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월평] 미래의 ‘나’가 오늘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
[드라마 월평] 미래의 ‘나’가 오늘의 ‘나’에게 보내는 편지
  • 김민정(드라마평론가, 본지 편집위원)
  • 승인 2019.04.30 14:0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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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소화불량에 시달렸다.

식욕도 별로 없었지만 그나마 먹은 것들도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어딘가 얹혀 버렸다. 가슴이 답답했다. 누군가 내 위에 앉아 무겁게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그랬다. 한지민과 남주혁의 청춘 로맨스인 줄 알고 무심코 드라마를 보기 시작했던 나 자신이 원망스러울 지경이었다. 하룻밤 자고 일어났더니 25(한지민)에서 70대 백발의 할머니(김혜자)가 되어버린 이야기라니. ‘눈이 부시게라는 드라마 타이틀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가뜩이나 요즘 눈도 침침한데 이런 우울한 이야기라니. 도대체 왜.

매주 드라마가 끝나고 나면 인터넷이 야단법석이었다. 인생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드라마라나 뭐라나. 해가 바뀐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2019년 최고의 웰메이드 드라마라는 훈장이 따라다녔다. 도대체 어떻게.

사실, 문제는 극의 완성도가 아니었다. 대중성도 아니었다.

그건 모두 부차적인 것이었다. 나의 고민은 이 드라마를 끝까지 볼 수 있느냐였다. 과연 내가 12부작까지 버텨낼 수 있는지. 두 눈을 질끈 감은 것처럼 답답한 나의 속은 종영 날까지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을 것인지. 솔직히 고백하자면, 한지민의 오빠로 나온 손호준(김영수 역)이 아니었다면 나는 드라마를 끝까지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는 진정 신의 한 수였다.

 

배우 손호준의 존재감을 그렇게 강렬하게 느낀 건 처음이었다. 아니, 주인공이 아닌 등장 인물에게 이렇게 정서적으로 의존한 것 자체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가 화면에 나올 때 비로소 나는 잠시 숨을 쉴 수 있었다.

<응답하라 1994>(2013)에서 전라도 사투리를 맛깔나게 구사하며 혜성처럼 등장한 배우 손호준. <눈이 부시게>에서 그는 잉여인간캐릭터에 특화된 연기력을 선보이며 큰 활약을 펼친다. 약간 모자라지만 허세 넘치는, 왠지 모르게 정감 가는, 그런 옆집 오빠랄까. 다들 배우 김혜자의 연기력에 감탄하였지만 나는 연기 경력 56국민 엄마의 정서적 대항마로, 비극과 희극 사이에서 완벽한 균형 감각을 선보인 손호준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고 싶다. 김혜자를 보며 눈물 콧물 다 흘리다가 실신 직전까지 간 시청자들을, 그러니까 나를 살려준 것이 바로 손호준이었다.

극중 백수인 그는 헌혈하고 받은 공짜 영화표를 정육점에서 소량의 삼겹살이랑 바꿔 몰래 방에서 구워 먹다가 질식해서 구급차에 실려 간다. 그런 그를 두고 동네에서는 번개탄을 피우고 자살 시도했다가 좀 덜떨어지게 되었다는 소문이 돈다. 물론 그는 그런 일로 절대 주눅 들 사람이 아니다. 여동생과 친구들이 바다에 간다는 걸 알게 된 그는 렌터카 트렁크에 몰래 숨어 즐거운 여행을 꿈꾼다. 하지만 여행은 취소되고 반납된 렌터카에 실려 중고차들과 함께 중동으로 보내진다. 이뿐만이 아니다. 하룻밤 사이에 늙어버린 몸 때문에 상처 입은 여동생의 마음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자신의 개인방송에서 더 많은 별풍선을 받기 위해 동생에게 동반 출연을 권하기까지 한다.

극의 중심 서사와는 별개로 진행되는 잉여인간김영수의 에피소드들은 지금 여기 청년세대의 절망적인 삶과 많은 부분 겹쳐진다. 그런데 전혀 슬프지 않다. 오히려 그의 등장만으로도 미소가 지어질 정도로 희극적으로 그려진다. 하룻밤 사이에 사라져버린 여동생의 청춘 앞에서 그는 다른 사람들처럼 당황하거나 불편해하지 않는다. 과거와 미래, 꿈과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그들과 달리, 그는 등장인물 중에서 유일하게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이다. 지나간 것에 미련 두지 않고 잃어버린 것에 집착하지 않는다. 그는 그렇게 하루하루 살아간다. 즐겁고 충실하게.

 

극중 남녀 주인공인 한지민과 남주혁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북극에 가길 꿈꾼다. 오로라를 보기 위해서다. 오로라는 지구 밖에 있는 자기장인데 어쩌다 보니 북극으로 흘러들어온, 즉 조물주가 의도한 대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 어쩌다 보니 만들어진 에라. 버그이자 작동오류인 오로라를 두고 그 둘은 이야기한다. “그 에라가 에라인데도 에라도 아름다울 수 있어. 눈물 나게.”

