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신봉승 선생을 그리며
[에세이] 신봉승 선생을 그리며
  • 한선희(수필가, 새벽이슬장학재단 이사장)
  • 승인 2023.04.04 14: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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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도 봄이었던 것 같다. 나의 예비 남편과 같이 극작가 신봉승 선생님 댁으로 인사를 갔다. 나를 약혼녀라고 소개하니까 선생님의 표정이 아주 이상했다. 나중에야 알게 되었지만 신 선생님께서 남편을 많이 아끼셔서 여러 가지 생각을 하고 계셨던 터였다. 남편이 그분을 더 가까이 모시게 되었으면 문학의 길이 더 활짝 펼쳐질 수도 있었을 텐데…. 가난하고 아버지 없는 나를 만나서 돈고생 덜해도 되고 집이 없어서 열 번이 넘도록 이사를 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늘 가슴 한 쪽에 걸려 미안한 마음이 들곤 했다.

그 후 신 선생님께는 어찌나 죄송하던지 괜히 뵐 때마다 깊이 머리 숙여 인사를 올리곤 했다. 그럼에도 선생님은 남편 김 교수를 특별히 사랑하고 아껴주셨다. 결혼식에도 오시고 문학상을 받는 곳에는 언제나 오셔서 축하해주셨다. 특히 편운문학상 시상식 때는 “아, 나 시간이 안 되었는데… 김 교수 때문에 왔어”라며 축사를 해주셨다. 늘 “김 교수는 최고의 인물이야! 황순원 선생님께서 아주 사람 잘 보셨어”라고 말씀을 하시곤 했다. 소나기마을에 오셔서도 얼마나 일이 많겠느냐고 하시면서 큰 금액의 후원금도 선뜻 주신 적이 있었다.

그런데 선생님이 돌아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다. 폐암이라고 하시면서, 암은 나이 들어 그냥 같이 살아가는 거라고 하시며 잘 감당하셨는데…. 항암 치료를 받으셨으나 평소의 일상과 꼭 같이 생활하시면서 ‘모범 환자’의 표본을 보여주시던 참으로 대단한 의지의 소유자셨다. 우리는 지방에 있다가 소식을 듣고 조문객 제1착으로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리고 영정 앞에 엎드려서 마구 울었다. 눈물이 볼을 타고 자꾸만 흘려내렸다. ‘선생님, 그동안 너무 감사했어요. 늘 감사하고 죄송한 마음으로 선생님의 그 사랑을 잊지 않고 있어요. 선생님 편안히 잠드세요.’ 사모님께서 선생님께서 가시기 전에 늘 남편 이야기를 했다고 하셨다.

어느 날 믿음의 친구와 조선조 초기의 인물 한명회에 대해 얘기를 나눈 적이 있다. 세조가 한명회를 두고 ‘나의 장자방’이라고 불렀다는 일화는 사실史實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만큼 한명회는 수양대군을 세조로 만든 ‘만고의 역적’으로 평가되어 왔다. 그런 한명회를 ‘한 시대의 전략가’로 다시 자리매김한 분이 바로 10여년에 걸쳐 대하 사극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의 극본을 쓰신 신봉승 선생님이셨다. 아직 국문 번역 전이어서 한문으로 되어 있는 《조선왕조실록》을 읽어내고 그를 바탕으로 사극을 썼으니, 이분은 자료와 정보에 있어서 당대 어느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작가셨다. 사람들은 선생님을 ‘재야의 역사학자’라 호명했다.

함께 얘기 나누던 친구에게, “그분을 뵐 때면 얼굴을 잘 들지 못하고 늘 큰절을 올리는 마음이었다”고 했더니, 이 친구 왈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지 마셔. 김 장로는 한 권사 안 만났으면 예수님을 몰랐을 거 아니야. 최고의 복이 하나님을 믿는 거고 귀한 장로님이 되셨으니 가장 큰 축복을 받은 거야”라고 위로해주었다. 연이어서 “하나님이 김 장로를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더 큰 복이 준비되어 있을 거야”라고 했다. 그동안 남편이 혼자 벌어서 아이들 공부시키고 나 또한 대학원까지 공부시키느라 애쓰는 걸 볼 때면, 또 집이 없어서 열번이 넘게 전세로 이사 다니면서 이리저리 고생할 때면, 또 간간이 뵐 수 있는 신 선생님을 뵙고 돌아올 때면, 내 안에서 자주 잔잔한 싸움이 눈물을 고이게 했다.

그렇게 오랜 세월을 보낸 후에서야 나는 새벽 제단의 기도 중에 불현듯 깨달았다. 마치 뒤통수를 크게 한 대 맞은 것 같은 깨달음이었다. 내가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실제로 아버지 없는 내가 하나님을 친아버지로 여기고 살아왔으니, 우리 남편 또한 확실한 하나님의 자녀가 아닌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시니, 자기 신앙을 갖고 있는 김 교수에게도 아버지일 것이 분명하나 나의 촌수로 보자면 그는 하나님의 사위다.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아버지이시면서도 장인어른이라는 것이 나의 소박하지만 강력한 주장이다. 남편은 다른 친구들이 ‘어제저녁 장인과 술 많이 마셔서 머리 아프다’고 말할 때 부러웠다고 했는데, 앞으로도 그 기회는 없을 형편이다.

그래서 나는 때로 이렇게 기도한다. “나의 하나님 아버지, 아버지는 우리 김 교수의 장인이십니다. 진짜 장인이십니다. 김 장로를 도와주세요. 우리 집도 주세요. 그리고 김 장로의 문학의 길을 단단하게 세워주세요. 장인어른께서 우리 김 장로를 전적으로 도와주시고 힘이 되어주세요.” 성경 마태복음 7장 9-10절에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라는 구절이 있다. 나는 늘 믿음의 자녀에게 최고의 것으로 주시는 이 땅의 아버지시며, 무소부재하시고 무사불능하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남편의 힘이 되어주시길 간절히 기도하곤 한다. 남편도 가끔 자신에게 지상 최고의 권력자인 장인어른이 한 분 계신다면서 웃곤 한다.

 


한선희 《서정시학》 2007년 봄호로 등단, 수필가, 사회복지사, 새벽이슬장학재단 이사장

 

 

* 《쿨투라》 2023년 4월호(통권 10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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