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에세이] 온천 맛집, 헝가리: 세체니, 에게르잘로크, 헤비츠 호수온천
[기행에세이] 온천 맛집, 헝가리: 세체니, 에게르잘로크, 헤비츠 호수온천
  • 이성숙 시인, 수필가
  • 승인 2024.06.05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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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라 하면 부다페스트 야경을 떠올릴 사람이 많겠지만 헝가리는 온천 왕국이다. 전 국토의 80%가 온천지대다. 석유 시추를 위해 땅을 파다가 온천이 터지고, 금맥을 찾다가도 뜨거운 물이 솟아오르는 땅이다.

세계의 온천을 꼽는다면, 터키의 파묵칼레, 일본의 하코네, 헝가리 세체니, 대만의 신베이터우, 아이슬란드의 블루 라군 정도다. 대만 신베이터우와 일본 하코네는 짙은 유황 냄새와 산 전체에 하얗게 피어오르는 수증기가 장관인 곳이다.

목화의 성이라는 터키 파묵칼레는 눈부신 흰색 석회 호수로 탄산 온천이다. 클레오파트라가 이곳에서 목욕을 즐겼다고 전해진다. 블루 라군은 아직 경험하지 못했으나 바다 중앙에 온천이 솟는다니 신비할 따름이다.

헝가리 온천 세 곳을 작심하여 다녀왔다.

 

세체니 온천

세체니 온천
세체니 온천 가는 길에 만난 카페가 있는 작은 호수. 호수 위로 옅은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신기해서 손을 담가 본다. 따끈하다.
이 따듯한 물에서 청둥오리가 물질을 한다. 새들도 온천에 적응한 모양이다.

가장 유명하고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부다페스트의 세체니 온천. 부다페스트 도심에서 20분 거리에 있어 현지인은 물론 여행자들이 다녀오기도 어렵지 않다.

로마 때부터 운영되었다는 역사적 가치뿐 아니라 1913년에 지어진 네오 바로크 양식의 온천 건물을 보는 재미도 있다. 웅장한 외관에 섬세한 조각을 넣은 실내 장식이 눈까지 즐겁게 한다. 두 개의 샘에서 솟는 물이 섞여 운영되는 세체니는 대형 노천 온천과 노천수영장 외에 약재탕, 맥주탕 등 모두 13개의 크고 작은 스파를 갖추고 있다. 물 온도는 18도- 40도까지 다양하다. 온천수에는 황산염, 칼슘, 마그네슘, 불소 등이 포함되어 척추 질환에 효과적이라 한다.

세체니 온천 부근에는 회쇠크 공원Hősök tere(영웅공원)과 버이더후녀드 왕궁, 감각적 디자인의 민족박물관Museum of Ethnography이 있어 이삼일 시간을 보내기에 부족하지 않다.

버이더후녀드 왕궁의 야경

세체니 온천에서 걸어갈 수 있는 거리에 회쇠크 공원과 버이더후녀드 왕궁이 있다. 온천을 나서 호텔로 향하는 길에 영웅광장(회쇠크 광장)과 만난다. 두 개의 원호 위에 영웅들 조각이 서 있다. 중앙탑을 본 후 광장 뒤로 걸으면 버이더후녀드 성이 나타난다. 야경이 곱고 아름답다. 버이더후녀드 성 옆에는 야외 스케이트 장이 야간 개장 중이다. 조명에 도드라진 흰 빙판과 성에서 나오는 노란 불빛이 고요한 밤을 반짝이게 한다. 빙판 위를 빙글빙글 도는 사람들 모습이 태엽 인형 같은 착각을 일으키는 풍경이다. 익숙한 듯 낯선 부다페스트의 밤 풍경이다. 회쇠크 광장의 초록 잔디 앞, 버이더후녀드 성문이 고성의 위용을 드러내고 있다.

 

에게르 잘록 소금 온천과 미녀의 계곡

에게르 잘록 소금 언덕. 터키 파묵칼레를 떠올리게 하는 지형이지만, 파묵칼레는 석회수이고 에게르 잘록은 소금물이다.

에게르는 부다페스트 북동쪽, 승용차로 1시간 반 거리다. 부다페스트가 유럽의 보석이라면 에게르는 헝가리의 보석이라는 별명이 있다.

오전에 세체니 온천에 다녀온 후 에게르로 향했다. 에게르는 작고 예쁜 와인 마을과 에게르 잘록 소금 언덕으로 유명한 곳이다. 이 소금 언덕에서 뜨거운 물이 솟는다. 소금 온천이다. 에게르의 소금 온천은 두 군데다. 200여 미터 거리에 두 곳이 있는데 하나는 호텔 투숙객을 위한 시설 좋은 온천이고(숙박하지 않고 온천만 즐길 수도 있기는 하다) 하나는 현지 주민을 위한 노상 온천이다. 노상 온천은 가격도 싸고 예약 없이 아무 때나 갈 수 있다.

