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 100주년 3] 김기영에서 봉준호까지…한국 영화감독 10선
[한국 영화 100주년 3] 김기영에서 봉준호까지…한국 영화감독 10선
  • 전찬일(영화 평론가/한국문화콘텐츠비평협회 회장)
  • 승인 2019.05.0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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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10월 하순 어느 세미나에서 발표했던 한국영화 100, 시대의 변천과 남성 인물의 자화상에서 그랬듯, 이 시작은 가히 한국 영화사의 신화적 출발점이라 할 춘사 나운규(羅雲奎, 19021937)여야 마땅할 터. “한국 영화 역사에서 <아리랑>이나 나운규가 점하고 있는 역사적 위상의의가 워낙 절대적이요, 신화적이기까지 한 탓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러지 않으련다. “그에 관해 아는 게 별로 없을 뿐 아니라, 그의 최대 대표작 <아리랑>(1926)필름과 대본조차도 부재하는 상황에서, 그저 남들이 주관적으로 써 놓은 평가·감상 등을 토대로 내 의견·주장을 피력하고 싶진 않아서. “기껏 가장 그럴 듯하게 다가서는 기록들을 옮길 따름 아니겠는가.” 직접 확인이 불가한 터라, 부득이 비-선택했다.

그것은 <집 없는 천사>(1941), <자유만세>(1946)의 최인규 감독이나, <운명의 손>(1954), <자유부인>(1956)의 한형모, <피아골>(1955)의 이강천 등 다른 명장들에게도 해당된다. 고작 대표작 한두 편을 본 게 다인 마당에, 그들까지 포괄할 자신이 없다면 이해할까. 1960년대 이후 전성기를 누린 감독들부터 시작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50년 가까운 영화 보기 구력에서, 1960년대 후반부터 극장에서건 어떤 미디어를 통해서건, 전작(全作)이든 다수의 영화들을 맛본 감독들로 한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이 선정이 주관적자의적임은 물론이다. 그 어느 누가 뽑는다 해도 일정 수의 감독은 겹치지 않을 도리가 없겠으나 말이다. 번호는 연장자 순이지, 순위가 아니다.

 

1. 김기영(金綺泳; 19221998)

1919년 생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 출생년도는 1922년으로 알려져 있다. 다름 아닌 <하녀>(1960)의 그 거장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특한 소재스타일의 개성파 감독. 그 걸작을 필두로 이후 감독 자신이 리메이크하거나 변형하여 만드는 <화녀>(1971), <충녀>(1972), <화녀 82>(1982), <육식동물>(1984) 등 주로 심리주의표현주의 계열 영화들로 유명하나, 이른바 사실주의 계열 영화로도 발군의 솜씨를 드러낸 바 있다. 장편 극영화 <죽엄의 상자>(1955)를 비롯해 <양산도>(1955), <황혼열차>, <초설>(1958), <10대의 반항>(1959) 등이 그들. 일찌감치 흥행과 비평 두 마리 토끼를 잡는데 성공했다. 그 중 꿈을 상실한 우범 지대 소년들의 눈을 빌어 사회악의 한 단면을 파헤친” <10대의 반항>빼놓을 수 없는 가작”(우리 영화 100, 김종원정중헌, 2001)이라고. 이 거목은 1997년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회고전을 통해 재조명되고, 2010년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초청된 임상수 감독의 리메이크 버전 <하녀>가 선보이면서 더더욱 화제의 중심에 자리해오고 있다.

 

2. 신상옥(申相玉, 본명 신태서; 19252006) 

김기영, 유현목, 김수용, 이만희 등과 함께 19601970년대 한국 영화를 대표했던 인물이다. 감독으로서만이 아니라 할리우드 식 메이저 스튜디오였던 신필름을 설립해, 영화왕국을 꿈꾸었던 거물 제작자이기도. 영화사가 이영일은 신상옥은 영화라는 신화 속에서 살아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상옥 영화예술의 미와 함께 영화사회적인 모순 또는 트리비얼리즘도 함께 사랑하고 능글맞게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시대와, 장르, 국경, 이데올로기를 종횡무진 넘나드는 역동적인 영화 인생을 살았던 신상옥은 주제와 장르, 스타일 면에서 엄청난 양과 폭을 가진 작품 세계를 구축했던 전무후무한 대중영화 작가로 평가된다.”

