이야기〉(이하 〈앙〉)에서 키키 키린이 연기하는 76세의 할머니 도쿠에는 한센병 병력이 있다. 손이 좀 불편하다. 하지만 견딜 수 없이 불편한 건, 막연한 공포로 끔찍해 하는 동네 사람들이다. 일상에서 전염될 일이 없지만 잠복기가 길어 전문적 지식을 갖춘 의료진 없이 조기발견이 어려울 뿐 완치되는 병인데도, 흉흉한 소문과 억측이 사람들을 갈라놓는다. 완치되었어도 편견과 차별은 여전하다. 그래서 죽은 순간까지 도쿠에는 수용시설을 떠날 수 없다. 가족력이 사회적 낙인stigma이기 때문이다.

도쿠에는 오래전 아이를 가졌었지만, 사회는 그녀의 아이를 거부했다. 그 아이가 세상에 나왔더라면 비슷한 나이였을 센타로에게 도쿠에는 자식같은 정을 느낀다. 50년을 넘게 단팥소를 만든 도쿠에의 장인 솜씨를 전수받기 시작한 센타로가 웃음을 찾았다. 말도 많아졌다. 전과자로 형무소에 수감 중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이 도쿠에와의 시간 속에서 채워지기 시작했다. 센타로가 만든 빵과 그 속을 채우는 도쿠에의 단팥소처럼. 출감후 빚을 갚기 위해 좋아하지도 않는 단팥빵을 팔고 있는 센타로가 단맛에 빠진다. 달라진 단팥소 덕에 동네사람들이 줄을 서 기다리고 그의 가판대는 동네의 명물이 된다.

가와세 나오미의 벚꽃 이야기는 도쿠에 할머니의 삶과 죽음을 그린다. 세상의 편견과 차별이 12살의 어린 소녀를 가족으로부터 강제 분리시켜 평생을 외롭게 살아오게 만들었지만, 원망하기보다 바람과 나무, 자연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사계절 여행 이야기를 들으며 살아왔다. 그리고 벚꽃잎처럼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탐스러운 팥알처럼 영글어 그리운 이들에게 돌아온 것이다. 키키 키린이 연기하는 도쿠에는 소외된 이웃,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새봄 추위를 밀어내는 벚꽃의 따뜻한 온기를 느끼게 한다.

〈앙〉의 촬영지는 도쿄도 서쪽 타마지역이다. 롯본기나 긴자 같은 화려한 도심에 핀 벚꽃이나, 벚꽃놀이로 유명한 우에노 공원과 달리 서민들의 대단위 아파트 단지와 평범한 주택가가 밀집해 있는 위성도시다. 영화 속에 자주 등장하는 노란색의 전철은 이들을 도심, 일터로 옮겨나르는, 아침저녁 길고 복잡하고 피곤한 출근길을 떠올리는 일상공간이다. 서민가족들이 모여사는 그곳에 도립 도서관과 한센병 수용시설, 어울려 살면서도 사실은 고립되어 있는 사람들의 일상을 재현하고 있다.

벚꽃이 등장하는 일본 영화를 보면 생각하는 몇가지의 것들이 있다. 〈앙〉의 벚꽃은 가족이, 친구들이 모여 웃고 떠들며 즐기는 봄 소풍, ‘오하나미’를 떠올린다. 타지인 도쿄에서 봄을 맞이해 본 사람이라면, ‘오하나미’ 벚꽃놀이에 초대되어, 새로운 이웃과 함께 나누는 음식과 시간들을 소중한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을 법하다. 그 평범한 일상, 어느 동네나 있을 듯한 벚꽃 풍경, 동네 공원을 배경으로 하는 〈앙〉은 그리운 사람들을 만날 수도 없고, 돌볼 이도 돌봐줄 이도 없이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그렇게 죽어가는 사람들의 ‘오하나미’ 같은 영화다.

