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28년의 현재: 14회 광주비엔날레
[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28년의 현재: 14회 광주비엔날레
  • 강수미(미학자, 미술비평가,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 승인 2023.04.28 16: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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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베즈웨 시와니, <영혼강림>, 제14회 광주비엔날레 전시전경, 2023.
photo by 강수미

광주비엔날레 세계관
2023. 04. -광주-1980. 05.

숫자는 메시지를 단순명쾌하게 전달하는 힘이 있다. 또 말과 글에 담긴 의미의 무게를 단번에 정리하거나 강조하는 힘을 지녔다. 그래서 우리는 연도와 달을 표시했음에 분명한 서두의 숫자들을 통해 ‘광주’라는 한 공간에서 43년의 시간이 경과했음을 금세 알아챌 수 있다. 하지만 의미의 문제로는 그 숫자가 결코 간단치 않다. 앞의 시간은 열네 번째 광주비엔날레가 개막한 올봄이다. 그리고 뒤의 ‘1980년 5월’은 한국현대사의 비극적 사건, 하지만 변혁을 이끈 그 사건을 예표 한다. 군사독재정권이 자행한 국가폭력과 그에 맞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운 한 도시의 크나큰 저항, 그리고 희생이 피로써 엉켜있다. 바로 ‘5·18 광주민주항쟁’. 그 실체와 디테일을 숫자 몇 개로 전달하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고민이 더 깊어지는 지점은 43년이 지나도 역사의 진실이 안정화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시간이 흐를수록 ‘5·18’을 향한 의도된 비진실, 조작, 혐오의 정치학이 드세고, 과거를 욕보이는 무리가 생겨났다. 어처구니없지만 그 영향으로 참된 민주주의, 진정한 자유가 점점 사회적으로 흐릿해졌고 심지어 사적 안위나 이기적 행복에 비하면 덜 중요해 (의식과 감각에 떠오르지 않는) 비존재적인 것으로 위축되었다.

1995년 시작돼 2023년 올해로 14회를 맞이한 광주비엔날레는 43년 전 광주의 그 가까운 과거를 태생적 배경으로 한다. 그 점에서 서두처럼 두 개의 연도는 쌍을 이룬다. 하나의 연도는 매번 달라지는 현재 시점이지만, 다른 연도는 역사에 박혀있다는 점만 다를 뿐이다. 광주비엔날레의 목적과 역할을 정의하는 일 또한 같은 논리로 가능하다. 즉 ‘80년 5월 광주’라는 사회적 유산을 토대 삼고 ‘언제나 지금여기의 광주’가 문화 지형학적 매개체가 되어 세계의 미술을 집결시키고 다시 세계로 확산시키는 2년 주기 국제 현대미술제인 것이다. 1994년 선언한 창설 취지부터 이미 ‘5·18 광주정신’을 명문화했다. 그것으로 이 대규모 현대미술 축제가 베니스비엔날레 같은 19세기 제국주의 예술 제도를 뒤늦게 모방하거나, 관광산업용 아트이벤트에 편승하는 일과는 다른 정체성을 내재함을 밝혔다. 또한 전 세계 다양한 국가, 인종, 민족, 공동체, 미술계 전문가, 아방가르드 미학이 집결하는 현대미술의 최전선을 담당하되 이를테면 선언적으로라도 ‘미술, 그들만의 리그’는 지양해왔다. 오히려 광주비엔날레의 중심은 예술과 정치, 예술과 사회, 인간 현존과 미술의 작용 등 유미주의 예술 범주를 넘어 동시대의 종합적 의제를 다루고 전시로 구현하는 데 정향해온 것이다. 덕분에 28년의 역사와 14개의 전시 에디션이 축적되는 동안 국제 미술계에서 광주비엔날레는 변혁의 사회의식과 진보의 예술실행이 다국적, 다원적으로 이뤄지는 대표 비엔날레로 자리매김했다. ‘광주정신’이 현실 사회에서 부침에 시달리고 우여곡절을 겪어온 것처럼, 광주비엔날레도 때로는 위기를 자초하고 논란의 여지가 많은 일에 휩싸이는 가운데도 말이다.

