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형욱 작가의 와인 인문학] 부르고뉴의 작은 마을들
[고형욱 작가의 와인 인문학] 부르고뉴의 작은 마을들
  • 고형욱(작가, 와인평론가)
  • 승인 2019.05.01 03: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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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프랑스 영화를 보다가 캄캄한 극장에서 소리를 죽이고 혼자 한참을 웃은 적이 있다. 주인공은 뉘 생 조르주(Nuits Saint Georges)라는 와인 얘기를 하는데, 자막은 성 조르주의 밤(‘nuit’는 밤이라는 뜻이다.)이라고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번역자가 와인을 모르기 때문에 벌어진 실수였을 것이다. 그 정도로 부르고뉴 와인이 낯설다는 반증이 아닐까 싶다.

세상에는 부르고뉴 와인 찬미자들이 많다. 그들 중 많은 이들이 부르고뉴 이외의 다른 와인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순수함의 극치다. 이는 피노 누아 한 품종으로만 만드는 단순함에서 나온다. 1395년 용담공 필립이 자기 영지에서는 피노 누아로만 레드 와인을 만들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순수성에 대한 전통이 시작되었다. 조선 건국 3년 후인 시점부터 600년 넘도록 와인 생산자들은 이 지시를 이행하고 있다. 이렇게 전통은 이어진다. 품종은 한 가지지만 마을마다, 구역마다, 밭마다 미묘하게 다른 맛과 특징을 지닌다. 바둑판보다 복잡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부르고뉴 와인을 알아가는 과정은 무척이나 험난하다. 웬만한 와인 숍에 가도 부르고뉴 와인은 찾기가 어렵다. 겨우 찾으면 가격이 다른 와인에 비해 엄청나게 비싼 편이다. 라벨을 봐도 공부를 하지 않으면 무슨 의미인지 알기 힘들다.

공작 궁전이 있는 부르고뉴의 주도 디종(Dijon)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국도는 위대한 와인들의 길’(Route des Grands Crus)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이 도로를 타고 남하하다 보면 주브레 샹베르탱(Gevrey Chambertin), 모레 생 드니(Morey Saint Denis), 샹볼 뮈지니(Chambolle Musigny), 부조(Vougeot), 본 로마네(Vosne Romanee), 뉘 생 조르주 표지판들이 보인다. 여기까지가 부르고뉴의 북쪽이자 레드 와인 생산지로 유명한 코트 드 뉘(Cote de Nuits)이다. (뉘 생 조르주의 첫 머리를 따서 뉘의 언덕이라는 의미 정도로 받아들이면 된다. 경사가 있는 언덕 지대에서 훌륭한 와인들이 생산되기 때문이다.) 이 이름들이 부르고뉴 레드 와인을 대표하는 작은 마을들의 지명이자 와인 이름이다.

 

라벨에 마을 이름 없이 부르고뉴라는 지명만 적혀 있으면 가장 낮은 등급인 지방 명칭 와인이다. 대부분은 부르고뉴 전역에서 재배한 피노 누아를 섞어서 만든다. 위에 기술한 마을 이름이 적혀 있으면 그 윗 등급인 빌라주 와인’, 그보다 뛰어난 1등급 밭은 프르미에 크뤼 와인’, 특급 밭은 그랑 크뤼 와인으로 등급이 나누어진다. 이 정도 등급으로만 구분한다면 과히 어려워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그 다음에 발생한다. 어떤 밭은 각각 자신만의 고유 이름이 붙어 있기도 하고, 하나의 밭을 여러 명의 생산자가 공동으로 소유하고 있어서 같은 와인 같은 데도 이름은 달라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그랑 크뤼 밭인 클로 드 부조(Clos de Vougeot)는 소유자만 80명이 넘는다. 라벨에는 밭 이름 클로 드 부조가 공통적으로 표기되어 있지만 그 아래에 각각 다른 생산자 이름이 들어간다. 돌담으로 둘러친 밭 하나에서 서로 다른 소유주들이 밭을 구획 별로 소유하면서 자기 스타일의 와인을 만든다. 이랑 하나 차이에도 맛이 차이가 생겨난다. 도멘 르루아(Leroy), 메오 카뮈제(Meo Camuzet), 안 그로(Anne Gros), 자크 프리외르(Jacques Prieur) 등등 부르고뉴를 대표하는 와인 메이커들 경쟁하듯이 클로 드 부조를 만든다. 80여 가지의 클로 드 부조가 각각 미묘하게 다른 질감과 색채를 갖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와인 애호가들은 행복한 혼란에 빠지는 것이다.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을 수상한 <바베트의 만찬>에는 클로 드 부조를 홀짝거리면서 행복한 미소를 짓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클로 드 부조 한 가지라도 다 마셔볼 수 있을까...... , 쉽지 않은 길이다.

그러나 이런 어려움을 이겨내고 맛을 보는 부르고뉴 와인은 그간의 험난한 과정을 충분히 잊게 만들어준다. 비단 같은 부드러움, 입안에 착 감기는 감촉, 길게 이어지는 여운, 와인 한 잔으로 세상의 모든 고민이 쓸려나가는 기분이다.

 

 

* 《쿨투라》 2019년 5월호(통권 5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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