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연식 감독 인터뷰] 유기체로서의 캐릭터와 합치되는 엑스터시의 순간을 위하여
[신연식 감독 인터뷰] 유기체로서의 캐릭터와 합치되는 엑스터시의 순간을 위하여
  • 윤성은(영화 평론가, 본지 편집위원)
  • 승인 2019.06.03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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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연식 감독을 처음 만난 건 2012년 부산국제영화제에서였다. 그는 <러시안 소설>로 배우들과 함께 부산을 찾았고, 나는 해운대 바닷가에서 있었던 GV 진행을 맡아 인사를 나눴다. 이미 <페어 러브><러시안 소설>에 매료되어 있었던 터라 푸른 파도와 하얀 백사장을 배경으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눴던 그 시간이 내게는 아주 특별하게 각인되어 있다. 이후, 이런 저런 행사들에서 신연식 감독을 만날 때마다 나는 안부보다 신작 소식을 먼저 물었던 것 같다. 그만큼 그의 작품은 늘 새롭고 매력적이다. <안나>의 연재를 마무리 하며, 구기동에 있는 사무실로 신연식 감독을 찾아갔다. 봄을 머금은 동네와 사무실의 커다란 목재 책상들이 마음에 쏙 들었다.

윤성은(이하 ’): 먼저, 쿨투라에 감독님의 <안나> 시나리오를 연재할 수 있어서 기뻤습니다. 저를 비롯한 편집위원들도 재미있게 읽었구요, 손정순 대표님은 감독님의 다른 작품들과 완전히 달라서 놀랐다고 하시던데요.

신연식(이하 ’): 어렸을 때 쓴 작품이라서 그럴 거예요. 10년도 더 전에, 스물여덟? 스물아홉? 그 쯤 쓴 것 같은데요.

: 그럼, 그 전부터 시나리오를 쓰셨던 거죠? 혹시 지금까지 몇 편정도 쓰셨는지 아시나요?

: 세어 보진 않았는데, 개봉용 영화 말고 각종 영상물 대본이나 단편 영화까지 합치면 100편은 될걸요?

: ! 하긴 요즘에도 거의 한 달에 한 편씩 써내시니까.

: 많이 쓸 땐 1년에 10, 적게 쓸 때도 너 댓 편정도 쓰는 것 같아요.

: 언제부터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하셨나요?

: 1 때부터요. 제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쓴 시나리오가 개봉을 했어요. <프랑스 영화처럼>에서 <맥주 파는 아가씨>라는 단편이었는데, 그래서 시나리오 형태가 좀 이상해요. 실내극 형태에 가깝죠. 시나리오라는 걸 본 적 없이 쓴 거니까요. 태어나서 두 번째로 쓴 시나리오가 같은 영화에서 <프랑스 영화처럼>이라는 단편이었구요. 영화라는 매체나 플롯에 대한 이해가 없을 때 쓴 글들이라 꽤 문학적이죠. 고등학교 때 단편으로 찍으려고 했는데 못 찍었어요. 하지만 그 대본을 배우들 연기 수업 할 때 교재로 쭉 써왔어요. 그래서 저한테 배운 학생들은 그 작품들을 다 알죠. 개봉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개인적으로 좀 복잡한 감정이 들었죠. 쑥스럽기도 하고요. 어릴 때 일기 같은 거였으니까.

: 처음에 어떻게 시나리오를 쓰게 되셨나요?

: 원래 영화라는 매체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고, 그 전에는 소설을 쓰고 있었어요. 제가 처음으로 읽은 소설이 서머셋 모옴의 달과 6펜스였는데, 신선한 충격을 받았어요. 서머셋 모옴이라는 작가는 영국인이지만 프랑스어를 먼저 배운 사람이라 영어가 문법적으로 정확하고 체계를 잘 활용하는 작가거든요. 그 사람 문장에 재미를 느끼면서 러시아 소설도 많이 읽게 됐고, 그렇게 소설을 쓰게 됐어요.

그런데 고1 때 몸이 아파서 학교를 못 가고 있을 때, TV 명화극장에서 해주는 영화들을 보다가 영화의 표현 영역이 무궁무진하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랐던 것 같아요. 생각해 보면 그 당시 명화극장 라인업들이 참 화려했어요. 70-80년대 걸작선들을 다 해줬거든요. <비정성시>, <아빠는 출장중>, <대부>, <애니홀> 같은 것들요. 그런 영화들을 보면서 쓴 시나리오가 <맥주 파는 아가씨>, <프랑스 영화처럼>이었어요.

