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에세이] 아를에서 빈센트 반 고흐를 만나다.
[갤러리 에세이] 아를에서 빈센트 반 고흐를 만나다.
  • 손정순(시인, 본지 편집인)
  • 승인 2019.06.01 0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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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프를 물고 귀에 붕대를 한 자화상(Self Portrait with Bandaged Ear and Pipe),1889,The Bridgeman Art Library

 남프랑스 갤러리 여행을 시작하며

  17년 전 곽광수 교수의 「엑스앙 프로방스 이야기」 (산문집 『가난과 사랑의 상실을 찾아서』에 수록)를 읽으며 저자를 “평생 동안 그리움으로 슬프게” 한 “엑스의 그 아름다운 비단결 같은 밤하늘”은 “남불의 푸른 하늘”은 도대체 어떤 빛일까 궁금했다. 그러나 대도시도 아닌 남불로 출장(일) 아닌 여행을 여행을 떠난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제72회 칸국제영화제에 참석하게 된 나는 이번이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개막식 일주일 전에 무작정 출국하였고, 니스공항에 내리자마자 자동차를 렌트했다. 코발트 빛 바다가 화려하게 수놓은 니스해변과 칸해변을 거쳐 먼저 엑상프로방스로 달려가 세잔과 에밀 졸라를 만났다. 그리고 아비뇽을 거쳐 바로셀로나의 가우디와 피카소를 만나고, 다시 프로방스로 돌아와 아를의 고흐와도 깊은 교감을 나눴다. 마르세이유에서 하루를 묵으며, “남불의 푸른 밤하늘”을 미치도록 가슴에 담았다. 한 며칠 더 이곳에서 머물고 싶었지만 5월 14일 아침, 다시 해변을 달려 칸영화제 개막식에 참석했다.

 칸영화제 기간 동안 하루 5편 이상의 과도한 영화 관람으로 눈이 휑해질 때면 근교 그라스의 향수마을과 앙티브의 피카소 미술관, 생폴드방스의 샤갈 마을과 작은 공화국 모나코로 자연이 선사하는 최고의 힐링 여행을 즐겼다. 눈부신 코트다쥐르의 아름다운 지중해 해안, 끝없이펼쳐지는 라벤더와 해바라기 수채화, 드넓은 포도밭… 수많은 화가와 예술가가 사랑한 도시 남프랑스가 기적처럼 눈앞에 펼쳐졌다. 그 중에서도 이번 호에는 지중해의 작은 마을, 고흐가 너무나 사랑했던 아를로 여행을 떠난다.


 고흐가 사랑했던 프로방스 마을, ‘아를’
 남프랑스 아를은 고흐가 사랑한 마을이다. 1888년 2월, 반 고흐는 하얀 눈이 쌓인 아를에 도착했다. 힘들었던 파리 생활을 잠시 접고 새로운 풍경과 자신을 찾아 무작정 남프랑스로 떠나온 것이다. 반 고흐는 그 선택에 대해 기쁨에 차 있었다. 연중 대부분 황금빛 햇살이 내리쬐고, 다채로운 색을 띠는 아를과 그 자연은 그에게 더욱 다양한색채와 기법을 시도해 볼 기회를 제공했다.

 너무나 가난하여 새 물감과 생활에 필요한 모든 돈은 남동생 테오에게 신세를 지고 있었지만, 그 모든 빚을 갚아 줄 만한 작품을 아를에서 그릴 수 있을 것만 같은 희망에 차 있었다. 불행히도 그 소망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 못했지만… 그는 프로방스의 따사로운 햇살이 내리쬐는 길목 아를에 15개월간 머물며 <해바라기>, <아를의 도개교>,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 <밤의 카페 테라스>, <아를의 고흐의 침실> 등 25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그 어느 때보다왕성한 작품활동이었다. 그의 그림처럼 아를로 들어서자마자 론강이 펼쳐지고,마을 곳곳에서 고흐의 그림들이 튀어나오는 것 같았다. 그가 자주 찾던 카페, 병원, 골목길에도 그의 흔적이 고스란히 내려앉았다.