에드가 칼렐, <고대 지식 형태의 메아리>, 제14회 광주비엔날레 전시전경, 2023.
photo by 강수미

광주비엔날레는 특히 국내외 미술인들로부터 여전한 지지와 인정을 받고 있다. 출범 초기부터 주제전시를 비롯해 일련의 비엔날레 프로그램을 통해 제시되는 첨예한 이미지와 비판적 담론이 미술계 안팎을 관통하는 맥락의 세계관을 유지해왔기 때문이다. 사실 어떠한 순수예술로도 1980년 5월 당시 광주시민의 행위와 정신을 충분히 담을 수 없다. 21세기 들어 심화한 국가 간 패권경쟁과 강대국 우선주의, 양극화·차별·갈등·분열의 정치, 팬데믹과 경제 위기의 일상화가 사회 전 분야를 무력화하는데도 미술의 역할은 역시나 한정적이다. 비엔날레도 마찬가지로 전 세계의 정의, 자유, 민주주의, 정치적 올바름, 윤리, 환경, 더 나은 삶을 가로막는 산적한 문제를 직접 해결할 능력이 없다. 그런 행정적·주권적 해결체가 아니다. 대신 그에 대해 비평적으로 발언할 유효한 스피커이고, 자발적 행위자가 모이고 행위할 수 있는 다공多孔의 플랫폼이다. 그런 가치들과 지향성이 시민사회로 흐르고 스며들게 하는 일, 적어도 그런 기대를 갖고 미술을 행위하는 공집합체가 바로 비엔날레다. 그 점에서 전 세계 200여 개 비엔날레 중 광주비엔날레는 그간 꽤 큰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럼 이번은 어떤가?

제14회 광주비엔날레 전시전경, 2023.
photo by 강수미

비엔날레에서 ‘여리게’의 의미

제14회 광주비엔날레의 제목이자 주제는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Soft and Weak like Water》이다. 시적인 표제를 내걸고 풍부한 해석을 유도한다는 점에서 여느 국제 비엔날레들과 유사해 보인다. 하지만 국내외 미술계 내부에서 비엔날레의 실체는 현대미술 제도/전시형식의 우세 종이자 미술전문가들의 경쟁 장이다. 때문에 국제 현대미술전의 필승전략은 도전적이고 선언적인 화두로 전 세계 핵심 미술인들의 주목을 끌고 기세를 잡는 데서 출발한다. 그에 비춰 볼 때 단어 ‘여리게/weak’는 꽤 독특하다. 그것은 섬세함, 미적임과 더불어 흐릿함, 취약성, 마이너리티를 연상시킨다. 게다가 영어 제목에 쓴 형용사 ‘weak’는 우선 ‘약하게’로 인지되고, 한국어 ‘여리게’는 피동이 아니라 능동태로 들린다. 이번 비엔날레를 기획한 이숙경 예술감독은 노자의 『도덕경』을 참고해 물이 “이질성과 모순을 수용하는” 속성이 있는 것처럼 “저항과 공존, 연대와 돌봄의 장소”로 본전시를 만들었다고 한다.1 이로써 ‘물처럼 부드럽게’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된다.

그러나 ‘여리게’는 무엇일까? 예술감독은 ‘여리게’를 우리에게 필요한 특별한 가치이자 태도로 제시한 것 같다. 이는 참여 작가들의 출신 및 작품을 면밀히 들여다봐야 알 수 있고 공감이 가는 부분이다. 이번 비엔날레에서 79명(팀)은 국가가 아니라 출생지로 표시된다. 자코파네, 고이아니아, 산후안 코말라파, 알할케레, 먀오리현, 아사히카와, 빌뉴스 등. 대부분 발음조차 쉽지 않은 완전히 낯선 곳이다. 비밀은 이곳들이 역사적으로 소수 민족, 선주민, 소멸해가는 부족이거나 알려진 국가의 한 도시라 해도 거의 전혀 들어본 적 없는 오지라는 사실에 있다. 그 맥락에서, 2023년 광주비엔날레 본전시는 변방의 미술가들이 자신의 뿌리와 문화 토양으로 만든 작품들을 의도적으로 국제미술 무대로 호명하고 중심화 했음을 읽을 수 있다. 요컨대 이 전시는 능동적으로 약한 쪽의 미술가들을 초대하고 그 작품들을 가시성의 장에 올렸다. 그럼으로써 근현대사 내내 불평등과 약자에 대한 강자의 착취로 기울어진 세계(식민주의, 인종차별, 제노포비아….)와 그 역사가 현재로 내속하는 문제(기후위기, 전쟁, 종교 갈등….)를 섬세히/여리게 들춰내 동시대 집단의 편향된 멘털리티를 자극하고자 했을 수 있다. 단편적으로는 비엔날레 감상자에게 전시하는 것이지만, 크게 보면 전 지구적 차원으로 그런 예술 메시지를 송신한 것. 미술로 약함의 성질에 주목하고 가시성의 장에 올림으로써 주류의 강압에 맞서는 저항, 상이한 존재들의 공존과 연대, 상호 돌봄을 불러일으키고자 말이다.