그런데 그 때 제가 생각을 못했던 게 소설은 다 쓰면 완결이지만, 시나리오는 찍어야 한다는 거였죠. 그래서 시나리오를 들고 충무로에 있는 아무 프로덕션이나 들어가서 이 시나리오 얼마면 찍을 수 있냐고, 견적을 떼 달라고, 정말 그렇게 말한 적이 있어요.

: (웃음) 그런 걸 해주는 데가 있어요?

: 얼마나 어이가 없었겠어요, 그 분들이. 어렸을 때니까 정말 무모하고 당돌하고, 고백컨대 무지 건방졌죠. 하지만 지금도 스무 살 때 교만하지 않는 건 인생의 낭비라고 생각해요. 어린 나이에는 건방을 떨어서 얻는 것도 있구요. 어른 입장에서는 어처구니없으면서도 귀엽기도 하잖아요. 그 땐 맨날 술 마시고 아버지한테 학교 그만두고 영화 찍는다고 하고 그랬죠. 그렇게 간신히 고등학교를 졸업했어요.

: (웃음) 아버지가 아니라 감독님이 술을 마셨다구요? 아니, 부모님들이 그런 걸 받아주시는 분위기였나요?

: 그렇기도 했는데, 안 받아주면 아마 뒤도 안 돌아보고 가출했을 거예요. 저희 아버지는 법대를 나오셨지만 농사를 짓고 싶어 하는 분이었어요. 돌출 행동 같은 건 별로 좋아하시질 않았는데, 제가 단편영화 찍는다고 견적 받아 와서 식사하시는 아버지한테 300만원을 달라고 했더니 너무 충격을 받으셔서 수저를 막 떠시더라구요. 네가 딴따라가 되려 하다니, 하시면서. 저는 그냥 순진하게 우리 아버지 사업이 잘 되고 있으니까 재력이 그 정도는 될 거라고 판단하고 말씀드린 거였는데 말이죠. 아버지 돌아가신 다음에 들은 이야긴데 그 때 아버지가 주변 분들에게 얘한테 돈을 줘야 하느냐 마느냐 물어보고 그러셨대요. 판단이 잘 안 서셨던 거죠.

 

결핍을 알아주는 바로 그 사랑, <안나>

: 본격적으로 <안나> 얘기를 해보겠습니다. 오래 전이지만, 이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할 때 기획이랄까요, 가졌던 생각들 기억나시나요?

: 제가 스물아홉 때 그렸던 중년의 판타지였던 것 같아요. 좀 부끄럽기는 하지만 이안 감독이 <, >를 만들었던 이유와 제가 <안나>를 썼던 이유가 똑같더라구요. 모든 것을 이루고, 모든 것이 안정적인 듯 보이는 중년의 남자가 갖게 되는 균열과 흔들림을 써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이안 감독님은 정말 그 나이 때 영화를 만드신 거고, 저는 20년 후를 그린 거라는 차이가 있죠. 지금 생각해 보면 저는 어렸기 때문에 약간의 판타지를 갖고 중년의 남자에 대해 썼던 것 같아요.

<안나>에 영감을 준 실제 인물이 있는데요, 루이스 칸이라는 건축과 교수는 성공했지만 아티스트로 인정받지는 못하다가 엔팅이라는 제자와 사랑에 빠진 후에 세계 건축사에 한 획을 그은 사람이 됐거든요. 물론, 이건 업계의 신화적인 윤색이 있는 얘기죠.

: 건축과 대학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이야기라서 <건축학 개론>29금판 같기도 해요. 중년 멜로고, 어릴 때부터 봐왔던 지도교수의 딸과 사랑하게 되는 이야기니까. 안나와 수진은 강교수라는 한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었으나 실패했다는 공통점이 있는데요, 현실에서도 정말로 그런 공통점이 두 사람의 교감, 유대감을 넘어서 로맨스를 만들어줄 수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 그렇죠. 그런 영화들이 있었던 것 같아요. 캐릭터들이 전우애를 느끼게 되는. 하지만 제가 생각했던 이들의 심리적 동선은 그것과는 달랐어요. 최수진 교수도 아내가 있고, 안나에게도 약혼자가 있죠. 하지만 이들이 갖고 있는 내면 가장 깊은 곳의 결핍은 이들과 함께 하는 사람들도 잘 몰라요. 이들은 어렸을 때 보기는 했지만 사실 아무 관계가 없었고 이 시점에서 새로 만난 거예요. 오랜 시간동안 고난을 통해 생긴 전우애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결핍을 정확히 아는 상대를 비로소 찾은 거죠. 그래서 이 두 사람의 관계는 서로의 결핍을 증명해 주는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 그렇다면, 이 영화의 판타지는 중년 남성이 여전히 멋있고, 뭇 여성들에게 인기가 많고, 어린 여자와 사랑을 나누는데 있는 게 아니라 중년이 되어서도 찾아올 수 있는 진지한 사랑, 무엇보다 자신의 결핍을 정확히 알고 있는 그 한 사람을 만나는데 있는 거겠군요.

