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관탐방] 원효로 목월의 사랑방과 목월 시의 정원들
[문학관탐방] 원효로 목월의 사랑방과 목월 시의 정원들
  • 손정순(시인, 본지 편집인)
  • 승인 2019.05.0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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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판사 앞마당에 목련이 활짝 피었다. 흰 눈송이처럼 맑고 순결한 유백색으로 피어나는 4월의 목련은 마치 세상을 달관한 이의 모습 같다. 길을 걷다가도 목련이 활짝 핀 누군가의 집 앞에 이르면 저절로 발길이 멈춰진다. 꽃눈이 붓을 닮아서 목필木筆이라고도 하고, 향기 나는 난초라 하여 목란木蘭이라고도 한다. 또한 연꽃이 나무에 달렸다 하여 목련木蓮이라고도 한다는데 너무나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연모戀慕’의 꽃말이 너무나 자연스러운 목련 앞에 서면 나도 모르게 아련한 추억에 젖는다. 그리고 잊었던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고 싶다.

 

원효로 목월의 집, 사랑방

 “목련꽃 그늘 아래서 베르테르의 편질 읽노라/구름꽃 피는 언덕에서 피리를 부노라/아아 멀리 떠나와 이름 없는 항구에서 배를 타노라/돌아온 사월은 생명의 등불을 밝혀든다/빛나는 꿈의 계절아/눈물어린 무지개 계절아”

 지금 불러도 가슴 설레는 이 노래는 널리 애창되어 우리에게도 친숙한 박목월(1915~1978)의 시 <사월의 노래>다. 가사를 가만히 음미해 보니, 생전에 목월 시인이 살았던 서울 용산구 원효로 4가의 2층집이 떠오른다. 목월의 집에는 큰 백목련이 한 그루 있었다. 서울에 처음 집을 마련한 목월이 그의 장남(박동규 교수)과 직접 심은 나무라고 한다. 창이 유난히 넓은 그의 2층 작업실까지 “생명의 등불을 밝혀 든” 백목련은 원효로의 봄소식을 한껏 전해주었다.

 그 황홀한 목련꽃 그늘 아래 자리한 작은 사랑방에서는 월간 시지 <심상心像> 을 발간하였는데, 대학 졸업 후 나는 그곳에서 2년간 편집 일을 했다. 잡지사라고 하면 아주 번듯한 건물로만 상상했던 나에게 그곳 풍경은 너무 낯설었다. 비품이라고는 나란히 놓은 책상 두 개와 사물함 몇 개가 전부였고, 두세 사람만 들어서도 방안이 가득 찼다. 직원 또한 선배 편집자와 신입사원인 나 둘뿐이었다. 과연 이 곳에서 잡지가 나올 수 있을까?

 그러나 걱정과 달리 작은 사랑방에서는 매월 월간지가 척척 나왔고, 매년 여름이면 문청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던 ‘해변시인학교’라는 큰 행사를 성황리에 치러냈다. 전국의 많은 시인들이 사랑방으로 몰려왔으며, 거기서 고스톱판도 벌이고 문단야사를 나누기도 했다. 목월의 작은 사랑방이 그가 창간한 우리나라 최초의 시전문지의 편집실이자 시인들의 사랑방 노릇을 톡톡히 한 셈이다. 나는 그곳 창고에서 파지가 되기 일보직전의 희귀본들을 찾아내는 횡재를 누리기도 했다. 1990년대 초반, 철없던 내게 반항심과 시심詩心을 심어주었으며 백목련처럼 아름다우셨던 미망인 고 유익순(당시 <심상> 발행인) 장로의 기독교적인 사랑을 체감할 수 있는 목월의 집, 사랑방이었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원효로 목월의 집 초입에는 목월 소공원이 조성되었고, 「청노루」 시비가 그의 흔적을 지키고 있다.

 이렇게 목련이 펑펑 터지는,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봄날이면, 나는 원효로의 목월 사랑방이 더욱 그리워진다. 신입 직원이었던 나에게 할머니라고 부르게 하셨던 유익순 사장은 강하고도 부드러운 분이셨다. 척박했던 시절에 한국기독교장로회 아 홉 번째 여성장로로 선출된 그는 늘 이웃을 보살폈고 우리에게도 무엇이든 나눠주셨다. 기독교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셨던 유 장로님 덕분에 나는 목월의 가족들을 고모, 삼촌 이렇게 부를 수 있었다. 이후 유 장로님은 나를 목월 시인과 당신이 개척한 ‘효동교회’로 인도하였고, 지금까지도 그 인연이 이어지고 있다.