 

 2000년 전 로마 유적, 아를의 원형경기장
 아를에 당도한 나는 먼저 원형경기장을 찾았다. 고흐의 숨결 위에, 프로방스의 햇살 위에 덧칠해진 것은 로마시대의 유적이다. 아를의 풍경이 낯설다 못해 신비롭기까지한 것은 이 유적들 때문일 것이다. 원형경기장 입구에는 고흐가 그린 <아를의 아레나 Arena at Arles>(1888)를 소개하는 안내판이 세워져 있다. 아를 원형경기장 안에서 환호하는 관중을 그린 작품으로 현재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이곳에서는 매년 4,9월 축제 때면 이곳에서 투우 경기가 열린다고 한다. 옛 극장에는 총 3,000석의 극장에 100여 개의 기둥들이 세워져 있었지만 현재는 두 개의 기둥만이 남았다. 하지만 여전히 로마시대와 마찬가지로 이 극장은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 7월의 포크 뮤직 페스티벌 장소로, 8월의 고전영화제 극장으로 뜨겁게 사랑받고 있었다.

 골목길에는 스페인풍 식당에 요란스러운 펍들까지 여행자들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원형경기장 주변에 늘어선 작고 예쁜 상점에서 나는 고흐의 그림이 새겨진 에코백을 하나 샀다. 찬찬히 아를의 골목길을 걷다보니 프랑스와 로마 외에도 스페인의 향취가 담겨 있다. 리퍼블리크 광장의 중심에는 오벨리스크가 있고 시계탑이 있는 시청사와 오른쪽에 생트로핌 성당이 보인다. 이 도시 어느 곳에서나 변치 않는 것은 아늑히 쏟아지는 햇살이다. 천재 화가의 소망과 아픈 시련까지 담아낸 프로방스의 작은 마을은 그래서 더욱 따뜻하고 애착이 간다.

 

 빈센트 반 고흐 재단

  원형경기장에서 빠져나와 파운데이션 빈센트 반 고흐로 향했다. 아를의 한 골목을 장식하고 있는 ‘아를 빈센트 반 고흐 재단The Fondation Vincent Van Gogh Arles’은 입구부터 모던했다. 방문한 당시는 반 고흐의 작품 세계와 함께 조지아 화가 니코 피로스마니NIKO PIROSMANI(1862~1918) 전시회가 열리고 있어 횡재한 기분이었다.

빈센트 반 고흐 재단에 전시된 고흐의 그림들
빈센트 반 고흐 재단에 전시된 고흐의 그림들

 세르게이 파라자노프Sergei Parajanov 감독에 의해 영화 <피로스마니의 주선율 위를 흐르는 아라베스크Arabesques on the Pirosmani Theme>까지 만들어져 1972년 시카고 영화 제 대상의 영광을 안겨주기도 한 장본인 니코 피로스마니는 조지아의 마르자니 출생이다. 아버지, 큰형의 사망으로 고아가 되자 부유한 상인 집에 입양되어 28세까지 살았다. 독학으로 그림 공부를 한 그는 1890년 수도 트빌리시로 이주한 뒤 철도 노동자의 삶을 살기도 하고 빈곤한 생활을 하는 가운데서 간판그림과 평범한 조지아 서민들을 그렸다.

 1912년 유럽에서 그의 그림을 인정하기 시작했으나 1916년 조잡한 그림이라는 어느 신문사의 혹평에 상처를 입고 대인기피증에 시달렸으며, 1918년 5월 5일 지켜주는 사람 하나 없는 가운데 홀로 그는 지하실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런 그가 죽고 난 후 프리미티즘(원시주의:원시성을 추구하는 현대적 그림)의 대가로 인정받으며 조지아의 국민화가가 되어 헌정시가 바쳐지고, 그의 사랑 이야기는 노래로 만들어지고, 화폐에도 얼굴이 나오고 영화로까지 만들어진 것이다. 전시관에서 틀어주는 그의 영상을 시청하면서, 살아서는 그 진가를 세상이 알아보지 못해 고생만 하다가 간 천재화자 니코 피로스마니가 고흐의 생을 참 많이 닮았는생각이 들었다.

 생전엔 네덜란드에서 온 미치광이 화가로 취급받던 반 고흐이지만, 이제는 아를 반 고흐 재단에서도 그의 작품은 <파리인들의 소설책> 하나만을 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최근에는 수십여 개에 이르는 반 고흐 작품들을 들여오고 있으니, 아를이야말로 마을 전체가 고흐미술관이다. 건물 2층 위에 조성된 뜰은 스위스 출신 작가 ‘하펠 에프티’의 설치 예술 ‘The Violet Blue Green Yellow’로 꾸며져 있다. 반 고흐는 밀레의 영향을 받아 자연을 있는 그대로 그리기를 좋아해 그 당시 아름다운 아를 곳곳의 모습들이 그의 그림 속에 고스란히 담겼다. 이러한 그의 화풍은 오늘날 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을 이 도시로 불러들이고 있는 것이다. 마치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건축에 모든 것을 바쳤던 안토니 가우디가 수많은 사람들을 스페인 바르셀로나로 불러들이는 결정적 역할을 한 것처럼.