: 맞아요. 단 한 마디도 안했지만 결핍을 알아주는 대상이죠. 현실에서는 그 결핍을 채울 수 없다는 걸 알기 때문에 서로에 대한 판타지로 흐를 수밖에 없는 거구요. 사실 첫 섹스를 하는 순간 이 사람들은 이것이 일시적이라는 걸 말은 안하지만 알아요. 상당히 처절한 멜로예요.

: 새삼스럽지만, 감독님의 시나리오에는 정말 재미있는 대사가 많아요. 한 부분만 꼽기는 어려운데요, 기존의 가치관을 뒤집는 대사 중에서 이런 게 있었어요.

 

안나 : 아빠는 나한테 그냥 돈 벌어다 주는 사람이에요. 그게 편해요. 서로. 아빠가 그 이상 뭘 하려니까 불편해 지는 거예요.

최수진 : (목소리) 그래도 되냐?

안나 : 뭐가요?

최수진 : 그냥 돈 벌어오는 사람이 되도 되냐고? 난 우리 딸이 그렇게 생각해 줬으면 좋겠어. 그 이상 하는 건 너무 버거워.

 

보통의 아빠들은 자신을 돈만 벌어다 주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걸 싫어하기 때문에, 아 이런 가장도 있을 수 있겠구나 신선하게 다가왔거든요. 이런 대사들에는 평소 자주 하는 말이나 생각이 반영되어 있는 건가요, 책이나 주변에서 들은 말을 인용하시는 건가요?

: 대사는 크게 세 가지인 것 같아요. 미리 메모해놨다가 쓰는 대사도 있고, 평소에 제가 잘 쓰는 이야기가 나올 때도 있어요. 그게 한 20% 정도씩 되구요, 60% 정도는 시나리오 쓰면서 나와요. 영화 가르치는 학교에서는 트리트먼트나 시놉시스를 꼼꼼히 쓰도록 가르치는데, 저는 안 쓰거든요.

: 아니, 트리트먼트를 전혀 안 쓰세요?

: 어릴 때는 열심히 썼는데, 안 쓴지 지금 십 수 년이 되었어요. 저는 하나의 작품은 유기체라는 예술관을 갖고 있어요. 예를 들어, 어떤 시나리오에 단점과 장점이 있잖아요. 그런데 단점을 없애면 장점도 사라져요.

: . 정말 멋진 말이예요!

: 동전의 양면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얘기예요. 작품에서 인물과 타자, 사건이 맺고 있는 메커니즘은 살아 움직인다는 말이구요. 그런데 저는 신이 아니기 때문에 이야기 속 캐릭터가 움직일 수 있는 동선과 구획에 대해 다 예측할 수 없거든요. 제가 글을 쓸 때 가장 재밌어하고 좋아하는 순간, 약을 빠는것 같은, 엑스터시의 순간에 들어갈 때는 이 살아있는 사람들과 내가 일치된 교감을 느껴서 그들이 알아서 움직일 때예요. 이런 얘기하면 안티가 생길 수 있겠지만, 제가 시나리오를 빨리 쓰는 이유는 저도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서예요.

아까 언급하신 그 대사는 옛날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아마도 시나리오를 쓰는 순간에 나왔던 것 같아요.

: 지금 말씀하신 부분은 러시아 소설가, 비평가들이 이야기했던 이론과 맞닿아 있어요. 바흐친 같은 사람이 그랬죠. 인물이 스스로 살아 움직이게 만들어야 한다고.

자연스럽게 우리의 주인공 안나에 대해 얘기해볼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참 매력적인 캐릭터예요. 처음에 등장할 때는 쉬크하고 당돌하고 친해지기 어려울 것 같은 이미지지만, 수진과 교감하게 되면서 아까 말씀하신 결핍, 아버지에게서 받은 상처 때문에 힘들어하는 부분도 보이죠. 저는 아, 남성들은 이렇게 겉보기와는 다른 면을 갖고 있으면서도 속을 다 알 수는 없는, 신비로운 여성에게 끌리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제목까지 안나인 걸 보면 감독님의 판타지와 연결되어 있는 캐릭터인가요? 아니면 주변에 모델이 있었나요?