호텔 예약에 실패한 나는 수영복을 챙겨 든 채 노상 온천 앞에 차를 세운다. 매표소 앞에서 서성대고 있으니 웃음 가득한 얼굴의 노파가 들어오란다. 돈을 내고 천으로 칸막이가 된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옷 가방을 적당히 빈 의자에 던져둔 후 욕조로 들어간다. 세포를 비집고 들어오는 따끔한 물맛, 꿩 대신 닭이라지만 시설 좋은 온천에 가지 못한 아쉬움을 한 방에 날리는 상쾌함이다. 달빛 아래 산중에서 온천욕이라니 신선놀음이 따로 없다. 산중이라 밤이 빨리 오는지, 희부연 하늘에 달조차 떴다.

에게르 사람들에게는 사랑방인 듯 동네 목욕탕인 듯, 사람들이 저마다 아는 체를 하고 얘기를 나누느라 정신이 없다. 정겹기도 하다. 이방인인 내게도 술을 권하는 에게르 사람들이다. 나는 소시지 한 개를 사고 술을 얻어 마신다. 흐흐흐 내 웃음마저 열기에 흐물거린다. 호텔 예약을 못 한 건 얼마나 잘한 일인지!

노상 소금 온천에서 와인 마을까지는 차로 10분도 채 안 되는 거리다. 그곳에 게스트하우스를 잡아두었다. 와인 마을은 미녀의 계곡이라는 별명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과거 포도를 수확한 후 으깨는 작업을 미녀들이 했다는 데서 그런 별명이 붙었단다.

지표에서 일어나는 자연현상이 신비로운 대표적인 장소로 터키 파묵칼레와 미국 제1호 국립공원 옐로스톤을 꼽는다. 그와 견줄만한 것이 에게르의 소금 온천이다. 규모는 파묵칼레나 옐로스톤에 비할 수 없이 작으나 바닥에서 소금이 솟아 대지가 온통 하얗게 말라 있는 모습은 신비함 그 자체다. 온천에는 약한 유황 냄새도 난다.

미녀의 계곡 와이너리. 토굴처럼 땅을 파고 와이너리가 들어서 있다. 토굴은 와인저장에 좋은 온도를 제공한다.
미녀의 계곡의 비커베르 와인

소금 온천에서 나와 언덕길을 운전하면 길 끝에 와이너리가 있다(승용차로 10분 정도). 미녀의 계곡이다. 미녀의 계곡에서 생산되는 대표적 와인이 ‘황소의 피, 비커베르’다.

구릉인 듯 산인 듯, 말발굽 모양으로 낮게 형성된 계곡에 땅을 파고 와인 가게들이 들어서 있다. 작은 와이너리부터 공장형으로 보이는 제법 큰 와이너리까지 다양한 규모다. 발 닿는 대로 와이너리 한 곳의 문을 밀고 들어선다. 젊은 남자가 와인이 즐비한 장 앞으로 나를 안내한다. 사전 정보 없이 찾아간 터라, 나는 대표 와인이 뭔지도 몰랐다. 시음이나 하고 나올 요량이었으므로 직원에게 ‘이 가게 대표 와인을 맛보고 싶다’고 했다. 그는 단번에 ‘황소의 피’를 들어 보인다. 황소의 피로 만들었어? 포도로 만든 게 아니고? 의구심 가득한 내 표정을 본 직원이 웃으며 전해오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때는 16세기. 오스만튀르크가 헝가리를 침략했을 때다. 8만 대군의 튀르크 군을 상대해야 하는 에게르의 병사는 고작 2,000명. 수적 열세를 개탄한 성주는 이 전투에서 전사하게 될 병사들을 위해 창고를 열어 음식과 와인을 맘껏 먹고 마시게 했다. 병사들은 정신없이 와인(레드 와인)을 마셨고 와인은 수염과 옷을 붉게 물들였다. 다음 날 아침 시작된 전투에서 병사들은 붉은 와인으로 범벅이 된 몸으로 초인적 힘을 발휘하여 적군에 맞섰고 기적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와인 전투복 차림의 에게르 병사를 맞이한 튀르크 군 내에서는 이상한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에게르 군이 밤새 황소의 피를 마시고 전투에 나섰다는 것. 결국 튀르크 군은 38일 만에 에게르에서 물러난다. 이후 에게르의 레드 와인은 ‘황소의 피’라는 무섭고도 귀여운 이름으로 전해 내려온다.