대표작으로는 <지옥화>,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 <로맨스 빠빠>(1960), <성춘향>,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연산군>(1961), <폭군연산>(1962), <>, <로맨스 그레이>(1963), <빨간 마후라>(1964)등이 있다. 1978년 납북되어 1986년까지는 북한에서 활동했다. 1980신필름을 재건해 <돌아오지 않는 밀사>(1984), <소금>(1985), <탈출기>(1984) 등을 제작·연출했다.

 

3. 유현목(兪賢穆; 19252009)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어머니의 영향으로 기독교인으로 성장했다. 그의 영화 속 기독교 세계관은 유년기 체험의 자연스러운 반영인 셈. 첫 영화 <교차로>(1956)로 이름을 알렸다. <오발탄>(1961)은 최대 대표작이자 한국 영화사 최고 걸작 중 한 편. 이범선의 동명 단편을 극화했다. 한국전쟁 이후 탈출구 없는 현재를 살아가는 가족상을 통해 전쟁의 황폐함비참함을 표현했다. 이후 “<김약국의 딸들>(1963), <잉여인간>(1964), <순교자>(1965), <막차로 온 손님들>(1967), <카인의 후예>(1968) 등 문학작품 원작을 바탕으로 진지한 영화적 탐구를 지속한 작품들을 만들어 주목 받았으며, 실험적 색채가 강한 <춘몽>(1965)음화제조죄명목으로 박정희 정권이 감독에게 직접 제재를 가하기도 했다(한국영상상자료원). “유현목의 영화는 한국영화의 전근대성을 극복하고 영화언어에 대한 자각을 이루는데 기여하였고, 뛰어난 영화적 수사를 곁들어 비판적으로 한국 사회를 고찰한 작가적 시선이 돋보인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그의 영화에서 보여지는 형식적 특징과 영화 언어에 대한 자의식은 그의 영화를 다른 영화와 차별화 짓는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다.”

 

4. 이만희(李晩熙; 1931~1975) 

감독으로서 저력을 입증한 <돌아오지 않는 해병>(1963)에 이어 <흑맥>(1965), <7인의여포로>(1965), <군번 없는 용사>(1966), <만추>(1966), <싸리골의 신화>(1967), <창공에 산다>(1968), <들국화는 피었는데>(1974) 등을 발표하면서 그 존재감을 드러냈다.

지난 1월 스포츠 동아에 보냈던 한국 영화 100주년 설문에서 최고 감독으로 이만희를 선정했는데, 무엇보다 김기영이 영화 모더니즘에서, 유현목신상옥 등이 영화 리얼리즘에서 일가를 이뤘다면 그는 양 사조 모두에서 최고 경지를 일궈내서였다. 리얼리즘적 모더니스트이자 모더니즘적 리얼리스트로서. 영화 장르나 연기 연출 등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국산 영화에 실망했던 관객들, 외국 영화에만 재미를 붙였던 관객들까지도관심을 표했다는 전설적 문제작 <만추>가 그 증거일 터. 44세의 이른 나이에 고인이 된 그가 좀 더 오래 살았더라면, 한국 영화는 그만큼 더 풍성해졌을 듯. 유작 <삼포 가는 길>(1975)이 웅변하듯이. 그의 영화들은 인간 일반을 그토록 사랑했던 이만희의 삶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5. 임권택(林權澤; 1934~ )