벚꽃이 그리운 이를 생각나게 하고 설레게 만드는 건 가족영화만이 아니다. 흩날리는 벚꽃, 벚꽃나무 터널을 뒤로 하고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교복 차림의 두아이를 따라가는 롱 숏은 일본 로맨스 영화의 클리셰다. 유키사다 이사오의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치다〉(2004)가 일본 로맨스 영화의 절정을 이루었던 2000년대를 전후로 등장한 작품들, 이와이 슌지의 〈4월 이야기〉(1998)과 〈하나와 앨리스〉(2004), 신카이 마코토의 애니메이션 〈초속 5센티미터〉(2007), 그리고 세대를 달리해 쓰키카와 쇼 의 〈너의 췌장을 먹고 싶어〉(2017)와 2022년 넷플릭스 드라마 〈벚꽃같은 나의 연인〉까지, 벚꽃은 모티브라기보다 이야기의 여주인공이다. 비에 쓸려 내려가고, 짓밟히고 뭉게지고, 쓰레기처럼 길에 널려있고 꽃잎이 다 떨어진 황량한 가지의 벚꽃나무가 다시 화려하게 잎을 피우는 삶과 죽음에 대한 메타포로 등장하는 〈앙〉과 달리, 짧고 아련한 첫사랑의 추억이다.

〈4월 이야기〉는 신학기인 봄, 대학가 근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익숙한 장면으로 시작한다. 지방에서 올라오는 이삿짐 트럭이 벚꽃잎이 쏟아지는 길을 들어서 행인에게 길을 묻고, 곧 함박눈처럼 내리는 벚꽃의 축복을 받으며 하얀 기모노를 입은 신부가 길을 건너는 도쿄의 어느 주택가이다. 익숙한 일상 풍경이 로맨틱한 환타지로 이어진다. 일본 로맨스 드라마 최고의 배우, 마츠 다카코가 영화의 주인공인 우즈키로 등장한다. 그녀는 짝사랑하던 고향 선배, 첫사랑을 만나기 위해 홋카이도에서 도쿄의 무사시노 대학으로 진학한다. 작은 동네 책방에서 해후하는 두사람. ‘벚꽃언덕’이라는 지명을 가진 도쿄의 어느 아파트단지처럼 〈4월 이야기〉는 2000년대 일본 로맨스영화의 장르적 관습, 불치병의 소녀가 맞이하는 아름다운 죽음없이 건강하고 풋풋한 첫사랑 이야기가 무르익는 시점에 머문다. 입학식과 졸업식, 막 사회인이 된 젊은이들의 이동이 시작되는 도쿄 도심, 신주쿠역을 거쳐갈 수많은 젊은이들의 봄을 연상시키며. 애니메이션이라 더 이상 환상적일 수 없을 만큼 몽환적으로 벚꽃의 아름다움을 그린 〈초속 5센티미터〉는 그렇게 느린 속도로 떨어지는 벚꽃처럼 시작해 그 느린 속도였기에 결국 먹먹하게 끝나게 되는 첫사랑 이야기를 그린다. 어른이 되어 황량한 도쿄로 돌아와 첫사랑과 재회하지만 서로의 길이 달라진 것을 확인하며 오래동안 가슴앓이를 하던 로망에서 깨어나는 소년의 이야기다. 첫사랑의 로망이 늙지 않고 그대로 아름답게 남으려면 역시, 불치의 병이라는 절정이 필요할까? 이들 작품보다 10년 후쯤에 등장하는 〈너의 췌장이 먹고 싶어〉와 〈벚꽃같은 나의 연인〉은 몹쓸 병에 걸려 어린 나이에 사라져간 여자가 주인공이다. 그리고 그녀를 그리워하는 남성의 순애보다. 교복이 씩씩함을 더해주고 초췌함조차 아름답기만 한 어린 여주의 죽음이라는 감상적인 멜로드라마 공식이 제대로 벚꽃이야기에 녹아있다. 벚꽃은 과거의 시간으로 물러가고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서 〈앙〉의 키키 키린이 먼저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앙〉은 유작인 〈어느 가족〉 (2018)과 함께 키키 키린을 최고 배우로 기억하게 하는 작품이다. 봄이 되면 생각나는 영화들로 그녀는 다시 돌아온다. 작은 벚꽃잎이 되어 수용소 넘어 어두운 숲을 지나 사람들에게 다가온 도쿠에처럼 새봄이 되어 다시 벚꽃잎으로 돌아왔다. 엔딩씬, 벚꽃이 활짝 핀 동네 공원에서 “도라야키”를 외치며 노점상을 시작한 센타로의 얼굴에는 삶과 희망이 느껴진다.

