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Theme] ‘대안 가족’: 가족의 해체와 재구성 사이에서
[5월 Theme] ‘대안 가족’: 가족의 해체와 재구성 사이에서
  • 설규주(경인교대 교수)
  • 승인 2019.04.26 17: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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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상 가족’이라는 말이 있다. 사전에 나오는 말은 아니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제법 널리 쓰인다. 한부모 가족, 조손 가족, 비자녀 가족 등은 이 범주에 들어가기 어렵다. 사회화 기관인 학교에서 수업의 바이블로 사용되는 교과서에서는 부부와 그 자녀를 ‘정상 가족’의 전형적인 예로 오랫동안 묘사해 왔다. 가족이 등장하는 사진이나 삽화에서, 특히 단란한 가족의 모습을 보여줄 때면 엄마, 아빠, 아들, 딸이 활짝 웃고 있는 장면이 교과서의 한 자리를 꼭 차지하곤 했다.

 

 가족이란 일반적으로 혈연, 혼인, 입양을 매개로 해서 이루어진 집단을 가리킨다. 그 중에서도 전통적으로 가족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요인으로 작동해 온 것은 혈연과 혼인이다. 이미 어느 집안의 혈통에 각각 속해 있는 두 사람이 혼인을 하고, 그 혼인은 다시 기존의 혈통이 계속 이어지도록 하는 기능을 한다. 우리 사회에서는 이를 가리켜 ‘대를 잇는다’라고 하는데, 그것은 (남자측) 집안 입장에서 볼 때 그런 것이고 사회학에서는 ‘구성원의 재생산’이라는 좀 더 거시적이고 중립적인 표현을 쓴다.

 

 사회 제도로서 가족이 제공하는 기능은 구성원의 재생산말고도 많다. 구성원을 양육하고 보호하는 것, 기초적인 사회화를 시키는 것, 정서적 안정을 제공하는 것, 일자리를 제공하는 것, 물건이나 서비스를 생산하는 것 등등… 가족은 원래 이 많은 기능을 다 감당했었다. 부모의 손만으로는 부족하니 조부모나 언니오빠가 어린 아이를 함께 돌보았다. 어르신들은 어린 아이들에게 기본적인 예의와 규범을 가르쳤고 이를 어길 경우 일정한 제재를 가하기도 했다. 가족이 힘을 합쳐 농산물이나 가공물을 생산했고 그걸 통해 먹고 사는 문제도 해결했다. 그러한 과정에서 가족 구성원 간에는 미운 정 고운 정으로 얽힌 끈끈한 유대가 형성되었다. 이렇게 보면 가족은 그 구성원에게는 만능이고 전부였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 요즘은 그렇게 탄탄하고 끈끈하던 가족이 해체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쉽게 듣는다. 가족 해체라는 것은 혼인, 혈연, 입양 등으로 결합되어 있던 가족 구성원이 단지 물리적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걸 의미하지는 않는다. 또한, 이혼이 증가하고, 부모-자식 사이에 대화가 줄어드는 것과 같은 표면적 현상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가족 해체를 다음의 두 가지 측면에서 보면 이해에 좀더 도움이 된다. 첫째, 가족 ‘기능’의 해체, 둘째, ‘전통적 가족 개념’의 해체다.

 

 첫째, 오늘날 가족은 구성원의 재생산을 제외한 기존 기능의 대부분을 다른 사회 제도에 이양했거나 적어도 그것과 분담하고 있다. 오늘날 일자리 제공이나 생산은 주로 회사가 담당한다. 교육은 학교가, 보육은 어린이집이, 보호는 경찰이나 요양원이, 정서적 유대는 또래 집단, 종교 단체, 동호회, 온라인 커뮤니티 등이 압도적으로 많이 제공한다. 가족은 그 구성원에게 더 이상 만능도 전부도 아니다. 구성원의 욕구와 필요를 채워 주는 건 가족 말고도 너무 많다. 오히려 가족보다 나은 경우도 아주 많다. 가족이 제 구실을 못해서 그렇다기보다는 사람들의 생활양식이 과거처럼 가족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 쪽으로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 그러다 보니 가족의 개념도 바뀌고 있다. 전통적 가족 개념이란 앞서 언급한 ‘정상 가족’과 맥을 같이 한다. 남녀가 혼인을 해서 부부가 되고 자녀를 낳아 기르니, 이 가족에는 아빠가 있고 엄마가 있고 그들과 혈연관계에 있는 아들딸이 있게 마련이다. 그것이 바르고 일상적인 ‘정상 가족’의 모습이다. 그런데 혼인이라는 그 ‘기본 전제’부터 흔들리고 있는 것이 오늘날 가족 해체의 한 단면이다.