임권택은 1962<두만강아 잘 있거라>로 데뷔한 이래 102번째 연출작 <화장>(2015)에 이르기까지 50여 년 간 쉬지 않고 활동해온 현역 감독이다. 흔히 <만다라>(1981)를 계기로 더욱 더 선명해진 작가 의식을 표출한 것으로 평해진다. 선호 여부를 떠나, 이 땅의 영화인 중 그 지속적 생명력에서 그에 견줄 이는 부재한다. “그는 자신이 경험한 질곡의 세월을 재구성하여 영화를 만들고, 이를 통해 지치고 유린당한 이들을 보듬어 줄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자 했다. 그래서 그의 영화는 치유의 영화이자, 한의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의 화면은 여백의 활용과 절제의 미덕을 발휘하여 한국의 아름다운 산천과 고유의 풍속도를 동양화적인 미감으로 탁월하게 보여주고 있어 지친 이들의 마음을 다독여 주기에 충분하다.” <만다라> 이후로 한정해도, <길소뜸>(1985), <티켓>(1986), <장군의 아들>(1990), <서편제>(1993), <>(1997), <취화선>(2002), <천년학>(2006) 등이 말해주듯.

 

6. 이장호(李長鎬; 1945~ )

한국 영화 감독사는 이장호를 기점으로 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별들의 고향>(1974)으로 혜성처럼 등장한 그는, 당시의 영화계 구세대와 신세대를 가르는 분수령이요 산맥이었다. 배창호만이 아니다. 그 이후 영화계에 투신한, 주목할 만한 이 땅의 감독들은 대개가 이장호의 후예들이다. 그의 영화 세계는 70년대와 80년대, 90년대로 구분할 수 있다. 70년대 영화들은 기존의 관습을 뛰어넘는 영화 문법의 창출과 대중적인 흥행 요소로 주목받았다.” 1980년대 리얼리즘 영화의 첫 신호탄 격인 <바람불어 좋은날>(1980)이 시대를 고발한 문제작이었다면, <바보선언>(1983)은 거의 모든 영화적 컨벤션을 파괴하면서 시대에 저항한 문제적 블랙 코미디였다. 1980년대 중후반에는 <무릎과 무릎 사이>(1984), <어우동>(1985), <이장호의 외인구단>(1986)이 연이어 성공하면서 흥행 감독으로 변신한다. 하지만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1987) 같은 예외 이후로 90년대를 관통하며 이장호 그는 소모쇠락조로의 길을 걷는다. 지금도 여전히 현역 영화청년으로 현장을 고수하곤 있긴 해도.

 

7. 이창동(李滄東; 1954~ )

앞서 한국 영화사 최고 감독으로 나는 이만희를 꼽았다. 누군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별 다른 주저 없이 이창동이라고 말해온 지 여러 해다. 데뷔작 <초록 물고기>(1997)부터 최근작 <버닝>(2018)에 이르기까지 6편의 필모그래피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 영화들에 속한다. 평소 안배를 중시하는 내가 가장 덜 마음에 드는 <밀양>(2007)마저도 한국 영화 100선에 포함시켰다면, 내 애정을 상상할 수 있을 듯. 오죽하면 <버닝>을 한국 영화 역대 베스트 3위에 위치시켰을까. 안배만 아니라면 <>10편 안에 진입시키고 싶은 심정이다. 그렇다면 왜 이다지도 나는 이창동에 열광하는 것일까.

이창동은 영화를 찍고 싶어서라기보다는 소설을 쓰면서 느끼던 회의감에서 탈출하고 싶어서 영화 현장에 들어갔다.”. 박찬욱처럼 영화 예술미학적으로 세련돼서는 아니다. 장준환처럼 영화적 상상력이 출중해서도 아니다. 그보다는 등장인물들을 통해 드러내는 세상삶을 향한 염치가 아름다워서다. 인간에 대한 사려 깊은 예의배려가 감동스러워서다. ‘포스트-이창동을 기대한다면 과욕일까.

