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월평] 〈더 글로리〉 연진이의 ‘신나는’ 멀티버스
[드라마 월평] 〈더 글로리〉 연진이의 ‘신나는’ 멀티버스
  • 김민정(드라마 평론가, 중앙대 교수)
  • 승인 2023.04.04 15: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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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0일 오후 5시. 드디어 〈더 글로리〉 파트2가 공개되었다.

넷플릭스 글로벌 톱10 TV(비영어) 부문 1위. 전 세계가 한마음 한뜻으로 간절히 이날만을 기다린 셈이다. 연진이와 ‘아이들’은 과연 어떠한 파멸을 맞이할 것인가. 이렇게 누군가의 불행을 애타게 기다린 적은 처음이었다. 인간으로서 이래도 되나. 죄책감이 들기도 했는데, 다행스럽게도 파트2에서 연진이와 아이들은 ‘한결같이’ 악랄한 모습으로 등장했다. 일말의 동정과 연민도 필요치 않았다. “하나도 안 변해서, 그대로여서 정말 고마워.”

사실 ‘우리’의 동은이가 복수에 성공하는 것은 파트1 때부터 이미 결정된 것이었다. 중요한 것은 복수의 강도와 밀도였다. 넷플릭스가 공개한 파트2 공식 예고편 영상과 스틸컷을 두고 다양한 결말이 온라인에 넘쳐났다. 이 좋은 먹잇감을 넷플릭스가 가만둘 리 없었다. 넷플릭스 K콘텐츠 유튜브에서는 출연 배우들이 시청자들이 예측한 결말 댓글을 읽으며 감탄하는 모습이 소개되었다. 전 세계가 노스트라다무스, 그러니까 예언자 꿈나무가 된 느낌이랄까. 누구는 눈이 멀고, 누구는 말문이 닫히고, 누구는 숨통이 끊어질지어다. 음흠.

〈더 글로리〉의 박연진

‘신의 한 수’라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일까. 문동은은 엄청난 내공을 가진 재야의 고수처럼 인간 바둑알을 적재적소에 두고, 그때마다 연진이와 아이들은 속절없이 무너져내린다. 한때는 친구란 이름으로 똘똘 뭉쳐 악행을 저질렀던 그들은 한순간에 적이 되어 서로를 공격하기 시작한다. 빌런의 손으로 빌런 응징하기. 이보다 효율적인 사적 복수는 세상에 없다. 아, 동은이는 얼굴만 예쁜 게 아니라 뇌도 예쁘구나. 〈더 글로리〉 파트2는 ‘심리’ 복수극답게 등장인물들 사이에 복잡하게 얽혀 있는 감정선을 적극 활용한다.

물론, 복수극의 절정은 감옥에 갇힌 연진이를 동은이가 독대하는 장면이다. 사랑하는 아이, 자랑스러운 남편, 든든한 엄마, 영혼의 단짝 친구… 모두로부터 버림받고 혼자 남겨진 연진에게 동은은 로맨스드라마에 자주 등장했을 법한 사랑 고백을 한다. “너의 세상이 온통 나였으면 좋겠어.” 이보다 사랑스러운 저주가 세상에 또 있을까.

로맨스물의 대가 김은숙 작가의 내공은 장르물에서도 여전히 빛을 발한다. “이 감옥이 너의 지옥이길. 평생 넌 아무것도 모른 채 이 지옥에서 오래오래 살아주길 계속 비는 수밖에.” 오래오래 살아달라는 말이 한겨울 찬바람처럼 매섭게 느껴질 줄이야. 만수무강 덕담이 이토록 공포감을 자아낼 줄이야. 그건 그렇고 감옥이 감옥이지 왜 지옥이라는 거지.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듯, 감옥은 감옥이고 지옥은 지옥 아닌가.