벚꽃길을 달리며 희망찬 봄, 앞으로 나아가는 여성은 모리 준이치의 〈리틀 포레스트: 겨울과 봄〉(2014)에도 등장한다. 1편 ‘여름과 가을’에 이어 ‘겨울과 봄’, 두 편으로 완성되는 〈리틀 포레스트〉에서 봄은 사계를 완성시키는 계절이다. 벚꽃은 짧게 머물다 간 첫사랑의 기억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을 알리며 주인공을 앞으로 밀어낸다. 벚꽃나무길을 씩씩하게 자전거 페달을 밟고 달리고, 경운기를 모는 농부 이츠코는 삶의 생기, 완숙미가 느껴진다. 무표정한 얼굴로 도시에서 고향 코모리도 도망쳐 온 이츠코는 고향집 곳곳에 남아있는 엄마의 기억과 싸우며, 그리워하며, 엄마의 레시피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치유하며 봄을 맞았다. 북쪽이라 유난히 늦은 봄이지만 힘차게 시작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바닷마을 다이어리〉(2015)의 봄, 벚꽃도 외로운 시골 소녀 스즈가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는 시점을 의미한다. 탐스럽고 긴 벚꽃터널을 자전거로 달리는 소년 소녀가 봄바람을 느끼며 달려온다. 낳아준 어머니의 품, 고향을 떠나 새로 생긴 언니들과 새 가족을 이루어 살게 될 도쿄 근교의 가마쿠라로 향해 가는 스즈는 첫사랑으로 기억되는 소녀가 아니다. 그래서 〈바닷마을 다이어리〉는 우메보시 (매실절임)를 담던 네 자매, 초여름의 상큼함으로 더 기억된다. 그곳에 가면 낯익은 얼굴이 또 있다. 혈연이 아니더라도 가족같은 유대와 공감, 소외된 이들의 공동체적인 삶을 그리는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가와세 나오미 감독은 칸영화제가 가장 주목하는 두 사람의 일본감독이고 그 둘이 만나는 또 하나의 지점인 키키 키린도 스즈가 카마쿠라에서 만나게 될 가족이다.

물론, 니나카와 미카의 〈사쿠란〉(2007), 롭 마샬의 〈게이샤의 추억〉(2005), 에드워드 즈윅의 〈라스트 사무라이〉(2003), 거기에 소피아 코풀라의 〈사랑도 번역이 되나요〉(2003)에서처럼, 사무라이와 게이샤, 후지산만큼 오리엔탈리즘에 푹빠져 가장 일본스러운 삶과 죽음, 사랑과 아름다움을 그린 벚꽃도 있다. 그래서일까, 마지막으로 소개하고 싶은 도쿄의 봄을 그린 영화가 하나 더 있다. 이준익감독의 〈동주〉(2016)에 등장하는 윤동주 시인이 마지막으로 맞이한 도쿄의 봄이다. 1942년 4월, 릿교 대학 신입생 윤동주가 쓴 시 「봄」에는 벚꽃이 나오지 않는다. 그때도 지금처럼 다카다노바바의 하숙집부터 등굣길, 교정을 온통 하얗게 덮었을 벚꽃을 보며 동주는 고향의 개나리와 진달래, 노-란 배추꽃잎을 그리워한다. 도쿄 전차 장면, 옆에 앉은 릿교 여학생을 바라보며 옅게 웃음짓는 그의 모습에서 떠나온 고향의 봄을 느낀다. 

 

 


이향진 하버드대학 방문교수, 셰필드대학 동아시아학과 교수 등 역임, 일본 릿쿄대학 문화커뮤니케이션학부 교수로 남북한 및 일본 영화와 대중문화를 연구하고 있으며 영화제 디렉터 활동. 『현대한국영화: 문화, 아이덴티티, 그리고 정치학』 『한류의사회학: 팬덤, 가족, 다문화주의』 등이 있다.

 

 

* 《쿨투라》 2023년 4월호(통권 10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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