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문학] 나날이 새로워지기 위하여
[9월 문학] 나날이 새로워지기 위하여
  • 전철희(문학평론가)
  • 승인 2018.09.01 0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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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은 새로운 세상의 가능성을 보여준다. 그래서 우리는 문학을 통해 현실을 새롭게 볼 기회를 얻는다. 또한 문학은 문학이라는 형식 자체에 대해서도 반성하려는 속성이 있다. 그런 자기갱신의 노력으로 말미암아 문학은 나날이 새로운 형식을 찾게 된다.

이 글에서는 과거의 문학을 넘어서려고 시도한 세 권의 책을 겹쳐 읽어보려고 한다. 한 권은 문학 제도에 대한 르포이고 다른 두 권은 각각 소설집과 시집이다. 서로 다른 형식을 지녔을지언정, 세 권의 책은 문학이라는 형식의 안팎을 두루 성찰하고 새로운 갱신을 모색하고 있다는 점에서 지금-여기의 문학을 되돌아보는 계기를 마련해줄 수 있을 것이다.

장강명 『당선, 합격, 계급』

장강명의 『당선, 합격, 계급』은 한국의 장편소설공모전(등단제도)과 기업의 공채 문화를 부감한 르포르타주이다. 주지하듯 이 나라에서 작가가 되려면 등단을 해야 한다. 그리고 기자, 의사, 법률인 등등의 전문적인 직업을 가지려는 이들은 엄청난 경쟁률의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장강명은 이런 현상들이 지극히 ‘한국적’인 것임을 지적한다.

언론계를 예로 들어보자. 한국의 언론사들은 해마다 ‘언론고시’를 통해 신규기자를 뽑는다. 그런데 단기간의 시험으로 기자의 자질 여부를 검증하기란 불가능하다. 서양의 유명언론사들은 대학신문사와 지방의 군소신문사 등에서 능력이 검증된 사람들을 채용한다. 반면 거대언론사에 속한 사람이라도 성과를 내지 못한다면 퇴출될 수 있다.

한국에서 그런 식의 직위이동은 거의 불가능하다. 언론고시를 통과한 사람은 큰 문제만 저지르지 않으면 정년을 보장받는다. 반면 지방 신문사의 기자는 자신의 자리에서 웬만큼 능력을 인정받는다고 한들 메이저 언론사에 발탁되기 힘들다.

한국의 경직된 채용제도는 시험에 통과한 자와 통과하지 못한 자를 구별시킨다. 시험에 통과한 이들은 카르텔을 형성한다. 그들은 자폐적 엘리트주의와 서열문화를 기반으로 삼아 내부 결속을 다지는 경우가 많다. 반면 선발되지 못한 이들은 극도의 패배의식과 좌절감에 사로잡히기 십상이다.

장강명에 따르면 한국의 장편소설공모전 또한 유사한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 무명작가가 발표한 소설은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한 채 사장되기 쉽다. 유명공모전에서 수상했다는 이력은 독자들의 관심을 끄는 유인동기가 된다. 그래서 무명작가들은 공모전에 목을 매고 있다. 그 결과 공모전의 권위는 높아진다. 그리고 공모전에 통과한 작가와 그러지 못한 작가(지망생)들은 철저히 구별 당하게 된다.

장강명은 공모전과 공채의 순기능을 인정한다. 일률적이고 정기적인 시험을 통해 응시자의 능력을 검증하는 현행제도는 나름의 공정성을 가질 수 있다. 문제는 한 번의 시험만으로 응시자들의 미래가 결정되어버린다는 점이다. 장강명은 현재의 경직된 시스템을 타파하고 사람들의 능력을 계속적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가령 군소언론사의 기자도 능력을 인정받으면 중앙언론사로 편입될 기회를 얻어야 한다.

문학장에서는 독자들이 직접 평가할 수 있는 공론장의 형성이 긴요하다. 한국의 독자들이 책을 고를 때 참조할 수 있는 것은 비평가와 네티즌의 평가뿐이다. 비평가의 글은 너무 현학적이며 모든 작품을 상찬하기만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편 한국문학에 대한 네티즌의 평가는 양이 많지 않을뿐더러 별로 공신력이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 장강명은 한국에도 외국 같은 유명리뷰사이트가 만들어지고 독자들의 평가가 공유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당선, 합격, 계급』의 해결책은 급진적이지 않다. 장강명은 현행제도를 뒤엎자고 주장하는 대신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려 했다. 물론 이 정도의 방안도 실현시키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또한 장강명의 구상이 현실에서 구현된다면 미처 예상치 못할 부작용이 생겨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가 말한 대로 실현될 수만 있다면 어쨌든 지금보다는 나은 상황이 될 것 같다. 대안의 실효성을 빼놓고 봐도 『당선, 합격, 계급』은 현재의 한국사회와 문학장의 문제들을 포괄적으로 분석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이기호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이기호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