이쯤에서 되짚어보는 〈더 글로리〉의 명대사. “넌 벌 받아야지. 신이 널 도우면 형벌, 신이 날 도우면 천벌.” 손명오 살인죄로 감옥에 갇힌 연진에게 동은은 ‘억울함’의 지옥을 선물한다. 도대체 뭐가 억울한 걸까. 손명오 살해를 들키지 않을 수 있었는데 들킨 것? 아니. 그럼 도대체 뭔데? 내가 모른 게 뭔데? 절규하는 연진을 남겨둔 채 동은은 유유히 자리를 뜬다. 손명오를 죽인 건 말이지, 사실 말이지, 너 말이지, 그래서 말이지…. 너의 세상이 온통 나였으면 좋겠어. 살아 숨을 쉬는 모든 순간, 뼈가 아리게, 억울해하면서.

마침내 동은은 감옥에 얌전히 갇혀 있는 연진을 끌어내 지옥행 비행기에 태워 저 멀리 천상계 안드로메다로 날려버리는 데 성공한다. “연진아, 나 되게 신나.”

연진이의 이중생활

〈더 글로리〉가 끝나고 허전함 때문에 밤새 잠 못 이루고 뒤척였을 분들을 위해 준비했다.

〈더 글로리〉 번외편. 만약 연진이가 학폭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였다면 어땠을까. 또는 학폭 피해자를 가족으로 두었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연진이의 멀티버스. 바로 디즈니 플러스 오리지널 시리즈 〈3인칭 복수〉다. 〈더 글로리〉 파트1이 공개되기 보름 전 종영한 드라마. 방영 시기가 엇비슷해서 마치 ‘우리’의 연진이가 〈3인칭 복수〉를 끝내고 〈더 글로리〉로 넘어와 또 다른 멀티버스를 살아가는 듯한 착각을 하게 만든 드라마. 심지어 나이도 같다. 18살. 고2 여고생.

〈3인칭 복수〉에서 ‘우리’의 연진이는 학폭 피해자 가족 ‘찬미’로 나온다. 정확히는 10대 시절 고등학생 연진이를 연기했던 배우 신예은이다. 우리가 아는 연진이의 그 얼굴로 배우 신예은은 〈3인칭 복수〉에서는 학폭 피해자 오빠를 둔 여동생으로 나온다. 음, 두 드라마 중 어느 것을 먼저 보든 정서적 동요가 심하게 온다. 연진이의 이중생활을 남몰래 목격한 느낌이랄까.

〈3인칭 복수〉의 줄거리는 아래와 같다. 쌍둥이 남매 찬미와 찬규는 부산에 있는 보육원에서 같이 자라다가 찬규가 입양되면서 서울로 혼자 올라가게 된다. 서로 떨어져 살게 되지만 쌍둥이 남매는 계속 연락하며 관계를 돈독하게 쌓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찬미는 찬규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유일한 가족 찬규의 죽음. 찬미는 오빠 죽음에 얽힌 숨은 진실을 찾아 찬규가 다니던 학교로 전학을 온다. 그리고 마주한 진실에 놀라게 되는데….

‘연진’이 ‘연진’하다

문동은을 괴롭히던 박연진의 ‘집요함’은 〈3인칭 복수〉의 찬미에게서 그대로 발견된다. 남들은 다 자살이라고 하는 오빠의 죽음을 타살이라고 확신한다. 그리고 혈혈단신 서울에 올라와 단독수사를 시작한다. 만류하는 형사의 말도 무시하고, 주변 친구들이 찬규가 그리 착한 학생은 아니었다고 증언해도 끝까지 진실을 찾아 고군분투한다. 음, 〈더 글로리〉 제작진이 〈3인칭 복수〉를 보고 배우 신예은을 캐스팅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 정도다.