: 외모나 성적인 부분이 아니라 결핍을 알아봐주는 인물이라는 부분에서 판타지가 가미된 인물이죠. 남성들이 좋아할 만한 캐릭터이기는 해요. 신비감이 있으니까. 주변에 특정 모델이 있었던 건 아니구요. 굳이 찾아보자면, 제가 교회에서 교사를 오래했던 게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요. 중학교 2학년 여자애들은요, 지구인이 아니예요.

: 인기 많으셨을 것 같아요.

: 많았죠. 기본 한 스무 명씩 기다리고 있었죠. (웃음) 저를 이성으로 바라보고 좋아했다기 보다는 재밌어서. 암튼 여중생들은 무엇으로도 해석이 안 되는 정말 희한하고 신비로운 존재들이예요. 8년 동안 연구해도 답이 안 나오더라구요. 그런데 그런 애들이 나이 먹고 세상에 나오면 다들 너무 평범해져요. 사실 고등학생만 되도 반은 지구인이 되거든요. 그래서 여중생들의 묘한 생동감을 이처럼 빠른 시간 안에 다 사라지게 만드는 대한민국 입시 제도와 교육 시스템에 너무 화가 나죠.

: 정말 안타깝네요. 저도 외계인이었던 시간들이 있었는지 생각해 봐야겠어요.

영화의 결말도 흥미로웠습니다. 이윤기 감독의 <남과 여>라는 영화와 비교가 됐는데, <남과 여>에서 여자는 사랑을 확신한 순간 가정을 버리지만 남자는 아내와 딸을 떠나지 못하거든요. 현실에서는 솔직히 <남과 여> 같은 케이스를 많이 봐요. 그런데 <안나>의 최수진 교수는 미련이 남아 있는 듯 보이고, 좀 더 있어달라고 하는데 안나는 딱 끊고 약혼자에게 돌아가잖아요. 이런 결말을 선택하신 이유가 궁금합니다.

: 정말 다른 형태의 판타지를 하고 싶었어요. 너무 현실적이어서 너무 판타지적인 이야기. 마지막에 안나는 제가 이렇게 말하면, 믿으시겠어요?” 라고 거듭 물어보는데, 정말 거짓말 같고, 말 같지도 않은 얘기거든요. 그런데 진짜 사실인 거예요. 너무 사실이어서 판타지인거죠. 안나는 아빠 제자라는 최수진을 어릴 때부터 봐왔는데, 그냥 이 남자를 알겠는 거야. 근데 그걸 표현할 줄도 모르고 커버린 거죠. 그러다가 한국에 와서 이 여자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현실을 살아본 거예요. 되게 당돌하고 희한한 여자인 것 같지만 돌아가면 안나도 가정 못 깨고, 지극히 평범한 재미 교포 가정 주부로 살 인물이예요. 본인도 그걸 알고 있구요. 누가 보면 뭐야, 결말이 왜 이렇게 무성의해 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저는 <안나>에서 어설픈 판타지 보다는 지극히 현실적인 엔딩을 만들고 싶었어요. 결핍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들의 심리를 이해할 수 없을 지도 몰라요.

: 시쳇말로 남이 하면 스캔들, 내가 하면 로맨스. <안나>는 그 양면을 잘 보여준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좋은 배우>를 제외한 감독님의 전작을 보았는데요, 감독님 작품에서는 시대가 느껴지지 않아요. 이야기가 늙지 않는 것 같아요. <안나>만 봐도 십 수 년 전에 쓴 작품이라는 게 믿기지 않거든요. 게다가 <프랑스 영화처럼>을 고등학교 때 쓰셨다니, 요즘 썸만 추구하는 연애를 썸만추라고 하는데, 많이 앞서갔다는 생각도 듭니다.

: 사실 그 작품은 소위 요즘 연애를 예견하면서 썼던 것은 아니구요, <프랑스 영화처럼>이 중요한 이유는 그 때 제 예술관이 정립되었거든요. 아마 <로마서>를 기점으로 달라질 텐데, <로마서> 이전까지의 엔딩은 다 똑같아요. <안나>, <페어 러브> 다 마찬가지예요. 까뮈의 작품들처럼 제 영화의 엔딩은 부조리를 인식하는 순간이었어요. 정확히 그 목표를 갖고 만든 작품들이예요. ‘난 세상이, 인생이 이런 줄 알았어’, 하고 살았는데 잠깐, 그게 아닐 수도 있겠네?’ 라는 생각이 문득 드는거죠.

: <프랑스 영화처럼>부터 다시 한 번 봐야겠네요. 그런데 <로마서> 이후에는 어떤 엔딩으로 바뀌나요?