 목월은 슬하에 1남 4녀를 두었다. 장남 박동규(당시 고문, 서울대 명예교수), 장녀 박동명(당시 미국에 거주하면서도 해마다 서울 원효로 집에 방문하여 어머니(유익순)의 따듯한 벗이 되어 주었다.), 차남 박남규(당시 주간이며, 해외 의류무역 사업가였던 그는 그림과 컷을 잘 그렸다. 어느 날, 이태리를 다녀오며 우리에게 게스 청바지를 선물해주었는데 당시 참 행복했던 기억이 난다. 현재 LA 거주), 3남 박문규(당시 잡지사 근무했는데, 덕분에 우리는 매달 공짜로 잡지를 받아볼 수 있었다. 한국 거주), 막내 박신규(당시 미국에 거주했지만 한국과 해외를 오 가며 기계 사업을 함. 현재 미국 고위 공무원)이다. 목월의 시 「가정」에는 그들이 등장한다.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문반.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삼의 코가 납작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둥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문반.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문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 「가정」 전문

 

 박목월이 태어나고 자란 경주 월성의 자연에서 인간 세계로 내려온 ‘원효로’는 그가 삶과 부딪친 현주소의 위치였다. 6·25전쟁의 격동기를 맞은 그의 시는 초기시와 달리 담담한 현실 생활을 소재로 선택하여 시와 현실의 생활을 일원화시키는 데 집중하였다. 그 결과 평범한 가장을 자처한 고백의 언어가 많아지게 되었다. 가장으로서 한없이 흔들리고 있는 모습을 구체화한 위 시편은 그중 가장 선명한 예이다.

 

용인 목월 시 정원

그래서일까. 지난 2015년 5월 30일, 목월이 잠든 용인공원에 그의 「가정」 초안이 새겨진 시비詩碑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木月시 정원’은 당시 탄생 100주년을 맞는 박목월(1915~1978) 시인을 기리기 위해 그의 장남 박동규 교수와 용인공원이 뜻을 모아 고인의 묘역이자 리한 용인공원 안에 조성한 것이다. 시비에는 시인이 이 작품을 처음 구상한 1960년대, 노트에 쓴 육필이 그대로 재현됐다. 당시 붙은 제목은 「겨울의 가족」이었고, 내용도 최종 발표작과 차이가 있다.

 시집 『청담』에 실린 이 작품에 담겨 있는 삶의 고단함과 혈육 혹은 자신을 향한 끝없는 연민의 자의식 역시 박목월 시의 중요한 주제적 지향점의 하나이다. “시련은 신의 긍휼하신 선물”(「무제」, 「크고 부 드러운 손」)이라고 명명했으며, 목월은 가장으로서의 책임과 즐거움을 이렇듯 곡진한 시 한 편에 녹여 냈다, 이처럼 ‘가정’은 박목월에게 신성이 거소하는 공간보다 더욱 절실하고도 실질적인 생활공간이자, 지상적 사랑의 실현 장소이기도 하였다. 그것은 비록 “종점 근처의 쓸쓸한 / 하숙집”(「효자동 뻐꾹새」)이거나 적막한 “원효로 삼가 전차종점”(「종점에서」)의 공간이지만, 삶의 고단함으로 빚어질 만한 갈등과 불화가 배제된 화해의 공간이다. 이것이야말로 그의 긍정적인 인생관의 한 표지이거니와, 이는 그의 근원 지향의 상상력이 ‘가정’이라는 울타리에서 화해의 정조로 수렴된 구상具象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으로써 이토록 가난한 삶에서 “허나, 인간이 / 평생 마른옷만 입을까부냐. / 다만 두 발이 젖지 않는 / 그것만으로 / 나는 고맙고 눈물겹다.”(「某日」)고 말하는 감사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지상” 곧 “가정”에는 “문수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이 산다. 이 삶은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얼음과 눈으로 벽을 짜올린” “연민한 삶”이다. 그런데 이러한 삶의 반응으로 나타나는 것이 “미소하는 내 얼굴”이다. 이는 물론 반어적으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삶에 대한 연민과 긍정이 안팎을 이루는 사실적 진술로 보는 것이 옳다. 비록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으면서 살아가는 가난한 삶이지만, 지상적 사랑의 절절함은 그것을 온기로 녹여내고 있는 것이다.

 박동규 교수는 선친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용인 공원과 협의하고 자비를 털어 공원 내 약 830㎡ 규모 터에 박목월 시비 8개를 세운 ‘박목월 시 정원’을 마련한 것이다. 시비에는 「가정」을 비롯해 「나그네」, 「먼 사람에게」, 「어머니의 언더라인」, 「임에게」, 「청노루」 등 목월의 초기·중기·말기 작품이 고루 담겼다.

 이날 개원식에는 유족을 비롯해 목월이 발행인을 맡았던 시전문 월간지 ‘문학사 심상’ 관계자, 선 생의 한양대 제자 모임인 ‘목월문학포럼’ 회원, 목월이 장로로 임직했던 효동교회의 성도를 비롯한 기독교인들, 용인문학회 회원 등 각계 인사 200여 명이 참석했다.