연진이, 아니 연진이의 얼굴을 한 찬미의 집요함이 가장 돋보이는 장면은 총을 쏘는 씬이다. 음. 총?! 한국에서 총? 음. 10대 고등학생이 총?! 최근 학교폭력과 사적 복수를 다룬 드라마가 많다 보니, 그들 안에서 차별화 지점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더 글로리〉가 육체가 아닌 영혼의 복수를 내세운 것처럼 말이다. 사적 복수 대행을 모티프로 삼은 〈모범택시〉는 시즌2에서 복수하러 베트남으로 해외 출장까지 간다. 그렇다. 현지 촬영에 드는 제작비를 고려하면 베트남에 가는 것보단 총 한 자루 사는 게 남는 장사임은 분명하다.

〈3인칭 복수〉는 10대 하이틴물 최초로 총을 등장시킨다. 한국에서는 총기 소지가 아주 예외적인 상황을 제외하고는 불법인데 어떻게 총이 나오지, 그것도 10대 고등학생이 주인공인 드라마에서, 하고 의아해하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걱정하지 마시라. 극중 주인공 찬미는 사격선수고, 수시로 총 쏘는 연습을 한다. 총기 소지는 물론이고 복수의 대상을 향한 저격까지 하나도 어색함이 없다. 음, 역시 사람은 변하지 않는 법이다. 여기서나 저기서나 연진이는 참 개성이 강하다.

배우 신예은 유니버스

사적 복수에 관련된 드라마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통쾌함의 끝에 찝찝함이 길게 남는다.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법의 사각지대에서 정의 실현의 대리자 역할을 해준다는 점에서 사적 복수의 존재의의는 부정하기 어렵다. 하지만 선과 악, 옳고 그름의 기준을 개개인이 판단하고 처벌과 응징을 주관적으로 집행한다는 것은 아무리 봐도 굉장히 위험하다.

이게 무슨 고구마 백개 한 번에 먹는 답답한 소리야, 하고 꾸짖고 싶은 분들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지옥〉(2021)을 보기 바란다. 사적 복수의 상대성과 그로 인한 무시무시한 사회 혼란에 대해 성찰하게 만드는 드라마다. 사이다 맛 사적 복수에 열광하는 한국드라마 월드에서 ‘브레이크 페달’과 같은 드라마랄까. 안타깝게도 배우 유아인 마약 사건으로 시즌 2 방영이 무기한 연장되었지만. 아, 일반인 엄홍식과 연예인 유아인의 멀티버스.

잠시 잊고 있었다. 우리의 연진이. 배우 신예은도 자기만의 세계관을 넓혀가는 중이다. 2023년 봄, 그녀는 SBS 드라마 〈꽃선비 열애사〉의 주인공이 되었고 또 한 번 ‘연진이다움’을 연기한다. 전재준과 하도영 사이를 오가며 엄청난 소유욕을 과시하던 그녀는 이번에는 둘에 만족하지 않고 셋까지 나아간다. 극중 그녀는 객주 이화원의 주인 윤단오 역할을 맡아 하숙생 꽃선비 3명과 로맨스를 만들어간다. “과연 세 커플 중 조선을 뒤흔들 진짜 짝은 누구일지, 다양한 추측과 함께 흥미롭게 첫 방송을 기다려주시길 바란다”라고 드라마 제작진은 말했는데… 음, 연진아, 너 되게 신나 보여.

 


김민정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연두빛 캠퍼스물과 회색빛 오피스물 사이를 분주히 오가고 있다. 언젠가는 내 인생이 장르가 판타지로맨스코미디홈드라마가 될 거라고 굳게 믿고 있다. 2022년 중앙대학교 교육상과 제4회 르몽드 문화평론가상을 수상하였다. 현재 《쿨투라》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크리티크 M》 편집위원과 KBS World Radio 〈김형중의 음악세상〉 고정 게스트로 활동하며 자발적 드라마 홍보대사로 열일하고 있다. 저서로 드라마 캐릭터 비평집 『드라마에 내 얼굴이 있다』 외 여러 권의 책이 있다.

사진제공 넷플릭스, 디즈니+

 

* 《쿨투라》 2023년 4월호(통권 10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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