팡록 술랍, <광주 꽃 피우다>, 제14회 광주비엔날레 전시전경, 2023.
photo by 강수미

어떤 전시 기획 방법을 써서 그렇게 했는가? 전시 서문을 읽어보면 대체적인 방향이 읽힌다. “전통 치유법부터 지역 사회에 기반을 둔 집단창작, 공예를 비롯한 다른 근대 예술 전통의 재해석에 이르기까지, 공존하는 방법에 중점을 둔 담론과 작업을 소개해 서로의 공통점과 고유성 모두를 아울러 연대하는 방법을 찾아보고자” 했다는 것이다. 긴 문장이지만 유독 ‘전통 치유법’, ‘집단창작’, ‘공예’, ‘연대’가 머리를 무겁게 한다. 아마 예술감독이 ‘여리게’와 더불어 주제어처럼 힘을 싣고자 한 메시지일 것이다.

 

국제 현대미술제의 제의가치?

요컨대 이번 광주비엔날레 본전시를 관통하는 기류는 미술의 마법적이고 제의적인 가치ritual value를 한편으로는 재생하기,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현대미술 버전으로 키우기 같다. 알다시피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은 예술의 역사를 크게 제의가치를 수용의 목적으로 한 시대와 전시가치exhibition value를 본격화한 시대로 나누고 후자를 모더니즘 산업사회 이후로 정의했다.2 그런데 2023년의 우리는 광주비엔날레에서 역사의 결을 거슬러 제의적 미술로 회귀하고, 그것의 공예적 속성 및 문화적 원천에 집중할 것을 권유받고 있다. 왜 그래야 할까? 앞서 썼듯이 이 전시가 근현대사 속에서 약자가 된, 소외된, 변방이 되고 힘의 장force-field에서 지워져버린 존재/문화/공동체를 주체이자 중심으로 초대했다는 데 직접적 연관성이 있다. 하지만 담론적 의미는 달리 해석할 수 있다. 요컨대 문명의 현대화가 최고조에 달하고 산업과 기술의 수준이 최첨단에 이른 지금 여기의 난제를 풀고 동시대적 변혁을 도모하려면 역설적이게도 예술에서 ‘전통적 치유법’과 ‘집단창작’과 ‘공예’의 기능을 재생시키고 우리가 ‘연대’해야 한다는 의미로 말이다.

