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드라마] 메시아의 죽음과 남겨진 사람들 - "2020년에 다시 만나요"
[9월 드라마] 메시아의 죽음과 남겨진 사람들 - "2020년에 다시 만나요"
  • 김민정(드라마평론가. 본지 편집위원)
  • 승인 2018.09.01 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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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TBC 드라마 <스케치> 홈페이지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번 본 사람은 없다. 야한 동영상 얘기가 아니다. 확고한 팬덤을 가진 범죄수사 장르를 설명할 때 꼭 나오는 말이다. 영화전문 채널로 시작한 OCN이 범죄수사드라마를 특화시킨 채널로 유명세를 얻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한 번 보기 시작하면 절대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일명 ‘장르물’이라고 부르는 범죄수사드라마의 매혹적인 흡인력이다. 권선징악에 대한 사회적 갈증 때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악한 본성에 대한 근원적 끌림 때문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전세계 최대 막강 팬덤을 자랑하는 그리스도 예수에게도 안티팬은 존재한다. 그러니 장르물을 좋아한다고 욕한다한들 재미있으면 그뿐이고 내가 행복하면 그만이다. 죄 없는 자만 돌을 던지라.

예수 이야기가 나와서 하는 소리지만 하늘에 있는 신이 제일 좋아하는 드라마 장르는 단연코 범죄수사일 것이다. 막장드라마 탓에 TV드라마가 굉장히 비윤리적이라는 인식이 팽배하지만 그것은 오직 사적 영역인 로맨스에 해당되는 이야기다. 국가의 안녕과 사회질서에 해당되는 공적 영역에서는 전혀 다른 성격을 보인다. 범죄수사드라마란 자고로 범인을 발견·확보하고 증거를 수집·보전하는 수사 기관의 활동을 극적으로 풀어낸 장르이다. 한국은 외국과 달리 사설탐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모든 수사행위는 공무집행의 일환으로 묘사된다. 그러니 ‘나쁜 놈’은 당연히 경찰 혹은 검사의 손에 잡히고 사건은 늘 해결된다. 이렇게 윤리적인 드라마를 신이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시청자 입장에서 인간세계를 내려다보는 것이 답답했던 것일까. 하늘의 신은 몸소 누추한 땅으로 내려오는 걸로도 부족해 작은 브라운관, 때로는 그보다 더 작은 모바일 스크린 안으로 들어왔다. 주연 잡아먹는 화려한 까메오처럼 인간세계에 신이 등장한 것이다.

드라마 <스케치>(부제: 내일을 그리는 손)에는 두 명의 신이 존재한다. 정확히는 신이라기보다는 ‘메시아’에 가깝다. 신적 존재라 할지라도 하늘에 있을 때는 신이라 불리지만 땅으로 내려오는 순간 인간의 모습으로 신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메시아가 되니까 말이다. 유시준 검사와 유시현 형사는 미래를 볼 수 있는 예지력이 있고 그것 때문에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신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인도하고 통제하는 메시아의 모습과 유사하다.

남매인 두 사람은 궁극적으로 ‘어르신’이라는 악의 축을 설정하고 그의 범행을 막기 위해 노력하는데 그 방식이 매우 독특하다. 우선, 그들이 쫓는 것은 범죄자나 범죄현장이 아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범죄와 잠재적 범죄자를 찾아 해결하는 것이 그들의 활동 목적이다. 짓지도 않은 죄에 대해 회개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몫이다. 시간이 흘러 그들이 진짜 범죄자가 되는지, 실제 범죄가 발생하긴 하는 건지, 그런 의문들은 드라마에서 별로 중요하게 처리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직 예지력을 가진 유시준과 유시현만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의문이 아니라 믿음이다. 믿어라,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그런데 문제는 우리의 믿음이 아니다. 바로 신이란 존재 자체이다. 유시준과 유시현, 그들은 동일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방법론에 있어서는 전혀 다른 스타일을 보여준다. 유시현 형사가 자신의 예지력 때문에 친구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미안한 마음에 사람 살리는 일에 예지력을 사용한다면 유시준 검사는 자신의 예지력 덕분에 목숨을 부지한 사람이 수백 명을 죽인 범죄자가 된 것을 알게 된 후로 범죄자를 미리 처단하고 범행을 막는 것에 몰두한다. 유시현 형사의 예지력이 사람을 구하는 ‘사랑과 생명’의 얼굴을 하고 있다면 유시준 검사의 그것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범죄(자)를 처단하는 ‘죽음과 심판’의 얼굴을 하고 있다. 그들의 상반된 얼굴은 구약의 엄격한 야훼와 신약의 인자한 하나님을 연상시킨다.

야훼이든 하나님이든 한쪽만 존재했을 때는 일이 간단했다. 내 앞에 있는 그를 믿으면 되니까. 그런데 우리 앞에는 지금 두 얼굴의 신이 공존하고 있다. 과연 우리는 어떤 신에게 기도해야 하는 것일까. 사소한 바람에도 갈대처럼 흔들리는 나의 삶을 도대체 누구에게 의탁해야 한단 말인가. 당연히, 사랑의 신에게 끌리지 않겠느냐고 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극중 유시현은 유시준에게 예지력 면에서 미흡한 것으로 그려진다. 후반부까지 오빠의 예지력에 압도되어 질질 끌려 다니다가 아주 잠깐 비등해지고 다시 원상태로 돌아온다.

그럼에도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사랑이 제일이라”라는 신의 약속을 굳게 믿고 ‘사랑의 메시아’를 선택하더라도 마음이 썩 개운치는 않다. 왜냐하면 유시현의 사랑이 그다지 따뜻하게 느껴지지 않기 때문이다. 극중 유시현 형사가 제일 많이 한 말은 ‘스케치는 틀린 적이 없어요.’이다. 뭔가 기시감이 들지 않는가. 그렇다. 유시준 검사 역시 비슷한 말을 자주 했다. “제가 언제 실망시켜 드린 적 있습니까?” 두 남매는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만 결국엔 똑같은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믿으라. 혹은 나를 따르라.