너무 사랑스러울 것 같은 그 에라를 두 사람은 결국 보러 가지 못한다. 하지만 그 오로라는 저 멀리 북극이 아니라 그들 곁에 있었다는 게 나의 생각이다. 잉여인간 김영수.

그는 오로지 그로서 존재한다. 그가 백수인 것은 직업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를 정의 내릴 그 무엇도 그에게는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그는 김영수이며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세상의 모든 것에서 벗어나 있는 동시에 그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 무엇보다 그의 외모가 쓸데없이지나치게 아름답다는 점에서 그는 확실히 오로라. 오똑한 콧날과 날렵한 턱선, 그리고 부리부리한 눈매.

문제는 그 오로라를 아주 가끔 볼 수 있다는 점이다. 오로라가 나타나는 지역에서는 일 년 내내 볼 수 있다지만 <눈이 부시게>에서 김영수의 비중이 그리 높지 않은 것처럼 우리가 사는 이곳에서 오로라를 직접 보는 건 하늘에 별 따기처럼 어렵다. 인터넷에 오로라 사진을 검색하면 또 모를까.

 

그래서였을 것이다. 하룻밤 사이에 몸이 늙어버린 여자와 마음이 늙어버린 남자, 한지민과 남주혁은 서로에게 위로의 말을 건넨다. 오로라를 보고 싶었으나 보지 못한 그들에게 남은 건 그들 자신뿐이다. “난 내가 애틋해. 너도 니가, 니 인생이 애틋했으면 좋겠다.”

부모에게 버림받고 키워준 할머니의 자살로 혼자 남은 남자는 세상을 바꾸는 기자를 꿈꿨지만 현실은 노인들을 상대로 건강상품과 보험을 파는 사기꾼 신세다. 인생이 꼬일 대로 꼬여버린 남자는 여자의 위로를 듣고 참았던 눈물을 터트린다. 한편 늙어버린 몸 때문에 선뜻 남자에게 다가가지 못하는 여자는 청춘의 상실 못지않게 그가 자신을 잊었을까 봐 속상하고 슬프다. 그런 여자에게 남자는 따뜻한 말을 건넨다. “나도 못 끌어안은 나를 끌어안고 울어준 사람이 처음이었어요

두 사람의 애틋한대화가 브라운관 밖에서 울고 있는 누군가, 그러니까 에게 건네는 것이라고 착각한 사람이 나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로라를 보지 못한 사람, 아니 오로라가 되지 못한 사람이 나 말고도 훨씬 많을 테니까. 그리하여 우리 앞에 두둥, 하고 불현듯 나타난 것이 아닌가 싶다. 오로라가 되지 못한 사람들을 위해.

 

<눈이 부시게>는 갑자기 늙어버린 스물다섯 살 한지민의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녀는 알츠하이머를 앓고 있는 70대 김혜자의 상상 속 인물이다. 드라마 초반부의 이야기는 모두 그녀가 그리워하고 꿈꾸는 그 무언가에 대한 허구적 재현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한지민과 김혜자가 동일한 배역을 맡은 동일 인물이고 극중 두 사람의 이름이 모두 김혜자라는 점이다. 늙은 김혜자가 젊은 한지민을, 그러니까 늙은 내가 젊은 나를 끌어안은 모양새랄까.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뭘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하룻밤 자고 일어났더니 백 살이 된 기분, 마음이 늙어버린 젊은 나에게, 늙은 나는 조용히 다독인다.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늙어버린 것도 아니고, 무슨 걱정이에요?”

드라마에 나온 주옥같은 대사들은 미래의 가 오늘의 에게 보내는 편지라고 해도 무방하다.

내 삶은 때론 불행했고 때론 행복했습니다. 삶이 한낱 꿈에 불과하다지만 그럼에도 살아서 좋았습니다. 새벽에 쨍한 차가운 공기, 꽃이 피기 전 부는 달큼한 바람, 해질 무렵 우러나는 노을의 냄새, 어느 하루 눈부시지 않은 날이 없었습니다. 지금 삶이 힘든 당신,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당신은 모든 걸 매일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대단하지 않은 하루가 지나고 또 별거 아닌 하루가 온다 해도 인생은 살 가치가 있습니다. 후회만 가득한 과거와 불안하기만 한 미래 때문에 지금을 망치지 마세요. 오늘을 살아가세요. 눈이 부시게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습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배우 김혜자의 내레이션을 들으며 눈시울이 붉어지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자기연민이 몸에 제일 해롭다고 얘기들 하지만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으면 누가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오로라는 멀리 있는 게 아니다. 내 안에 있다. 내가 바로 오로라다.

, 나는 눈이 침침한 게 아니라 눈이 부신 거였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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