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붓과 칼: 유근택의 그리기와 목판 작업
[강수미와 '함께 보는 미술'] 붓과 칼: 유근택의 그리기와 목판 작업
  • 강수미(미학. 미술비평. 동덕여자대학교 교수)
  • 승인 2024.06.04 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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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근택은 동시대 한국 미술계를 대표하는 작가다. 그런 그의 개인전이 서울 성북구립미술관에서 《유근택: 오직 한 사람》이라는 제목으로 열렸다. 작가는 제22회 이인성미술상 수상자로서 2022년 11월 대구미술관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가졌다. 이어 2023년 10월 말에는 갤러리현대 개인전에서 대형 회화 신작들을 대거 선보였다. 따지자면 성북구립미술관 전시는 그로부터 채 반년이 안 된 시점에 열린 셈이다. 하지만 《오직 한 사람》전은 작가의 그런 바쁜 행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내실 있었고 동시에 자극적이었다. 특히 각 작품들이 시각적 이미지를 넘어 촉각적인 에너지 혹은 일종의 생명력을 분출하며 이 전시를 특별하게 만들었다. 기획 측이 유근택의 작업 중 전시된 적 없는 그림과 목판 작업 위주로 전시를 구성한 선택과 집중의 효과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주목한 점은 유근택 작가가 지난 수십 년 간 회화와 판화 작업에서 일관되게 다양한 모티프와 표현법을 실험해왔고 눈앞의 작품들은 그 실험의 반복 불가능한 결과들이라는 사실이다. 요컨대 일관성과 다양성, 지속성과 변주, 실험과 완성이 유근택의 미술을 구축해온 역학이다. 그 때문에 감상자에게 《오직 한 사람》은 규모는 크지 않지만 유근택의 예술이 진정성 있게 담긴 동시에 각 작품에서 작가의 고민과 시도를 읽을 수 있는 전시로 여겨질 것이다. 그 면모는 중견 미술가의 원숙한 회고전보다는 생태적이고 현상적인 이미지의 출현 현장 같다.

유근택, 〈봄, 세상의 시작〉, 2024, 한지에 수묵채색, 202x178cm.
사진 제공: 성북구립미술관

세상으로 뚫고 나오는 작품들

《오직 한 사람》전에는 〈비〉, 〈눈-내가 온 길〉, 〈말하는 정원〉, 〈봄, 세상의 시작〉, 〈풍경〉 등 총 15점의 그림이 선보였다. 유근택 작가가 자신이 경험한 특정 시간, 공간, 현상, 사건의 존재/있음을 화폭에 생생하고 밀도 높게 표현한 작품들이다. 성북구립미술관은 유근택 작가가 2003년부터 성북구에 거주하며 “성북을 작품의 배경이자 삶의 터전으로” 삼아온 점에 주목했다고 밝혔다. 나는 지역적 미학을 모색하는 방향에서 그 기획의도를 지지한다. 하지만 그 미술이 더 보편적인 세계로 나아간다는 점 또한 강조하고 싶다. 이를테면 그 그림들은 성북구립미술관 제1전시실을 성북구의 풍경을 넘어 봄여름가을겨울이 펼쳐지고 순환하는 작은 자연계로 만들었다. 과장이 아니다. 그의 작품들 하나하나에서 계절의 특정 순간이 강렬하게 표현되었으며 자연의 질서가 제각각의 조형 언어를 통해 가시화되었다. 가령 〈아침〉(2022)에서 어느 이른 아침의 대기는 작가가 기하학적인 선으로 그린 집들을 감싸고도는 분홍빛으로 형상화되었다. 〈봄, 세상의 시작〉(2024)에서 세상 만물이 움트는 봄의 에너지는 꽃과 잡풀 들이 일상의 물건들과 함께 푸른 허공에 떠서 원무를 추는 운동으로 시각화되었다. 〈풍경〉(2021) 연작 중 비 내리는 도심 하천가를 그린 작품에서는 녹색 잡초들이 반 고흐의 밀밭처럼 일어선다. 눈 덮인 숲을 그린 〈눈-내가 온 길〉(2020)에서는 삶의 소란함과 잡다함은 사라지고 화면 가득 찍힌 흰색 붓 자국과 낭창하게 뻗은 검은 선들만이 지상을 지배하는 것 같다. 전시장에서 이처럼 선명한 이미지의 소우주가 압축적으로 펼쳐진다. 그래서 새삼 그 미술의 표현력과 미학적 특성이 궁금해진다. 나는 그것을 진선미로 정의하고 싶다.