 

8. 강제규(姜帝圭; 1962~ )

강우석도 아니고, 강제규라는 이름에 놀랄 수도 있겠다, 싶다. 사실 강우석이어도 상관없다. 두 강은 한국 영화 산업의 초석을 까는데 결정적 공을 세운 두 주역이니까. 강우석은 <실미도>(2003)로 한국 천만 영화의 포문을 열었다. 강제규는 <태극기 휘날리며>(2004)로 그 뒤를 이었다. 하지만 <실미도> 이전에 이 영화가 있었기에 그 역사적 기록도 가능했을 터. 바로 강제규의 <쉬리>(1999). 소위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효시 격으로 평가되는 문제작. 600만에 가까운 관객을 불러 모은 영화는 한국에서도 할리우드 스타일 부럽지 않은 규모수준의 영화를 빚어낼 수 있다는 자신감 및 자부심(?)을 선사했으며, 당시만 해도 좀처럼 영화를 보지 않았던 중장년층에게도 영화를 가까이 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태극기 휘날리며에서는 역사적 상황과 분단의 아픔이 투영되면서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전형을 창출했다. 데뷔작 <은행나무침대>(1996)는 어땠는가. 천년의 시공간을 잇는, 정소동 감독 장국영, 왕조현 주연의 <천녀유혼>(1987) 유의 사랑 이야기로,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가능성을 암시하지 않았는가.

 

9. 박찬욱(朴贊郁; 1963~ )

박찬욱 감독에게나 한국 영화에만 그건 게 아니다. 21세기 아시아 영화는, 2004년 칸 영화제 심사위원 대상을 거머쥔 <올드 보이>(2004) 그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박찬욱은 어린 시절부터 미술과 친숙한 환경에 영향을 받아, 미술뿐 아니라 문학 등 인문학에도 꾸준히 관심을 가졌다. 대학 전공으로 철학을 선택한 것도 우연은 아니었던 셈. “대학시절 사진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영화에 관심을 가졌고, 이후 박찬욱은 영화계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영화광이 되었다. 영화에 대한 박찬욱의 해박한 지식은 박찬욱 영화의 출발점이 되었다.” 그의 영화세계가 적잖이 난해하게 다가선다면, 감독의 영화광적인 정체성, 달리 말하면 풍요로운 상호텍스트성 때문일 확률이 높다. 감독의 지적 수준이 다소 부담스럽다고 할까. 이런 배경을 모른다면, 데뷔작 <달은...해가 꾸는 꿈>(1992)부터 최근작 <아가씨>(2006)에 이르까지 전작(全作)을 관통하는, 크고 작은 B급 정서를 도무지 이해할 길이 없을 터. ‘B급 취향이야말로 박찬욱 영화세계에 다가가기 위한 열쇠인 것. ‘박찬욱 월드의 최고봉인 <복수는 나의 것>(2002)만이 아니다. 출세작 <공동경비구역 JSA>(2000) 등도 마찬가지다.

 

10. 봉준호(奉俊昊; 1969~ )

박찬욱이 B급 정서를 A급 솜씨로 빚어낸다면, 봉준호는 A급 문제의식을 A급 수준으로 만들어내는 명장이다. 두 감독이 으레 대구(對句)로 함께 거론되는 으뜸 이유다. 월북 작가라는 사실로 인해 한때 금기시됐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천변풍경의 소설가 구보 박태원의 외손자라는 운명이나,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했다는 사실들도 그 이유들이다.

데뷔작 <플란다스의 개>(2000)는 흥행에는 실패를 맛보았지만, 평단의 호평을 끌어내는데 성공했다. <살인의 추억>으로는 더 큰 비평적 찬사를 끌어냈을 뿐 아니라, 570만 여명으로 2003년 한국 영화 흥행 1위의 대박을 터트린다. 한국형 스릴러 영화의 가능성을 입증하면서. 영화는 최근 스포츠 동아 역대 한국 영화 정상의 영예를 거머쥐기까지 했다. 봉준호는 그 이후, <괴물>(2006), <마더>(2009), <설국열차>(2013), <옥자>(2017), 그리고 2019 칸 경쟁 부문에 진출하고 5월 말 개봉 예정인 <기생충>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는 것으로 비친). 그나저나 포스트-박찬욱도 그렇고, ‘포스트-봉준호는 과연 언제 나타날까. 잠재태로서 그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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