 

 외로움과 고통 속에서 오직 붓을 잡고 자신과 싸웠던 반 고흐 시립병원
 고흐가 귀를 자르고 치료를 위해 입원했던 아를 시립병원 에스파스 반 고흐Espace Van Gogh는 지금은 대학교이자 문화센터로 쓰이고 있다. 그 입구에는 여전히 ‘시립병원 Hotel Dieu’이라는 간판이 걸려 있었다

빈센트 반 고흐 시립병원 전경
빈센트 반 고흐 시립병원 전경

 이곳에 3월 말까지 머물렀던 반 고흐가 1889년 4월에 동생 테오에게 보내 준 그림 <아를 병원의 정원>이 안내판처럼 세워져 있다. 작품이 소개된 안내판 뒤로 정원과 회랑이 있는 건물이 보인다. 고흐의 작품에서보다 나무의 굵기가 조금 굵어진 느낌이다. 고흐는 이곳에서 유화 143점과 100여점 이상의 드로잉 작품을 남겼다. 햇살에 춤추는 정원의 꽃들이 그 시절을 이야기해 주는 듯하다. 주변 기념품 샵에는 각종 카드와 테이블보 등에 그려진 고흐의 그림이 눈길을 끌고 있다.

 반 고흐는 아를에 초대해 함께 생활하던 폴 고갱과 큰 갈등을 겪었다. 고갱과 고흐는 격렬히 다퉜고, 그리 좋지 않은 건강 상태임에도 잦은 음주를 즐겼던 반 고흐는 고갱이 떠나자 자신에게 등을 돌린 현실에 좌절하며 한 쪽 귀를 자르는 자해를 저지른다. 네덜란드에서 온 요상한 화가의 존재가 불안했던 이웃사람들은 시장에게 진정서를 제출했고, 결국 그의 작업실은 폐쇄되었다.

 반 고흐에게는 모든 화구를 들고 시립병원에 들어가는 일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림을 그리지 않으면 더욱 심한 정신병에 시달릴 것만 같았던 그는 살기 위한 간절함으로 감시원이 문밖을 지키고 있는 병실 안에서 매일 붓을 잡았다. 아를 병원을 떠나 생 레미의 생 폴 드 모솔 요양원에서 또 다른 입원 치료를 받으며 증세가 많이 호전되기도 했다. 그러나 1890년 5월에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하숙집으로 거처를 옮긴 후, 다시 찾아온 발작과 환각 증상에 시달렸고, 약 두 달 후 오베르의 밀밭에서 스스로에게 총을 겨누고 만다. 반 고흐는 유럽의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며 살았는데, 그의 대표작들 중에는 남프랑스인 아를과 생 레미에서 탄생한 것이 많다. 프로방스는 그가 스스로를 갉아먹으면서도 자신을 위해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던 땅이다.

 “예전에는 이런 행운을 누려 본 적이 없다. 하늘은 믿을수 없을 만큼 파랗고 태양은 유황빛으로 반짝인다. 천상에서나 볼 수 있을 듯한 푸른색과 노란색의 조합은 얼마나 부드럽고 매혹적인지…”

 그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는 아를의 ‘매혹’이 담겨있다. <노란 집>, <아를 병원의 정원>, <밤의 카페 테라스 (포룸 광장의 카페 테라스)> 등 강렬한 색채의 작품 역시 그런 도시의 매혹이 자양분이 됐다. 그의 호흡이 닿았던 대부분의 공간들은 캔버스 위에 담겼다. 고흐가 머물던 병원은 문화센터로 용도가 바뀌었지만 작품 속 정원처럼 화려한 꽃이 피고 매년 여름이면 공연이 열린다. “이 모든 것이 끝났으면 좋겠다”라던 그의 마지막 말을 곱씹으며, 그가 홀로 싸웠을 외로움과 고통에 대해 생각한다.

