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월평] 허무를 달래는 지독한 농담: 〈이니셰린의 밴시〉
[영화 월평] 허무를 달래는 지독한 농담: 〈이니셰린의 밴시〉
  • 강유정(영화평론가, 강남대 교수)
  • 승인 2023.04.04 1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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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해서는 안 되는 질문과 농담이 있다. 그런데 그 질문과 농담은 역설적이게도 형식이 같다. 왜 사니, 이건 질문이기도 하지만 농담이기도 하다. 서로에게 던져서는 안 될 더더군다나 자기 자신에게는 함부로 던져서는 안 되는. 그런데, 여기 한 남자, 콜름(브렌단 글리슨 분)이 이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다. 왜 사는가 물었고, 남은 시간만이라도 의미 있게 살아가기 위해 지금까지의 방식을 끊겠다 마음먹는다. 그런데, 그 실천 방법이 좀 고약하다. 묵언 수행을 한다거나 금식 기도를 드린다거나 순례를 떠나는 방식이 아니라 매일 오후 2시면 만나 함께 펍으로 가 맥주를 마시며 놀던 친구에게 절교를 선언했기 때문이다. 이건, 자기 수양을 위한 다짐이라기보다 친구였던 파우릭(콜린 파렐 분)을 향한 지독한 농담처럼 보인다. 하필, 이 말을 한 날이 공교롭게도 4월 1일, 만우절이었다. 파우릭은 절교 선언에 하루종일 심란해하다, 달력을 확인하곤, 콜름이 자신을 놀린 것이라 확신하며 그를 다시 찾아간다. 그도 그럴 것이, 콜름이 단교를 선언할 만한 아무 계기가 없으니 말이다.

영화 〈이니셰린의 밴시〉는 이니셰린이라 불리는 가상의 섬마을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Inish’는 아일랜드어로 섬을 뜻하고 ‘erin’은 아일랜드를 뜻한다. 두 단어가 합쳐진 이니셰린은 아일랜드의 어떤 섬 정도다. 밴시Banshee는 울음소리로 가족에게 죽음의 기운을 미리 알린다는 아일랜드 신화 속의 늙은 여자 유령이다. 이니셰린의 밴시는 콜름이 파우릭과 절교한 후 매달려 창작한 곡 제목이기도 하며, 섬 곳곳에서 유령처럼 불쑥 등장해 저주인지 예언인지 헛소리인지 구분되지 않는 흉측한 말을 늘어놓는 마을 노파들을 가리키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이 영화의 장르가 다름 아닌 코미디라는 사실이다. 하긴 시놉시스만 요약해 놓고 보자면 이렇게 웃긴 이야기도 없다. 아일랜드의 작은 섬마을의 중년 남자가 갑자기 모차르트처럼 음악으로 자기 이름을 남기겠다며 둘도 없이 친하게 지내던 친구에게 한마디도 걸지 말라며 외면한다. 여기서 멈추는 게 아니라 한 마디라도 걸어올 요량이면 그때마다 손가락을 하나씩 잘라 문 앞에 던지겠다고 엄포를 놓는다. 아니 실제 손가락을 잘라 던져 버린다. 친구 파우릭은 이해할 수 없다. 나름 민속 음악을 제법 아는 바이올린 연주자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콜름이 대단한 음악가일 리는 없다. 아니 설사 그가 대단한 음악가라고 한들 파우릭과 대화를 나눈다고 작곡 실력이 줄고 연주 능력에 지장이 생길 리도 없다.

그러나 콜름은 파우릭의 평범함과 일상성이 콜름을 이 지루한 삶에 붙들어 놓는 원흉인냥 원망한다. 파우릭이 당나귀 똥에 대해 2시간이나 떠들어 인생을 낭비했다며 비난한다. 그런 이야기들을 재미나게 듣고 나눌 땐 언제고, 이젠 그 다정한 일상다반사 때문에 자신의 삶이 평범하다 못해 남루해졌다고 힐난하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일상의 대수롭지 않음과 반복성에 늘 발목잡혀 살아간다. 아침에 일어나 씻고, 먹고, 잠드는 과정은 어쩌면 너무나 지겨운 반복처럼 보이기도 한다. 어쩐지 매일 그렇고 그런 일상을 살다 보면, 하루 하루의 생명을 이어가는 동물들과 뭐가 다를까 싶기도 하다. 모차르트나 베토벤처럼 위대한 작곡을 해야 사람들은 이름을 기억해 준다. 그러므로, 콜름은 이제 시시콜콜한 일상의 대표주자인 파우릭과 절교하고 위대한 예술가의 삶을 얻고자 하는 것이다.

