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월평] 민중적 이야기의 잔향
[문학 월평] 민중적 이야기의 잔향
  • 전철희(문학평론가)
  • 승인 2019.05.01 0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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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기완 선생의 소설 『버선발 이야기』가 출간됐다. 이미 많은 언론과 지식인들이 이 책에 대해 코멘트를 남겼다. 그런데 대부분의 평자들은 ‘백발의 거리투사’인 작가에게만 관심을 기울였다. 나는 이 책의 ‘문학성’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버선발 이야기』의 중심인물 버선발은 머슴이다. 그는 이름이 없다. 버선발은 맨발(벗은 발)을 뜻하는 고유어(일반명사)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어릴 적부터 신발을 신지 않고 다니다가 버선발이라 불리게 되었다. 작가에 따르면 본래 머슴들은 이름을 가지지 못한 경우가 많았단다. 소설 속에서 버선발은 머슴살이를 피하기 위해 도주한다. 그는 곧 죽을 위기에 처하는데, “짐승과 풀나무, 갖은 벌레, 떠가는 구름과 바람, 거기다가 뿔대 돋힌 사람들까지 다 함께 하나가 되어 다 함께 부르는 목숨의 노래”(109쪽)의 도움을 받고 살아난다. 이후 그는 마법적 힘을 얻어서 바다 위에 땅이 생겨나게 하고 그 위에 만인이 평등한 나라를 건설한다. 버선발이 마술적 힘을 얻은 것은 “모든 머슴의 뿔대(분) 뻗힌 한을 풀어드리고자 하는 피눈물 나는 대들(저항)의 열매인 것이니 그거야말로 참짜 사람이 할 수 있는 한바탕”(194~195 쪽)이라고 설명된다.

 『버선발 이야기』는 백기완의 정치적 지향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여기에서 버선발은 헐벗고 ‘머슴’처럼 살아온 민중들을 가리킨다. 그러나 민중들은 사회의 압재에도 굴하지 않고 새롭게 일어날 생명력이 있다. 민중들이 힘을 합치기만 하면 빈부격차와 착취가 사라지고 모든 사람이 정직하게 일을 하면서 땀을 흘리는 이상세계를 만들어질 것이다… 백기완은 이런 식으로 만인이 정직하게 일하고 공평하게 살아가려는 자세를 ‘노나메기’라고 부른다. 돌이켜보면 지난 50년 동안 그는 다양한 민중의 이야기들을 발굴함으로써 ‘노나메기’의 모습을 보여주고자 노력해왔다. 『버선발 이야기』는 지금껏 그가 집회장에서 풀어왔던 이야기를 종이에 옮겨놓은 것이라고 해도 좋다.

 한데 2019년을 살아가고 있는 젊은 독자들이 『버선발 이야기』의 메시지에 공명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우선은 이 작품의 설정부터가 판타지 소설을 방불케 할 정도로 ‘비현실적’이다. 또한 백기완은 이번 책에서 한자를 포함한 외국어를 단 한 번도 쓰지 않았다. 그래서 이 책에서는 “살메”, “젠나비”, “뿔대” 같은 사어死語들이 속출한다. 아마 작가는 고유어를 통해 근대화(서구화)가 사산시킨 모국어를 복원하고자 했을 것이다. 그러나 의도가 어쨌든 이 소설 속의 낯선 어휘들은 “우리”의 말이 아니라 이국어처럼 낯설어 보인다. 그런 점마저도 이 소설을 ‘환상적’으로 보이게끔 부추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버선발 이야기』가 허무맹랑한 이야기라고 비판해서는 안 된다. 어떤 시대에는 이런 이야기야말로 진실한 것이라고 여겨졌을 수 있다. 실제로 ‘민중’에 관한 논의가 활발했던 시절, 백기완은 진보진영을 대표하는 ‘입담꾼’으로 통했다. 많은 청년들이 그의 말을 경청했다. 백기완은 기대에 부응이라도 하려는 듯 대학가와 집회현장을 누비고 다니면서 민중의 이야기를 걸출하게 풀어냈다. 그의 이야기는 한국의 역사에서 끊이질 않았던 억압을 들춰내고 힘든 환경에서도 ‘노나메기’를 이뤄내려 했던 민중들의 힘을 표상했다.

 당시의 민중담론은 백기완의 ‘이야기’와 같은 것들로부터 생겨났다. 당시의 민중신학자들과 함석헌 등의 지식인도 백기완과 유사한 방식으로 민중의 모습을 재구했다. 1970년대 즈음에는 민족문학운동 진영의 몇몇 작가들도 그런 목적에 복무하는 문학작품을 써내고자 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민중’의 참모습을 복원하겠다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이 시대를 대표하는 진보적 지식인들을 떠올려보라. 그들은 특정 한 쟁점이 생기면 현실을 합리적으로 분석하고 실현가능한 대안을 제시하려 애쓴다. 그에 반해 1970년대 정도의 민중운동은 훨씬 더 거시적인 시각으로 역사를 훑고 민중의 잠재적 힘을 찾아내려 했다. 백기완은 당시의 민중운동에 내재해 있던 문제의식의 오늘날의 시점에서 ‘이야기’로 재구축해서 독자에게 들려줄 수 있는 마지막 작가 중 한 명이다.

 따라서 이 책을 오늘날 통용되는 ‘문학성’의 잣대로 온전히 평가하기란 불가능하다. 오늘날의 문학은 이런 것이 아니다. 비록 한 때는 문학인들도 이런 민중적 ‘이야기’를 창조하고자 노력했던 시절이 있었을지라도 말이다. 세상은 이미 너무 많이 변해버렸다. 나는 민중운동이 꼭 필요했던 1970년대 무렵의 독재시대와 낭만적 민중운동이 더 이상 생겨날 수 없는 오늘날의 ‘민주주의’ 시대 중 어느 쪽이 낫다고 단정할 능력이 없다. 그러나 이만큼 변한 세상에서도 여전히 예전과 같은 목청으로 민중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는 백기완의 삶 자체가 ‘문학적’이라고는 말할 수 있겠다. 그의 책이 여전히 묘한 감동을 안길 수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 《쿨투라》 2019년 5월호(통권 59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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