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월평] 지루한 세상 속에서 빛나는 순간을 찾아내는 소설
[문학 월평] 지루한 세상 속에서 빛나는 순간을 찾아내는 소설
  • 전철희(문학평론가)
  • 승인 2019.06.0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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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권의 소설책을 함께 읽는다. 한 권은 젊은 작가들의 단편을 모은 앤솔로지이고 다른 한 권은 원숙한 작가가 쓴 장편이다.

  첫 번째 책은 『2019 제10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이하 『2019 젊은작가상』)이다. 이 앤솔로지에는 등단 10년 이하 작가들의 중·단편소설 7개가 수록되어 있다. 내가 아는 한 지금의 문학계에서 이 책만큼 많이 팔리고 영향력을 발휘하는 연간 출판물은 전무하다. 그리고 실제로 읽어보면 한 해 동안 문단에서 주목받은 작가와 작품들을 꽤나 충실하게 망라했다는 느낌을 줄 만큼 알차게 구성되어 있다.

  『2019 젊은작가상』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퀴어문학’의 선방이다. 수상자 7명 중 2명이 ‘퀴어작가’로 분류되는 박상영과 김봉곤이다. 특히 박상영의 「우럭 한 점 우주의 맛」(이하 「우럭」)은 수록작 중에서 가장 많은 심사위원의 지지를 받았다고 한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이 작품은 스물여섯 살 남자와 서른여덟 살 남자가 펼치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 사랑은 왠지 볼품없어 보인다. 띠동갑 남자들의 사랑이니까 젊은 선남선녀의 사랑보다 추하다는 식으로 말할 생각은 물론 없다. 소설 속에서 이들은 술을 먹다가 분위기가 되어서 우발적으로 관계를 맺었다. 어쨌든 그 이후로도 둘의 만남이 이어지기는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들의 가치관 차이(내지는 세대차이)만이 두드러진다.

  갈등이 커가는 와중에도 그들은 진지한 대화를 나누고 서로를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를 하지 않는다. 서른 여덟의 남자는 자신보다 어린 파트너에게 톡하면 훈수질을 하려고 든다. 스물여섯 살 남자는 당연히 그런 연인에게 불만을 가지지만 관계가 깨지는 것이 두려워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이렇게 정신적 교감이 없으니 그들을 엮어주는 것은 서로의 육체에 대한 갈망뿐인 것처럼도 보인다.

  이런 것도 사랑이라 할 수 있을까. 적어도 우리가 알던 로맨스 서사 속에서 그려진 사랑은 이보다 조금 더 고상하고 품위 있는 것일 때가 많지 않았는가. 로맨스 소설의 인물들에게 사랑은 어디까지나 정신적인 것 이다. 그들이 육체적 관계를 맺을 수도 있기는 하겠지만 그것은 정신적 교감을 재확인하기 위한 제의에 가깝다. 또한 그들에게 사랑은 성장의 계기가 된다. 가령 제인 오스틴의 소설 속의 주인공 여성은 이런 저런 사건을 겪으면서 정신적 성숙을 이루고 사랑도 얻는다. 또 어떤 소설이나 영화는 연인과 교감을 하면서, 혹은 그 연인들 이 마침내 결별하면서 누군가가 성장해가는 과정을 그려내기도 한다. 그에 비해 「우럭」의 인물들이 하는 ‘사랑’ 은 너무 즉물적인 수준에만 머물러 있다.

  「우럭」을 퀴어문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점 때문이다. 동성애자들이 등장한다고 해서 다 퀴어문학이 되는 것은 아니다. 퀴어는 이성애 중심주의를 교란시키는 예외이다. 그러니까 퀴어적인 사랑을 다룬 소설 은 “정상적”인 사랑을 다룬 재래의 로맨스와 뭔가 달라야 한다. 과연 「우럭」은 사랑에 대해 아무런 기대도 하지 못하는 세대가 그저 향락이나 위안을 구하기 위해 타인과 만나는 과정을 묘사해내고 있다.

  그런데 어찌 보면 이런 것이야말로 사랑이지 않을까. 사랑에 대해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 이들이 누군가의 체온을 느끼고 칭얼대고 싶다는 느낌. 이것이 사랑이라고 하지 않는다면 도대체 무엇이 사랑이란 말인가.