돌고 돌아 우리는 제자리에 돌아왔다. 구약의 신과 신약의 신은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만 애초에 그 둘은 한 권의 성경으로 유일신에 대한 믿음과 믿음의 절대성을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 그걸 우리는 잠시 잊고 있었다.

현실은 절대 바뀌지 않는다. 설사 바뀐다 할지라도 예지력 있는 메시아, 그러니까 소수의 엘리트에 의해 바뀐다. 어디선가 김빠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도대체 우리는 왜 살아야 한단 말인가. 아니, 왜 우리가 이 드라마를 봐야 한단 말인가. 한국형 범죄수사드라마의 새로운 트렌드를 확인할 수 있는 세련된 플롯의 힙(hip)한 작품이라서? 월드스타 비의 2년만의 드라마 복귀작이라서? 2%대의 아쉬운 시청률을 기록한 것에 대해 혹자는 복잡한 스토리라인으로 인해 시청자의 중간진입이 어려웠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그것은 서사구조의 형식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시청자를 무기력하게 만드는 작품 메시지의 문제라고 봐야 바람직하다.

Ⓒ JTBC 드라마 <스케치> 홈페이지

<스케치>의 인물관계는 선과 악의 대결도, 악을 물리치기 위한 순수 선과 악을 물리치기 위해 악이 되어버린 괴물(선)의 대결도 아니다. 그저 신과 신의 대결일 뿐이다.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지 않는 신들을 위한 신화. 범죄수사드라마 장르 특유의 추리하는 맛은 <스케치>에서 찾아볼 수 없다. 왜냐하면 두 얼굴의 메시아가 인간이 참여할 수 있는 여지를 봉쇄해버렸기 때문이다. 답은 정해져 있고 그 답은 신만이 알고 있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답답한 것은 한여름의 열대야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무력함을 상기시키는 현실의 거울과 마주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마지막 회에 국민들에 의해 새로운 미래가 도래하는 모습을 유시준이 예지력를 통해 보고 자살을 시도한 것은 신화 바깥에 위치한 인간들을 위한 배려로 해석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자신이 죽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악의 축인 ‘어르신’을 살려두고 그 기회를 평범한 사람들에게 양보한 것을 과연 신의 선의로 해석할 수 있을까. <스케치>에는 악과 맞서 싸우는 사람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같이 모두 사연이 있다. 아내가 살해당한 사람, 약혼자가 살해당한 사람, 딸이 살해당한 사람… 그들은 각자의 상처를 품고 범죄해결에 대한 의지를 불태우는 한편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본다. 나의 행동이 복수심에 의한 것인지 정의를 구현하기 위한 것인지.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신은 자신의 생각과 행동에 대해 전혀 성찰하지 않는데 나약한 인간만 홀로 남아 신화 바깥에서 반성하고 또 반성하고 있다. 마치 자기 안에 내재된 악한 본성을 인정하기라도 하듯이.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회개하고 또 회개하고. 신과 함께 있으면 왜 자꾸 인간은 초라해지는지. 인간의 자유의지도 신의 빅픽쳐에 포함되어 있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 문득 두리안을 먹었던 때가 떠오른다. 천국의 맛이라 불리는 그 과일은 한 입 깨물기도 전에 지독한 오물냄새를 풍겼다. 그건 내가 두리안의 참맛을 못 느끼는 미맹(味盲)이라서가 아니라 천국이 우리가 생각한 것만큼 썩 좋지만은 않기 때문인지 모른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했다. 그러니 당당히 우리는 요구하면 된다. 신에게, 혹은 신의 이름으로 우리에게 내려 보낸 메시아에게.

저를 그냥 좀 믿어주시면 안 될까요. 여긴 제 ‘나와바리’거든요.
드라마는 종영했고 우리는 이미 <스케치> 16부작을 다 보아버렸다.

이번 생은 이미 틀렸어, 라고 단정 짓기엔 다행스럽게도 시간이 조금 남아 있다. 극중 유시준 검사가 본 희망찬 미래는 2020년 배경이었다. 정해진 미래가 올 때까지 우리에겐 2년이란 시간이 남아 있다는 얘기다. 메시아도 없고 드라마 작가도 없는 그런 세상이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미래를 예언한 요한계시록이 여느 말씀들과 달리 상징이 많은 이유에 대해 우리는 가벼이 여겨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메시지가 아니라 메시지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이고 문제는 신이 아니라 신을 바라보는 우리의 관점이다. 우리가 상상하는 대로 우리의 미래는 바뀔 수 있다. 상징은 하나의 의미에 갇히지 않고 여러 갈래로 뻗어나가는 땅 속 깊은 뿌리와 같은 것이기에 요한계시록은 지금도 다시 쓰이고 있는 중이다.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우리를 죄에서 자유롭게 했듯 유시준의 자살(시도)는 무기력에 빠진 시청자에게 ‘숨’을, 시청률의 늪에 빠진 <스케치>에게는 ‘구원’을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자, 2020년 <스케치> 시즌2 갑시다!

* 글은 이렇게 썼지만 별다른 추리 없이 유시준 검사가 끌고 다니는 대로 편하게 드라마를 보는 재미가 쏠쏠 했다. 모바일로 유시준 역의 ‘배우 이승주’를 검색한 것이 내 유일한 열심(熱心)이었다. 아무리 봐도 이 사람이 주인공 같은데.

 

 

* 《쿨투라》 2018년 9월호(통권 5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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