: 다양하게 바뀔 거예요. 이전까지의 작품들은 일반적인 상업영화의 플롯은 아니었거든요. 이제 저예산 독립영화는 하지 않으려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런데 오늘 이야기 나누다 보니까 <안나>를 다시 만들고 싶은 생각이 드네요, 제작자의 입장에서 볼 때 <안나>는 광범위한 대중들에게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작품도 아니면서 완전히 저예산으로 찍을 수 있는 작품도 아니라 좀 까다롭죠.

 

시나리오 작법에 관하여

: 십대 때부터 소설과 시나리오를 쓰신 걸 보면, 원래 창작에 재능이 있으셨던 거죠?

: 제가 초등학교 때 <아마데우스>라는 영화를 한 번 보고, 연극으로 각색을 해서 수학여행 때 무대에 올린 적이 있었어요. 그런 걸 보면 솔직히 글 쓰는데 감각은 있었던 것 같아요.

: 정말 하나님은 불공평하시군요.

: 그렇지만 정말 중요한 건 적절한 시기에 충분히 트레이닝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재능만으로는 부족해요. 저만 해도 누군가에게 작법을 배우지는 않았지만 여기저기서 들은 얘기로 혼자서 할 수 있는 것들은 해왔던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도 하루에 원고지 백 장은 썼거든요. 그러니까 장편 시나리오 다섯 편도 안 써본 사람들이 제가 재능이 있나요, 없나요라고 물어보는 건 좀 우습죠.

: 이야기 나누는 가운데 이미 팁이 많이 나왔지만, 시나리오를 쓰는 이들에게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요?

: 최근 2-3년간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강조하는 것은 메인 플롯의 중요성인데요, 뻔한 얘기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아요. 저조차도 메인 플롯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생각하게 된 게 몇 년 안 됐어요. 메인 플롯은 인물의 심리적 동선과 물리적 동선을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메커니즘이예요. 그 메커니즘이 영화적으로 성립이 되느냐 안 되느냐가 관건이거든요. 과장해서 얘기하는 게 아니고 망한 영화들은 딴 거 없어요. 오직 메인 플롯의 영화적 귀결이 실패한 거예요. 평론가들, 관객들은 망한 영화에 대해 이런 저런 이유들을 대지만, 메인 플롯이 잘 성립이 되어 있으면 다른 부족한 점도 거의 커버 돼요. 메인 플롯을 밥으로 비유해 볼게요. 좋은 쌀로 밥을 해 놓으면 김치 쪼가리 하나만 있어도 밥을 먹을 수 있어요. 그런데 반찬이 아무리 화려해도 쌀이 안 익었으면 밥은 못 먹는 거죠.

그런데 좋은 메인 플롯의 메커니즘일수록 사람들이 인지를 못 하게 되어 있어요. 이렇게 얘기해 볼게요. 매일 해가 뜨고 지잖아요. 시간이 지나면 계절도 바뀌고요. 그건 지구의 자전과 공전 때문인데, 우리가 평소에 지구의 움직임을 느끼지는 못하죠. 좋은 메인 플롯은 바로 그런 겁니다.

: 정말 혼자 듣기엔 아까운 말씀이네요. 하지만 혼자만 알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해요. (웃음)

: 그리고 저는 어마어마한 실패를 한 사람이잖아요. 주변에 친한 감독들은 해외 영화제에서 상도 휩쓸고 그랬는데.

: 그런 게 성공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지만, 표면적으로는 그럴 수 있겠네요.

: 그렇죠. <페어 러브> 만들 때만 해도 제작사를 다섯 번 옮겼어요. 그 중 하나만 얘기해 줘도 동료 감독들은 울면서 나가요. 그리고 1년에 시나리오 열 편을 써도, 그 중 세상에 못 나오는 게 태반이거든요. 가장 강력한 공부는 실패라는 게 결론이예요. 백 번의 강의를 듣는 것보다 내가 목숨을 건 무언가 때문에 죽기 직전까지 몰리는 경험. 둘 중에 후자가 훨씬 도움이 될 거예요.

: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이군요.

: 같은 맥락에서 학교에서 단편 천 편 만드는 길과 은행빚으로 1억짜리 장편 영화 한 편 만드는 길이 있다면 후자 쪽이 더 도움이 되겠죠. 절박한 상황에서 뭔가에 도전해보는 경험이 중요하다는 얘기였습니다.

: 저를 포함해서 시나리오를 쓰는 분들이 꼭 기억해야 할 얘기인 것 같습니다. 오늘 말씀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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