다음으로 살펴볼 책은 이기호의 『누구에게나 친절한 교회 오빠 강민호』(이하 『강민호』)이다. 이 책의 수록작 「최미진은 어디로」는 광주에 거주하는 소설가 “이기호”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는 어느 날 중고거래 사이트에서 자신의 소설책 사인본이 헐값에 팔리고 있는 것을 발견한다. 화가 치밀어서 거래를 요청한 그는 판매자에게 나름의 사연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이기호”가 아무 생각 없이 독자에게 해주었던 사인이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그 판매자에게 상처를 주게 된 것이었다.

이 일화는 타자에게 친절을 베풀어야 한다는 도덕관이 공허한 것임을 암시한다. 타인은 항상 불가지한 존재이다. 그래서 선의에 의한 행동도 정작 상대방에게는 도움이 되기는커녕 아픔으로 남을 수 있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태도도 착한 사람으로 남아 있으려는 자기만족에 그칠 뿐 상대방에게는 해악을 끼칠 수도 있다는 점을 이기호는 보여주고자 한다.

『강민호』는 모든 사람이 고유성을 지닌 타자임을 집요하게 강조한다. 모든 수록작의 제목에서 인물명이 고유명사로 호명되는 것 또한 그런 작가의 문제의식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최미진은 어디로」의 화자 “이기호”는 여러모로 작가 자신과 유사한 인물이다. 이 설정은 작품에 유머러스한 활기를 부여하는 동시에, 소설가와 소설 속의 화자 사이에도 통약 불가능한 거리가 존재함을 암시하는 서사적 장치로 기능한다. 소설(fiction)의 존재론에 대한 작가의 진지한 고민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기호는 기구한 운명을 가진 이들의 서사를 특유의 재담으로 풀어내온 작가였다. 그는 지난 소설집 『김 박사는 누구인가?』에서부터 모든 사람이 불가해한 타자라는 인식을 노정했다. 『강민호』는 이 작가가 이전부터 가져왔던 미덕과 문제의식을 고스란히 계승하면서도 소설이 어떤 의미에서 윤리적인지에 대한 질문까지 새로이 던지는 노작이다.

임경섭 『우리는 살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임경섭 『우리는 살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

임경섭의 두 번째 시집 『우리는 살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에는 이색적이게도 3인칭의 시점을 취한 시편이 많다. 한 예로 시집의 앞머리에 수록된 작품 「크로아티아 비누」는 나카타라는 인물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그는 여행자를 꿈꿨지만 신혼여행을 가기 전까지 한 번도 여행을 떠난 적이 없었다. 그는 신혼여행지에서 산 비누를 쓸 때마다 여행의 기억을 떠올릴 수만 있다면 자신도 어엿한 여행자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다소 희한한 생각을 하기에 이른다. 그 결과 “목욕을 할 때마다 닳아 없어지지 않을 아내를 생각하며 아내만큼 소중한 크로아티아 비누를 매만”지게 되는데, 그럴수록 “비누는 빠르게 줄어”(11쪽)들 뿐이다. 이 시편에 담긴 환상적 서사는 나카타의 복잡한 심리(여행자가 되고 싶다는 꿈, 아내에 대한 애절한 상념)를 비누에 비유하여 풀어내고 또한 그 비누가 마멸되는 상황을 덤덤하게 묘사함으로써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이런 방식으로 임경섭의 시는 초현실적인 서사를 통해 특정한 인물이 느끼는 감정의 편린들을 엮어낸다. 그의 첫 시집 『죄책감』에는, 부재하게 된 대상을 향한 애도의 마음을 “나” 혹은 “우리”의 시각에서 증언한 작품이 많았다. 반면 이번 시집은 그런 감정의 궤적을 3인칭의 서사적 형식으로 담아내고 있다. 이런 변화는 내밀한 심리적 추이까지도 객관화시켜 묘사하려는 시인의 문제의식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상실감과 죄책감 등의 감정을 꾸준히 탐구해오면서도 그것을 새로운 방식으로 표상하려는 실험을 감행한 시인의 근기가 미덥다.

지금까지 살펴본 3권의 책에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새로운 문학을 구상하려는 작가들의 고투가 담겨 있다. 나날이 자기갱신을 거듭하지 않으면 금방 낡은 것이 되어버리고 만다. 앞으로 연재를 이어가면서 항시 이 점을 되새기려고 한다.

 

 

* 《쿨투라》 2018년 9월호(통권 5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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