직원은 비커베르 유래 설명에 이골이 난 듯, 당장 여행 가이드를 한다 해도 부족함 없어 보인다. 비커베르는 에게르 사람들의 자존심이자 자랑이다. 미녀의 계곡에는 작은 와이너리가 U자 곡선을 그리며 늘어서 있다. 집마다 개성 있는 맛의 와인을 생산한다. 비커베르도 집집마다 맛이 다르지만 비커베르 사랑만은 한결같았다. 당연히, 비커베르 한 병을 산다. 이 잔 저 잔 시음하느라 과음한 나는 까닭 없이 기분이 좋아져서 사지를 흔들어 대며 계곡을 누빈다. 내 생에 이런 날이 다시 있으랴. 나무 냄새, 흙냄새, 휘파람 같은 맑은 공기, 순한 사람들, 정성 가득한 음식. 온천을 빠져나온 몸이 다시 와인에 젖는다.

 

세계 최대 자연 유황, 헤비츠 온천 호수

헤비츠 온천 호수
ICC 국영 열차 침대칸. 프라하에서 ICC 야간열차를 타고 10시간 만에 부다페스트에 도착한다.

부다페스트 세체니 온천에서 에게르와 헤비츠로 이동하기 위해 자동차를 빌렸다. 대중교통으로는 5시간 내지 7시간이 걸리는 거리지만 자동차로는 세체니에서 에게르까지 1시간 반, 에게르에서 헤비츠까지는 3시간 10분이면 닿는다.

에게르에서 두 번째 아침을 맞은 나는 다시 짐을 꾸려 헤비츠로 향한다. 헤비츠는 작고 아늑한 도시다. 그곳에 자연이 만든 세계 최대의 유황 온천 호수가 있다. 깊이가 낮은 곳은 2m, 최고 깊은 곳은 38m다. 전원 스티로폼 튜브를 사용하게 되어 있다. 호수 주변에는 ‘안전요원이 없습니다. 튜브를 가지고 들어가세요’라고 적힌 큼지막한 현수막이 곳곳에 붙어 있다.

오후에 도착한 나는 온천 입구에서 사정하여 주변을 산책하는 것으로 하루를 보낸다. 다음날, 수건과 수영복, 간식과 책까지 싸 들고 헤비츠 온천을 찾는다. 물은 두려울 정도로 투명하다. 아찔한 푸른 물 위로 수증기가 피어오르고 수증기 사이로 사람들이 느리게 유영하고 있다. 거대한 호수가 그대로 온천인 헤비츠의 자연 풍광도 경이롭고, 뽀얀 수증기에 둘러싸여 목욕을 즐기는 사람들 모습도 그지없이 한가롭다. 이곳이 무릉도원인가 싶은 지경이다. 수온은 계절에 따라 조금씩 다르지만, 한겨울엔 28도 정도다. 따끈하지는 않지만, 수면 위의 냉기를 피하기에는 충분하다. 서둘러 호수에 몸을 맡긴다. 온천에는 목욕 시설뿐 아니라 식당과 카페도 있다. 먹다가, 온천 호수에서 헤엄치다가, 심심해지면 책을 펼친다. 침대에 누워 잠든 사람들도 적지 않다. 휴대 전화도 사물함에 넣어버렸으니 온종일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은 날이었다. 휴대 전화가 이리 보급되지만 않았어도 우리의 일상은 덜 복잡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쳐 간다. 햇빛이 흐려지자 그제야 사람들이 하나둘 호수를 떠난다.

작고 고요한 마을 헤비츠에 들어서면 길에서도 모락모락 김이 솟는다. 헤비츠 다음으로 큰 온천 호수가 발라톤 호수 마을 케스트헤이다. 역시 헝가리에 있다. 발라톤은 경치가 장관이라 하니 다음에 꼭 들러볼 일이다.

유럽 최대규모라는 세체니 온천과 에게르 소금 온천을 거치고 연달아 헤비츠 유황 온천이라니 이런 호사가 또 있나…. 피부는 연이은 온천욕으로 말할 수 없이 보드랍다.

저녁을 맞는 헤비츠다. 나무 사이로 해가 진다. 온천욕을 끝낸 나는 이 길을 따라 숙소로 돌아간다. 작은 마을이라 호텔이 없다. 동네의 살림집 한 채를 게스트하우스로 빌렸다. 길바닥 곳곳에서 하얀 김이 피어오른다.

 


이성숙 시인, 수필가. 2015년 《미주기독문학》으로 등단. 산문집 『고인 물도 일렁인다』 『보라와 탱고를』 『인식의 깊이, 삶의 너비』 『길 위에 길을 내다』(공저) 등이 있음. 《미주크리스천헤럴드》 편집장 역임. 《미주한국일보》 《미주중앙일보》 《대구일보》 등에 칼럼 연재. 사람과 여행을 사랑하며, 디지털문인협회 회원으로 활동.

 

 

* 《쿨투라》 2024년 6월호(통권 12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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