 박동규 교수는 “아버지의 묘는 물론이고 공원묘지에 오는 많은 사람이 시로 저마다 상처를 치유하 고 아이와도 둘러볼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며 “시들어 버릴 꽃 한 송이 놓는 대신 아버지의 시를 보고 쉬는 공간을 만들면 ‘살아있는 묘지’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고 전했다.

 목월의 자작시 해설서 「보랏빛 소묘」를 보고 시인의 꿈을 키웠다는 나태주 시인은 개원식에 맞춰 쓴 헌시獻詩 「100년, 아버지」를 통해 그리움과 존경의 말을 대신했다.

 

“짧지 않은 한국시사 100년에서/ 오롯이 아버지 같은 시인 한 분 꼽으라면 / 누구라도 서슴없이 대는 이름, 박목월 // 어찌나 한 사람만 그럴까 보냐 / 많은 시인들 선생님에게서 아버지를 보았고 / 아버지를 살았고 지금도 아버지를 잊지 못한다.”(나태주)

 

 청록파의 대표적 서정시인으로 불리는, 시적으로 수려한 것은 물론이고 대중에게도 친숙한 아버지가 영원히 시로 기억되기를 바라는 박동규 교수의 바람은 목월시를 사랑하는 독자들 모두의 바람 일 것이다.

 

경주 목월문학관

내킨 김에 차를 몰고 경주로 향했다. 불국사 초입에 들어서자 이곳은 아예 목련 숲이다. 바로 동리목 월문학관 가는 길이다. 아, 목월은 그리운 고향의 목련을 원효로 집 마당에 옮겨심었던 걸까? 아사달 사랑탑 주변과 연못의 푸르른 빛이 반사된 목련 은 군락을 이뤄 탐스러운 눈꽃을 펑펑 터트린다. 그 뒤로 홍매화와 살구꽃이 흐드러지게 꽃향기를 뿌린다. 순백의 꽃이 무더기로 피어나는 이 봄은 신라의 천년 고찰도 현기증을 느낄 것이다.

 나는 초등학교 때 건천에 사는 친척 언니와 가끔 경주를 다녀왔다. 문학소녀였던 언니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내게 들려주었지만 경주에 당도한 순간 그 이야기들은 꿈결처럼 날아가 버렸다. 그러다 중학교 1학년이 되어 나는 경주 화랑문화제에 참석하 게 되었다. 버스가 건천을 지나 경주를 향해 달려갈 때 우리를 인솔했던 국어선생님이 차창 밖을 가리키며 “여기가 목월의 고향”이라고 알려주셨다. 그때서야 그 어렴풋한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당시 건천에 사는 언니는 고향의 자랑이었던 목월의 시를 내게 들려주었고, 목월에 대한 극진한 사랑을 나도 느끼길 바랐던 것이었다.

 경주에 도착하자, <심상>에 다닐 때 보문단지에 건립한 목월 시비가 생각나서 그쪽으로 향했다. 친필 시 「달」을 새긴 박목월 시비는 경주의 보문단지 를 잘 지키고 있었다. 또한 경주 황성공원에는 목월 의 「얼룩송아지」 노래비도 있다. 이들은 경주를 더욱 문화적 향기가 서린 곳으로 만들어 준다.

 다시 동리목월문학관으로 향했다. 문학관은 토함산 가는 길에서 불국사 정문으로 가는 길과 마주보는 숲길에 있다. 토함산으로 600m쯤 달려 문학관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두 개의 팔작지붕을 가진 동리목월문학관으로 들어서자 광장에는 신라를 빛낸 인물관과 연오랑 세오녀 사랑탑이 보인다. 문학관 2층으로 올라가면 왼쪽이 동리문학관, 오른쪽이 목월문학관이다. 각 방에는 동리와 목월이 태어나 성장하고 작고할 때까지의 활동을 연대별로 전시했다. 두 문인의 원고와 손때 묻은 유품들 이다.(동리문학관에 대한 언급은 다음 기회로 미룬다.)

 목월 문학관으로 들어서면 「나그네」 시와 함께 목월의 흉상을 만난다. “구름에 달 가듯이” 나그네 시인은 떠나갔지만 그의 시는 우리의 곁에 영원히 살아 숨쉰다. 그의 삶이 새겨진 연보와 문학의 특징, 친필원고와 서신, 시집, 동시집, 산문집과 시인이 직접 발행한 잡지 <심상>과 <여학생> 등이 전시되어 있다. 또한 목월의 문학 활동에 영향을 준 김동리, 정지용과 함께 청록집을 출간한 조지훈, 박두진 시인의 이야기도 담겨있다.