이건용, <바디스케이프 76-3>, 제14회 광주비엔날레 전시전경, 2023.
photo by 강수미

예컨대 에드가 칼렐의 〈고대 지식 형태의 메아리〉(2023)는 시각적으로나 내용으로나 명백히 제의다. “과테말라 산후안 코말라파에 위치한 선조들의 전통을” 기리는 마야족 후손 미술가인 그에게 광주비엔날레 출품작은 곧 “선조들에게 돌 위에 과일과 채소를 올려놓고 바치는” 제물인 것이다. 하지만 좀 냉정해지자. 그럼 칼렐의 제의미술을 통해서 고대와 동시대, 마야족과 글로벌 인류, 마법적 세계관과 챗GPT의 신경망, 사라진 문명과 하이엔드 미술은 연결되는 것인가? 역사의 약한 존재들은 현재 여기서 ‘비엔날레 출품작’의 지위를 부여받은 사물들 속으로 흘러들어 부활하거나 적어도 새 미술이 가야할 길을 현시하는가? 그 제의적-전시작들을 통해 정말 우리의 연대가 가능한가? 등등의 의문과 회의감이 들 수밖에 없다. 왜 그것이 현대미술(이어야 하는)가는 제쳐두더라도 말이다. 방사형으로 배치된 돌덩이들 위에서 수박, 참외, 배, 딸기, 땅콩, 바나나가 말라가는 전시장 풍경은 승리자에 짓눌린 역사의 약자들을 긍정하는 미술이라기보다는 자칫 현대미술계의 이국적 취향, 이그조틱 컬렉션, 수공예 노동의 찬미처럼 보인다. 여기서(물론 칼렐만이 아니라) 이 비엔날레 기획의 좋은 목적과 접근법에도 불구하고 한계가 드러난다. 단적으로 말해 마이너리티에 주목하고 중심에서 조명하는 일이 의도치 않게/불가피하게 마이너리티의 소수자성을 ‘전시’하는 역설적 위험 말이다. 이 큰 규모의 비엔날레에서 본전시 서막이라는 중차대한 자리를 담당한 블레베즈웨 시와니의 설치 영상작품이 그 위험의 가장 두드러진 사례다. 요하네스버그 출신 흑인여성인 작가는 영적 치유의 전수자sangoma로서 죽은 자와 산 자는 물론 “조상들의 의례, 기독교와 아프리카 정신성의 관계”를 주제로 작업한다고 한다. 게다가 남아프리카에서 흑인여성이 겪는 차별과 폭력의 경험을 중요시한 작업을 한다는데, 정작 그녀의 작품은 전형적인 비엔날레 대형 설치의 느슨함, 그리고 자아도취적인 제스처를 담은 비디오의 패셔너블함으로 관객을 맞는다.

글 앞부분에 썼듯이 진정한 자유와 참된 민주주의가 자꾸 동시대의 마이너리티, 비존재에 가까워지는 문제적 현실에서 큐레이토리얼이 세계사 혹은 인류학적 리서치를 수행하는 일은 대단히 값지다. 또 그로부터 선주민indigenous people(정말 이 용어는 ‘원주민’보다 정치적으로 올바른가?)의 미술을 발굴, 조명, 제 의미를 찾도록 한다면 기울어진 세계의 균형이 은유적·정신적·문화예술의 지각적 차원에서 맞춰질지 모른다. 하지만 본토성의 원리를 큐레이션이 압도하는 한계를 자각하지 않을 경우 약한 존재는 언제든 여리게 하려는 쪽에 의해 조각날 것이다. 1997년 제10회 카셀도큐멘타는 2023년 현재까지도 가장 유럽 중심적이며 정치적인 기획 중 하나로 꼽힌다. 당시 예술감독을 맡은 카트린 다비드Catherine David는 자신의 기획 방법론을 이렇게 설명했다. “영화처럼, 도큐멘타는 길고 인내심이 필요한 몽타주 과정이다. 어느 정도는 일관된 스크립트를 가지고 작업하지만, 시퀀스는 분리되고 신중히 고려된다. 내부 구조가 확립되면 전체로 접합된다.”3 몽타주, 스크립트, 시퀀스 분리, 전체, 접합…. 우리는 영향력 있는 대규모 국제 현대미술전이 어떤 변증법과 모순의 원리 속에 처하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엄정순 <코 없는 코끼리> 2023.
photo by 강수미

 


 1 이하 따로 출처 표시 없는 인용구의 전거는 『제14회 광주비엔날레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 가이드북』, (재)광주비엔날레, 2023.

2 발터 벤야민,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 최성만 옮김, 『발터 벤야민 선집 2』, 길, 2007, p. 113과 강수미, 『아이스테시스: 발터 벤야민과 사유하는 미학』, 글항아리, 2011, p. 242-245.

3 Rosalind E. Krauss, Under Blue Cup, Cambridge, Massachusetts; The MIT Press, 2011, p. 55과 58에서 재인용


강수미 미학. 미술평론. 동덕여자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 부교수. 『다공예술』, 『아이스테시스: 발터 벤야민과 사유하는 미학』등 다수의 저서, 평론, 논문 발표. 주요 연구 분야는 동시대 문화예술 분석, 현대미술 비평, 예술과 인공지능(Art+AI) 이론, 공공예술 프로젝트 기획 및 비평. 현재 한국연구재단 전문위원, 국립현대미술관 운영심의위원, 한국미학예술학회 기획이사, 《쿨투라》 편집위원.

 

 

* 《쿨투라》 2023년 5월호(통권 107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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