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벚꽃] 봄, 사랑, 벚꽃 말고
[벚꽃] 봄, 사랑, 벚꽃 말고
  • 김세연(미디어비평가)
  • 승인 2023.04.03 1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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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퍼스에 벚꽃이 핀다는 것은 시험 기간이 시작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4월이 되면 대학가에는 ‘벚꽃의 꽃말은 중간고사’라는 농담이 돈다. 새로 사귄 애인과 함께 벚꽃축제에 갈 꿈에 부풀었던 신입생들은 곧 학점과 사랑 중 어느 쪽을 택할 것인지 딜레마에 빠진다. 그러다 결국엔 봄, 사랑, 벚꽃 말고… 도서관 열람생들 사이에 파묻히는 게 수순이다.

나의 새내기 시절은 좀 달랐다. 연애도 공부도 큰 감흥이 없었다. 영어회화 동아리에서 만난 선배와의 짧은 교제가 끝난 뒤, 나는 그걸 첫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인지 한참이나 고민했다. 처음 겪은 연애는 생각보다 시시했다. 청춘의 마음에 불을 지필 다른 무언가를 찾던 그때, 눈에 들어온 것은 대운동장에서 대학 본부를 규탄하고 있던 총학생회장단이었다.

이미 오래전에 학생운동이 사라지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가 대학에 다니던 2010년대 초반만 해도 반값등록금 시위를 비롯한 대학생들의 집단행동이 드물지 않게 있었다. 학내 민주주의니 구조적 모순이니 하는 올드한 구호들은 그간 사회문제에 관심이 없던 내게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왔다. 나는 영혼을 내맡기듯 학생회 사업에 헌신하는 아이가 되었다.

솔직히 그 일이 늘 즐겁지만은 않았다. 잦은 투쟁과 행사 준비로 격무에 시달렸고, 공동체를 위해 일하면서도 남에게 함부로 평가받았다. 쓸데없는 일에 시간 쏟지 말라는 주변인들의 충고와, 어쩌면 그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이 나를 흔들었지만 몸과 마음을 돌볼 틈 없이 빠듯한 일상이 이어졌다. 그러다 문득 여유가 생기는 시기가 있다. 4월 중간고사 기간이다.

웃기게도 학생회 임원들은 시험 기간이 되어서야 한숨을 돌린다. 사업들이 일시 중단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때는 학생회관 옆 벚꽃나무 그늘 아래서 막걸리를 마셨다. 토론을 해도 끝이 안 나는 근본적인 고민에 사로잡혀 열변을 늘어놓다 보면, 바람이 불어 뽀얀 막걸리 잔 위로 후드득 벚꽃이 떨어졌다. 후드득, 눈물을 쏟거나 노래를 부르는 친구도 있었다. 그게 바로 나의 첫, 봄 사랑 벚꽃 하면 떠오르는 기억이다

 

 


김세연 미디어비평가. 동국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하고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했으며, 소설집 『홀리데이 컬렉션』이 있다. 현재 동국대 다르마칼리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 《쿨투라》 2023년 4월호(통권 10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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