 

 <밤의 카페 테라스>의 배경이 된 반 고흐 카페
 아를 병원을 나와 포름 광장으로 향했다. 광장에는 노벨상을 수상한 프레데리크 미스트랄의 동상이 있으며, 고흐의 대표작 중 하나로 <아를의 포룸광장)의 배경이 된 카페가 있다. 고흐가 그린 밤하늘은 검정색을 많이 사용하지 않고 그린 첫 작품이라는 설명이 있다. 이곳은 ‘카페 반 고흐’라는 고흐의 이름으로 여전히 성업 중이다. 고흐가 이곳을 배경으로 그림만 그린 것인지 아니면 자주 커피를 마신 것인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으나 당시 고흐의 경제적 빈곤으로 보아 이 카페에서는 커피를 맘껏, 자주 마시진 못했을 것이다. 돈이 없어 사흘 동안 밥을 굶고 스물 네 잔의 커피를 마시며 버텼다는 고흐의 커피 사랑이 어쩌면 이 카페를 그리게 된 동기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해본다.

(좌) <아를의 포룸광장>의 배경이 된 반 고흐 카페 (우) The Langlois Bridge at Arles with Women Washing, March, 1888, Krollor Muller Museum

 메뉴판도 식탁도 온통 고흐에 관한 것이다. 해가 이슥해지고, 가등이 하나 둘 켜지자 카페 골목은 작품 속 장면으로 서서히 변장한다. 카페 골목을 벗어나자 론 강으로 연결된다. 고흐가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을 그려낸 낭만적인 공간이다. 푸른 강변과 주황색 지붕의 낮은 건물들이 이뤄내는 프로방스 마을의 단상은 소담스럽다. 강둑을 걸을 때 바람이 어찌나 세게 불어대는지 내 몸이 강속으로 휭 날아갈 것만 같았다. 몸을 지탱하기 위해 강바람과 싸우고 있을 때 강둑에서 서로 부둥켜안은 연인들의 모습은 부럽기도 하고 작품속처럼 매혹적이었다.

 고흐는 자신의 말대로 짙은 푸른색과 노란색으로 밤을 표현했다. 하늘의 별빛과 강물에 비친 조명이 강하게 과장되어 그려졌다. 그는 남부 프랑스의 눈부신 색채에 대한 희망을 품었다. 전체적인 효과에서 상호상승을 이룰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보색적인 대비를 이루면서 강력한 색채로 그림을 그렸다. 그러면서 그는 대상의 자연적인 색을 넘어섰다. 반 고흐의 그림에서는 초록색 하늘, 분홍색 구름, 짙은 청색의 길이 있다. 그러나 눈부신 색과 강렬한 대조에도 불구하고 고흐의 그림은 결코 야하거나 벽보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는 나머지 색을 약화시키거나 결합시키는 중간 색조를 사용함으로써 조화로운 전체 효과를 만들어낸다.

 지금은 온 세계가 그의 그림을 높이 평가하지만 생전에는 한 점밖에 팔지 못할 정도로 재능을 인정받지 못하였다. 고흐의 위대한 점은 기존 화법과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오직 자신이 그리고 싶은 대로 그렸다는 점이다. 사물의 정확한 묘사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고, 자신이 그릴 사물들에 대해 스스로 느꼈던 감정을 다른 사람도 느낄 수 있도록 전달하기 위해 색채와 형태를 사용했다. 자연의 모방이라는 그림의 목적을 의도적으로 버림으로써 미술사에 있어서 그만의 독특한 족적을 남긴 것이다. 그가 아를에 머문 시기에 “모델을 구할 수 없어 내 얼굴을 그리려 좀 좋은 거울을 샀다”며 동생 테오 반 고흐에게 보낸 편지는 그가 얼마나 궁핍한 생활을 영위했는지를 잘 반증한다.

 또한 <아를의 다리와 빨래하는 여인들>은 모국 네덜란드에서 많이 봤을 도개교跳開橋를 아를에서 보고 그린 향수鄕愁이다. 전체적으로 황금빛 분위기를 띄고 있으며 다리 위의 마차와 빨래하는 여인들이 잘 어우러진 작품이다. 특히 도개교 위의 마차가 인상적이다. 고흐가 이 다리를 그렸을 당시에 랑글루아 다리Pont de Langlois/Langlois'bridge로 불렸던 이 다리는 1930년 콘크리트 다리가 새로 놓여 고흐의 작품 속 이미지와는 많이 다르게 변했고 지금은 ‘반 고흐 다리Pont Van Gogh’라 불리고 있었다. 고대 로마시대에 최대 번성기를 구가했던 고도시 아를은 이제 빈센트 반 고흐의 도시가 되었다. 실패의 연속이었던 인생이었지만 화가로서 자신의 삶을 사랑했던 고흐, 그의 체취가 햇살처럼 번지는 이 오래되고 낡은 도시를 우리가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쿨투라》 2019년 6월호(통권 6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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