유근택, 〈눈-내가 온 길〉, 2020, 한지에 수묵채색, 204X295cm.
사진 제공: 성북구립미술관

진선미

아름다운 것은 좋은 것이고 좋은 것은 진짜다. 이런 말은 지나치게 명쾌해서 순진하게 들릴지 모른다. 하지만 그 말을 진眞, verum, 선善, bonum, 미美, pulcrum로 바꾸면 어떤가. 그럼 우리의 머릿속에서 그 세 단어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학문과 예술이 추구해온 최고의 가치이자 인류 문명의 보편적 덕목을 뜻하는 개념으로 변환한다. 내가 쓴 위 문장은 그런 맥락에서 생각보다 의미가 간단하지 않다. 게다가 아름다움과 좋음과 진실이 현실에서 쉽게 실현되거나 얻어지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런 의미로 아름다운 것은 좋은 것이고 좋은 것은 진짜라는 말을 다시 음미하면, 그것은 귀하고 어렵고 유일한 것과 통한다. 나는 유근택과 그의 미술을 염두에 두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는 한국 미술계에서 30년 이상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작업해왔기에 강하다. 그는 그 긴 시간 동안 작업을 하면서 조금의 편법이나 요행도 부리지 않았기에 진실하다. 그 작업의 결과로 그의 작품들마다 특별한 실험성, 조형성, 표현력, 시각적 특질이 아름답게 나타날 수 있었다. 그 아름다움은 예쁘거나 귀여운 쪽보다는 무겁고 튼튼한 쪽인데, 대체로 유근택 작가의 강한 개인성에 근거한 미적 특질이라 할 수 있다.

현실의 권력 관계를 생각할 때 강한 것이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예술 창작을 견인하는 작가의 힘이 강하다는 것은 선함의 일종이다. 작가는 그 힘으로 일관되고 끈질기게 좋은 작품을 세상 밖으로 밀어내기 때문이다. 나는 다작多作을 하는 미술가들을 많이 알고 있다. 하지만 유근택 작가만큼 자신만의 강한 힘을 밀도 높게 유지해가면서 모티프, 양식, 기법, 구성을 다변화해 하나하나 독특한 아우라를 가진 작품으로 완성해온 이는 드물다. 《오직 한 사람》전시가 특별한 점은 미술관의 건축적 스케일이 크지 않기에 오히려 유근택의 그 같은 미술가적 특성이 압축돼 전시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것은 물리 법칙으로는 어쩌면 당연한 일일수도 있다. 밀도란 한계 조건에서 높아지기 때문이다.

유근택, 〈봄, 세상의 시작〉, 2022, 한지에 수묵채색, 146x103cm.사진 제공: 성북구립미술관
유근택, 〈봄, 세상의 시작〉, 2022, 한지에 수묵채색, 146x103cm.사진 제공: 성북구립미술관

 

한지에 수묵채색

나는 유근택의 작가적 힘이 동양화와 서양화의 구분을 뛰어넘어 회화의 전통과 혁신을 변증법적으로 전개해왔다는 의미임을 분명히 하고 싶다. 그리고 그가 1980년대 중후반부터 현재까지 미술을 해온 힘과 방법, 의지와 행위, 작업과 작품에 대해 오직 한 문장으로 미학적 판단만을 내려야 한다면 다시 한 번 앞선 문장을 제시할 것이다. 요컨대 유근택의 미술에서 미는 선이자 진이며, 사실 그 세 가지 가치는 변증법적으로 운동해왔다고 말이다. 그는 동양화 내지는 한국화의 미학을 대변하는 질료인 한지와 수묵을 저버린 적이 없다. 하지만 그 물질들을 써서 관념적 차원의 동양미나 진리를 화폭에 재현하려 하지는 않아왔다. 유근택은 “나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호흡하는 모든 것들이 어떻게 회화화 될 수 있는가”1를 작업의 화두로 삼아왔다고 말한다. 그 말을 상투적으로 들어서는 곤란하다. 유근택이 한지 위에 수묵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점을 생각해보자. 그 사실은 한편으로는 유근택이 학창시절 받아들인 미술이 ‘동양화/한국화’이기에 그로써는 꾸준히 탐구해야 하는 디폴트 조건이다. 즉 한지와 수묵채색은 그에게 장르적 관습이자 표현 질료로서 기본 값이다. 하지만 수십 년 동안 한 번도 변화를 멈춘 적 없이 작업해온 유근택에게 그 기본 조건은 고정된 규범이 아니라 다양한 회화 스타일과 표현법을 실험하는 토대로 작용했다. 이 작가가 자신을 성찰하며 그린 수많은 자화상들, 외조모와 부친을 비롯해 세상의 모든 존재들이 부재하게 되는 순간을 마주하며 그린 수백 수천의 드로잉들, 성북동 작업실에서 나와 주변을 걸으며 기록한 구체적이고 현상학적인 풍경화들이 그 개별 실현물들이다. 그것들의 미는 단순히 예쁘다거나 보기에 좋다는 식으로는 말할 수 없는 시각적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또한 예를 들어 동양적 정신이 담긴 한국화라든가 지적 개념이 의도된 현대미술이라는 식으로 재단하면 그 미술의 인과관계를 뒤집어 말하는 셈이 되는 선한 의지의 창작들이다. 유근택은 자신의 그리기로써 좋은 삶을 실현하고자 해왔기 때문이다.