 2006년 문학관을 개관할 당시 나는 김성춘 시인의 안내를 받으며 이곳을 방문했다. 당시에도 그러했지만 그의 서재를 만나니 다시 울컥했다. 목월의 사진이 걸린 서재에는 책상과 두 개의 앉은뱅이책상, 흔들의자, 장롱이 놓여있다. 원효로의 물품들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했다.

 생전에 미망인 유익순 장로는 “목월은 산문을 쓸 때는 만년필로 썼지만, 시를 쓸 때는 꼭 연필을 가늘게 깎아 썼다고 했다. 당신 또한 시를 쓰는 남편을 위해 수없이 많은 연필을 깎아드렸다고 했다. 서재에 전시된 만년필과 연필을 보는 순간 또다시 원효로 목월의 서재와 사랑방이 떠올랐다.

 

모량리 목월 생가

 목월의 본명은 잘 알다시피 박영종이다. 그는 월성군 건천읍 모량리 571번지에서 태어나 20대의 대부분을 경주에서 보내면서 문학 활동을 했다. 그의 문학작품 속에 경상도, 경주가 속속이 배어 있음은 물론이다. 박목월 시인의 생가는 2014년 6월 시인이 어렸을 때 살았던 모량리 터에 복원되었다. 박목월의 고향 월성(이후 경주시로 개칭), 그곳은 그에게 수많은 향토 언어와 정서와 구수한 삶을 그리게 만든 시의 궁극적 원천이자 나그네의 근원적 슬픔을 깨닫게 하던 곳이요, 해방된 조국에서는 오랫동안 매몰된 문학인으로 남게 만든 고향이기도 하다.

 목월의 생가는 복원되기 전 19991년에 다녀왔으니까 벌써 30년이 다 되어간다. 비단길처럼 펼쳐진 연둣빛 밀밭을 따라가면 집 앞에 ‘목월생가’라는 안내표지판이 보인다. 실제로 이곳은 박목월의 시 「'청노루」, 「윤사월」의 배경이 되었으며, 유년시절의 추억이 깃든 동네이다. 안채와 사랑채, 디딜방앗간, 시 낭송장 등 건물 여섯 동과 박목월 시인의 대표 작품 「나그네」를 연상케 하는 밀밭 등이 조성돼 있다.

 박동규 교수는 “아버지는 나를 낳기 전에 경주에서 떨어진 ‘모량’이라는 곳에서 매일 걸어서 경주로 출근”했다고 에세이집에서 밝히기도 했다.

 

 아버지가 어느 여름 저녁이 되어 경주에서 걸어서 고향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벌판을 걸어 해가 산마루에 걸릴 즈음 논둑길로 들어섰다. 그런데 논둑길은 미끈거리는 젖은 흙으로 발려 있었다. 걷다가 우연히 뒤돌아보니 거기에 발바닥이 그대로 찍혀 있더라는 것이다. 분명히 신발은 신었는데 밑 창이 다 닳아 해져서 발바닥이 찍힌 것이었다.

 아버지는 너무 절망해서 논둑에 앉아서 발바닥 무늬를 보니 발금이 ‘남도 삼백 리’ 그 가느다란 길을 따라 어디든지 가고 싶고, 고개를 들어보니 저편 단석산 기슭 마을은 황혼에 젖어 저녁의 평화로운 연기들이 발갛게 물들고 있어 그런 마을에 살고 싶 고, 그리고 하늘에 떠 있는 달은 이제 겨우 얼굴을 내밀고 구름과 함께 흘러가는데 ‘구름에 달 가듯이’ 어디든지 평화로운 곳으로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가는 나그네’가 되고 싶었다는 것이다.

- 박동규 『사랑하는 나의 가족에게』(모아드림)

 

 그의 대표시 「나그네」를 통해서 우리는 평온하면서도 고요한 박목월의 고향 모량리를 상상해볼 수 있다. 이 작품은 읽으면 그대로 구름에 달 가듯 길을 가는 나그네와 마주하게 된다. 그와 함께 외줄기로 뻗은 남도길과 보리밭, 강 나루터를 떠올릴 수 있다. 인간에게 고향은 본능과 같은 세계이며 영원한 지향점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고향은 누구에게나 돌아가기를 갈망하는 곳, 돌아가고 싶은 곳이다. 가정의 달 5월에는 목월의 시를 만나러 원효로로, 용인으로, 경주로 떠나보자. 한국 현대 시사를 대표하는 우뚝한 서정시인으로서 남다른 언어 감각과 예민한 서정성으로 독보적인 시세계를 확립한 박목월의 시는 21세기 현시점에서도 고유한 우리의 문화유산처럼, 문득문득 우리를 되돌아보게 하는 원초적 힘이 될 것이다.

 

 

* 《쿨투라》 2019년 5월호(통권 5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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