 

 비혼非婚 가족을 예로 들어 보자. 비혼은 결혼을 하지 않겠다는 독신주의와는 구분된다. 결혼이라는 제도에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 관혼상제의 하나인 결혼을 굳이 필수적 의례로까지 여기지는 않는다는 점이 비혼의 특징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비혼非婚이라는 단어가 등재되어 있지 않다. 이 글을 쓰는데 사용하고 있는 한글 2014 프로그램도 비혼이라는 단어가 모니터에 나타날 때마다 빨간색 밑줄을 그어 놓는다. 한글 프로그램이 보기에 생소하거나 맞춤법이 틀렸을 때면 여지없이 보여주는 그 밑줄이다. 언젠가는 그래도 혼인을 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을 주는 미혼未婚과 달리, 그저 혼인하지 않은 상태임을 건조하게 드러내는 비혼非婚이라는 표현 은 아직 사회적으로 널리 공식화되지는 못한 것 같다.

 

 비혼 가족도 마찬가지다. 가족의 형성 요인 중 하나가 혼인인데, 혼인하지 않은 가족이라니 이건 형용 모순에 가깝다. 그런데 비혼 가족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들은 ‘비혼’을 ‘결격 사유’로 보지 않는다. 그리고 사람들을 결합시켜주는 방식이나 요인은 혼인 말고도 많으며 그러한 결합이 수행하는 기능 역시 가족 못지 않다고 본다.

 

 다시 ‘정상 가족’으로 돌아가보자. 무엇이 ‘정상 가족’ 일까? 정상 가족이라면 으레 엄마, 아빠, 아들, 딸이 활짝 웃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는데, 정작 중요한 것은 엄마, 아빠, 아들, 딸이라는 구성원의 면면이 아니라, ‘활 짝 웃음’ 그 자체다. 혼인한 부부와 그 자녀가 있으면 가족 안에서의 ‘활짝 웃음’이 보장되는가? 아들, 딸이 성인이 되어도 그 ‘활짝 웃음’이 어릴 적 그대로 이어지는가? 웃음은커녕 그 단란해야 할 4인 가족 간에 무관심이 넘치고 냉기가 흐르고 심지어 폭력까지 행사되는 경 우는 또 얼마나 많은가? 그렇다면 비혼이라서 가족 형성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것만으로 정상이 아니라고 할 것까지는 없지 않을까?

 

 혼인으로 맺어진 것은 아니더라도, 혈연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더라도 구성원 간의 결합 자체에서 비롯되는 ‘활짝 웃음’이 있다면 그 웃음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해 주어야 하지 않을까? 정서적 안정을 제공하는 가족의 기능 하나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혼인과 혈연을 강조했던 전통적인 ‘정상 가족’ 개념 외에, 구성원 간의 유연한 결합을 통해서도 전통적 가족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방식, 즉 비혼 가족과 같은 대안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굳이 외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기존 합리성의 산물인 혼인 제도와는 다른 길을 가는 비혼은 지극히 포스트모더니즘적이다. 포스트모더 니즘을 설명하는 방식 중에는 해체destruction와 재구성 reconstruction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를 이용하는 것이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에서의 해체는 파괴 자체를 위한 해체가 아니라, 재건축을 위한 해체다. 재건축, 재구성을 위해서는 일단 해체되어야 한다. 해체 이후의 재구성은 유연하다. 언제라도 또 해체될 수 있고 재건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비혼은 가족 제도를 분해하고 붕괴시키는 것이 아니라, 가족 제도의 목록을 하나 더 추가함 으로써 가족 개념의 확대를 통한 가족의 재구성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화 <가족의 탄생>(김태용), <고령화 가족>(송해성), <어느 가족>(고레에다 히로카즈)에서는 법적인 의미의 혼인이나 본능적인 애착을 갖게 하는 혈연이라는 것이 가족의 결합에서 그렇게 중요한 요인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저 영화니까, 하며 넘겨 버리기에는 ‘판타지’처럼 보였던 대안 가족과 우리 현실 사이의 거리가 너무 가깝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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