  박상영의 소설 속 인물이 가지고 있는 좌우명은 크게 두 가지이다. 세상에 대해 아무런 거창한 기대도 하지 말 것. 그러나 그 속에서 소소하지만 확실한(실감할 수 있는) 행복을 찾을 것. 어찌 보면 이런 가치관은 특별히 ‘퀴어적’이라기보다는 오늘날의 청춘들에게 광범위하게 퍼진 인생관을 반영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오늘날의 젊은 세대 중에서 삶이나 사랑 같은 것에 숭고한 가치가 있다고 믿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기대도 없이 하루하루를 견뎌내는 것도 가치 있 는 삶이고, 어쨌거나 살다보면 근사한 일들이 생길 때도 있다. 오늘날에도 사람들이 어떻게든 살아가는 것은 그런 순간들에 대한 기대 때문일 것이다.

  근래의 한국문학은 마치 그런 세태를 반영이라도 하듯, 삶이나 사랑이란 무엇인지를 거창하게 보여주는 대신 범속한 사람들이 우연히 맞닥트리는 순간들을 그려 내곤 한다. 『2019 젊은작가상』의 수록작들만 해도 그렇게 읽히는 것이 많다. 그런데 이런 인식이 비단 ‘젊은’ 세대만의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비교적 완숙한 경력을 지닌 작가 권여선의 신작 『레몬』이 그 점을 예증한다. 이 작품은 하나의 죽음을 둘러싼 이야기이다. 특히 어떤 사건이 일어나고 여러 사람들의 사연이 얽혀가는 전반부는 흥미진진한 일본소설과도 같은 느낌까지 풍긴다.

  그러나 『레몬』은 복잡한 사건을 해결하면서 진행되는 미스테리가 아니다. 이 소설은 하나의 사건이 어떻게 일어났는지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사건 이후에 남겨진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해 주목한다. 스포일러의 위험이 있으니 구체적인 내용을 명시하진 않겠지만, 한 사람의 죽음은 그 이후에 모든 주변 사람에게 상처를 남겼다. 그리고 모두가 그 상처에 얼마간 영향을 받아서 지지부진한 삶을 사는데,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서는 정말이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한 사람의 거대한 위안을 받은 또 다른 ‘사건’이 묘사된다. 사실 그 사건조 차도 너무나 하찮은 것이기는 했지만, 어쨌든 그렇게 하찮은 경험도 한 인물에게는 소중한 기억일 수 있다. 또 어떤 사람들은 그런 추억들을 통해 이후의 비루한 삶을 견뎌낼 수도 있을 것이다. 마치 이 소설은 누구나 삶에서 소중한 순간들이 몇 번씩은 있지 않았느냐고, 그런 순간들이 우리를 위로했기에 아직 세상은 그래도 살만 한 곳이 아니겠냐고 우리를 위로하는 것 같다. 지금까지 권여선의 소설은 진중한 문제의식을 능숙하게 풀어낸다는 점 때문에 동료작가들과 평자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아왔지만 그에 반해 대중적 소구력은 약간 낮을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레몬』은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부담 없이 읽힐 것 같다. 작가의 문제의식은 여전하지만, 하나의 사건을 중심에 두고 전개되는 이 소설의 양식은 여느 스릴러처럼 긴박하게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독자들을 따뜻하게 위로하려는 작가의 따뜻한 시각도 미더워 보인다.

  요컨대 이번 소설에서 권여선은 세상이 그다지 즐거운 곳만은 아니라는 인식을 보여준 이후, 그래도 이 세상에서는 또한 아름다운 순간들도 있을 수 있다는 점을 보여주었다. 마치 박상영의 「우럭」을 비롯한 『2019 젊은 작가상』의 수록 작품들이 그랬듯 말이다. 어쩌면 이제 문학은 인생이나 사랑이 무엇이냐는 거창한 탐구를 시도하는 대신, 인생에서 아름다울 수 있는 순간들을 가시화시킴으로써 이 지루한 세상 속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 양식이 된 것일까. 물론 이것은 아직 쉽게 답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어쨌든 이런 소설들이 나오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대해서는 고민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 《쿨투라》 2019년 6월호(통권 60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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