파우릭의 생각은 다르다. 자신의 어머니, 아버지의 다정함은 누군가 기억하거나 찬양하지는 않지만 매우 소중하다. 모차르트, 베토벤이 아니라도 매일 방울을 울리며 방문을 두드리는 당나귀 제니가 있기에 삶의 온기는 유지된다. 삶은 대단한 업적으로 기억되는 게 아니라 일상의 대수롭지 않음을 통해 견고해지는 것이라 믿는다. 지루함은 경멸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감사해야 할 평온인 것이다. 막상 일상이 얼굴을 바꿔 다정함을 지워버리면 지루함 따위는 생각할 겨를도 없다.

콜름과 파우릭의 대립은 결국 죽음으로 끝나고 마는 우리의 삶, 인간이 이 허무한 삶을 살아가는 두 가지 방식의 대립처럼 보인다. 콜름이 허무를 견디는 예술지상자들의 엘리티즘과 배타주의를 보여준다면 파우릭은 소박한 일상의 소중함을 강조한다. 얼핏 보면, 콜름이 화가 난 것이 무척 무서워 보이지만 그의 화는 결국 자기 손가락을 잘라 남의 집에 던져 소중한 당나귀 제니의 목숨을 앗는 바보 같은 일만 저지를 뿐이다. 하지만 막상 착하고, 지루했던 일상의 남자 파우릭이 분노하자 그는 콜름의 집 전체를 불태워 버린다. 일상의 평온함은 한 번 마음을 돌이키면 무섭게 몰아쳐 삶의 근간을 빼앗아 버린다.

진짜 예술은 이름을 남기겠다며 일상을 천덕꾸러기 취급하는 유치한 자기 기만이 아니다. 오히려, 진정한 예술가들은 늘 일상의 시시함과 복잡다단함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일상의 시시함이야말로, 인간이 삶을 살아가면서 익숙해져야 할 첫 번째 속성이니 말이다. 삶의 허무를 견디기 위해, 여동생 시오반은 책을 읽는다. 그것도 또 하나의 방법일 테다. 아버지의 만성적 폭력에 시달리는 청년은 삶의 진실을 찾아 여기저기 되도 않는 질문을 하고 다닌다. 책에 길을 묻던 허무주의자는 섬을 떠나고, 질문하던 청년은 결국 세상을 등진다. 세상을 다 불태울 것처럼 요란스러운 선언을 해댄 늦깍이 예술가 지망생은 다시 파우릭과 친구가 되어 시시한 일상 속에 파묻힐 것이다. ‘이니셰린의 밴시’를 작곡한다 해도 아무도 콜름따위를 기억할 리는 없으니 말이다. 이니셰린의 그들은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도 오늘 같은 그런 시시한 나날 속에서 하루하루를 채워 나가다 언젠가 밴시가 될 것이다.

이 지루한 삶과 허무 속에서 허명을 남기는 가장 극단적 방법은 바로 전쟁이다. 영화 속 이니셰린 섬 너머의 본토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포탄이 터진다. 전쟁을 일으키면 이름은 남길 수 있다. 히틀러나 무솔리니처럼. 하지만 그 보다는 책을 읽는 게 낫고, 차라리 손가락을 자르며 겁을 주는 게 낫고 아예 당나귀 똥에 대해서나 2시간씩 이야기하는 게 더 낫다. 〈이니셰린의 밴시〉는 결국 우리의 삶과 존재 자체가 코미디일 수 밖에 없음을 무섭도록, 냉정하게 보여주는 수작임에 분명하다.

 


강유정 고려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 졸업. 2005년 《조선일보》 《경향신문》 《동아일보》 신춘문예 동시 당선으로 등단, 저서로는 『영화 글쓰기 강의』 『타인을 앓다』 등이 있다. 현재 강남대학교 한영문화콘텐츠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 《쿨투라》 2023년 4월호(통권 10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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