유근택, 〈두 개의 나〉, 2017, 목판에 채색.
《유근택: 오직 한 사람》 제2전시실. 사진: 강수미

목판 작업

그런데 이번 《오직 한 사람》전시에는 유근택의 목판 예술이 회화와는 별도의 장으로 소개되었다. 제2전시실에 전시된 100여 점의 목판화와 목판을 원형으로 한 작은 조형물들이 그것이다. 유근택은 회화 작업과 마찬가지로 지난 수십 년 간 쉼 없이 목판으로 작업을 해왔다. 특히 그가 1987년경부터 작지만 두툼한 직사각형 목판을 조각도로 거칠게 파내서 자신의 얼굴을 묘사한 〈자화상〉 연작들은 작가의 인생이 흘러온 만큼이나 많은 수와 여러 얼굴 형상으로 축적되었다. 대체로 그 자화상 판화 속 인물의 분위기는 무거워서 감상자가 다가서기에는 조심스럽다. 그런데 《오직 한 사람》 전에는 그 판화 작업들이 일종의 아카이브 전시처럼 소개되어 감상자는 물론 이 작가를 연구하거나 향후 전시를 기획할 전문가들에게 쉬운 접근 기회가 되었다. 여기서 내가 주목한 사실은 유근택이 한지에 수묵 채색화를 그릴 때 붓을 다루는 스타일과 목판을 깎고 형상을 새기면서 칼을 다루는 스타일이 질료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일맥상통한다는 점이다. 그는 두꺼운 한지가 밀릴 정도로 강력하고 단호한 붓질로 화폭 위에 형상을 그려낸다. 목판화에서는 그 도구가 칼로 바뀌고 표현법이 나무를 깎고 새기고 파내는 것으로 달라진다. 하지만 그 힘의 강도와 표현의 질서는 상통한다. 예를 들어 유근택은 나무 표면에 깊이 조각칼을 집어넣고 형상을 새기는 방식을 쓴다. 그렇게 해서 목판 내부로부터 인간의 얼굴, 사물의 몸체를 발굴해낸다. 그 강력하고 단호한 칼질은 일본 우키요에浮世絵의 정교한 묘사법과는 완전히 다른 미학을 보여준다. 요컨대 유근택의 목판화는 그의 그림들과 마찬가지로 삽화와는 거리가 멀고 작가가 재료로 채택한 질료와 그의 행위가 합쳐져서 만들어지는 건축물 같이 느껴진다. 작가 스스로 자기 작업에서 회화와 목판의 공통성을 깨닫고 있는 것 같다. 유근택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칼과 붓은 서로 다르면서도 둘 다 어떤 호흡의 문제와 존재론에 깊숙이 접근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사함이 있다. 나에게 있어 이 조형성은 마치 습자지처럼 서로 침투하고 상호 보완적인, 어쩌면 안과 밖의 관계로 존재하고 있었다고 생각된다.”2

《유근택: 오직 한 사람》 제1전시실 전시 전경. 사진 제공: 성북구립미술관

그런데 위와 같은 생각은 유근택이 그림그리기와 목판 작업에 대해 질료와 기법의 관점으로만 접근하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암시한다. 오히려 그는 물질의 조건과 존재의 의미를 합쳐서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유근택의 회화와 판화에서 물질은 작가의 주관적 의도나 형상의 의미 뒤로 사라지지 않는다. 대신 두 차원이 강력하게 결합하면서 작가 대신 작품 자체의 존재감을 극대화한다. 《오직 한 사람》에 나온 작은 자화상 목판 하나가 유독 의미심장하게 보이는 이유가 거기 있다. 그 목판에는 유근택의 얼굴과 머리가 있어야 할 자리에 그야말로 뻥 뚫린 구멍만 있다. 작가가 그 부위를 칼로 파서 구멍을 내고 목판에 검은 칠을 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그 나무파편들을 거칠게 모아 부조처럼 반입체의 얼굴 형상을 만든 후 그것을 다시 구멍 난 목판에 반전시켜 연결했다. 그 결과 목판 자화상은 마치 실체가 빠져나와 검은 그림자가 된 형국, 또는 자아를 박탈당한 익명적 인간의 상징처럼 보이게 됐다. 유근택은 그 작품에 〈두 개의 나〉라는 제목을 부여했는데, 나는 그 의미를 조금 다르게 해석한다. 요컨대 그것은 두 사람이 아니라 인간 미술가와 그의 미술이 맺는 이자二者 관계를 뜻한다고 말이다. 유근택의 미술은 그 목판 형상처럼 미술가의 자아를 뚫고 스스로를 세상으로 밀어 올리는 강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다고 말이다.

 


1 유근택 작가 노트. 성북구립미술관 《유근택: 오직 한 사람》 전시 자료에서 인용.

2 앞의 출처.

 


강수미 미학. 미술평론. 동덕여자대학교 예술대학 회화과 부교수. 『다공예술』, 『아이스테시스: 발터 벤야민과 사유하는 미학』 등 다수의 저서, 평론, 논문 발표.
주요 연구 분야는 동시대 문화예술 분석, 현대미술 비평, 예술과 인공지능(Art+AI) 이론, 공공예술 프로젝트 기획 및 비평. 현재 동덕여자대학교 사회봉사센터 센터장, 서울특별시 박물관미술관진흥정책심의위원회 위원, 한국미학예술학회 기획이사 및 편집위원, 《쿨투라》 편집위원.

 

 

* 《쿨투라》 2024년 6월호(통권 12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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