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양준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화합과 화해를 통해 영화에 대한 열정을 되찾는 영화제가 되길"
[전양준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화합과 화해를 통해 영화에 대한 열정을 되찾는 영화제가 되길"
  • 윤성은(영화평론가, 본지 편집위원)
  • 승인 2018.10.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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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사야 사진기자
전양준 부산국제영화제 집행위원장

유년 시절을 부산에서 보낸 나에게 부산은 마음의 고향과 같은 곳이다. 지금도 한적했던 광안리 바닷가의 풍경을 머릿속에 생생하게 펼쳐놓을 수 있을 정도로 많은 추억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이런 곳에서 국제영화제 개최 소식을 들은 것은 내가 고등학교 3학년 때였다. 그러나 아르바이트와 학업으로 늘상 바빴던 대학 시절 내내 영화제를 방문해볼 기회는 잡지 못하다가 본격적으로 대학원에서 영화이론 공부를 시작했던 2003년 가을, 드디어 야간 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떠날 수 있었다. 세계 각지에서 온 작가주의 영화들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는 영화학도에게 형용할 수 없는 기쁨을 안겨주었고, 이후 매년 더위가 수그러들 때면 부산에서의 일주일을 고대하게 됐다. 영화학 박사학위를 받고, 영화평론을 하게 되면서 영화제와는 부쩍 가까워져 지금은 매년 모더레이터로 참여하고 있다. 

현 부산국제영화제 전양준 위원장은 영화제 창립 멤버 중 한 사람으로 미주 유럽 지역 프로그래머, 부집행위원장과 마켓 위원장을 거쳐 올해 집행위원장으로 위촉되었다. 필자는 그가 평론가로 활동하던 시절 쓴 책을 읽으면서 그의 이름을 처음 알게 되었는데, 나중에 다양한 영화계 행사에서 만나 자연스레 인사를 나누게 됐다. ‘점잖고 유머를 아는 달변가’가 그에 대한 나의 인상이다. 지난 2014년 <다이빙벨>(감독 이상호, 안해룡) 상영 문제로 부산시와 영화제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과정에서 잠시 영화제를 떠나 있기도 했던 전양준 위원장을 쿨투라 편집실에서 만났다.

부산국제영화제의 태동

윤성은(이하 윤): 안녕하세요, 위원장님. 부산국제영화제가 올해로 23회를 맞았습니다. 창립 멤버로서 오랜 세월 영화제와 운명을 함께 해 오셨는데, 집행위원장으로서는 처음 맞는 영화제라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습니다. 오늘은 위원장님이 만들어왔고, 겪어왔던 부산국제영화제의 역사와 현재, 나아갈 방향에 대해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먼저, 영화제가 출범한 1996년, 그 이전으로 가서 영화제 탄생 전사前事와 위원장님이 합류하게 된 과정 및 초창기 역할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전양준(이하 전): 저는 1990년대 초에 영화평론가는 제 길이 아니라는 판단하에 예술영화를 만드는 프로듀서가 되기 위해서 제작사를 만들 계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술영화를 국내외에 배급하려면 해외 영화제에 대한 지식과 정보를 획기적으로 늘려야겠다는 판단을 한 거죠. 그래서 그 당시에 《스크린》의 편집장이었던 이연호씨를 찾아가서 해외 영화제를 다니며 ‘영화제 기행’의 원고를 쓰는 대신 당시로서는 고액의 원고료를 요구했어요. 뜻밖에 그분이 제 기획을 좋아해줬고, 그렇게 해외 영화제에 다니게 됐습니다. 저는 서구영화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은 많았지만 이전까지 메이저 영화제를 제대로 접하진 못했었죠. 서울단편영화제 집행위원을 하면서 베를린영화제에 다녀왔고, 80년대 중반에 런던영화제를, 80년대 말에 칸을 한 번 다녀온 것 말고는요. 그런 경험의 편린들은 전문적으로 페스티벌을 조직하고 마켓을 운영하고, 예술영화를 제작, 배급하는 과정을 파악하기에는 초보적인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재용 감독과 서울 정도 600주년 기념 다큐멘터리 작업을 시작했는데, 일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이재용 감독은 영화 장르뿐 아니라 사진, 무용, 미술, 퍼포먼스에 이르기까지 종합예술 활동을 펼치고자 했지만 저는 영화 작업에 국한시키고자 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신출내기 프로듀서로서는 가장 안 좋은 사태가 벌어졌는데, 영화를 완성시키지 못했던 겁니다. 여러 모로 애를 썼지만 필름 작업이 완성되지 않아서 1990년대 초중반으로 이어지는 시기에 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신용을 잃었으니까요. 그런 시기에 부산국제영화제 일을 같이 하자는 제의를 받게 되었죠. 그게 아마 1995년도였을 겁니다.

1980년대 말부터 늘 가깝게 지냈던 현 이용관 이사장, 고故 김지석 부집행위원장이 부산에서 영화제를 만들고자 했고, 처음에 6~7명 정도가 준비위원회 비슷한 명분으로 모였습니다. 그 중 우리 세 사람(전양준, 이용관, 김지석)이 행정가로서 경험이 많은 김동호 전 이사장을 모시자고 결정했고, 잘 알려진 것처럼 서울에 있는 플라자 호텔로 그분을 만나러 간 거죠. 김동호 전 이사장이 그 자리에 나온 것에는 이용관 이사장의 역할이 컸습니다. 저는 김동호 전 이사장이 영화진흥공사 사장으로 있을 때 통렬하게 영화진흥공사를 비판하는 소논문을 썼던 적이 있어서 별로 좋은 인연이 아니었거든요(웃음). 

: 현재 우리에게는 부산국제영화제가 영화계나 지역문화 행사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세계적인 규모의 행사로 자리잡았지만, 당시로서는 하나의 도전이었을 수도 있는데 위원장님이 흔쾌히 영화제에 합류하셨는지 궁금합니다.

: 솔직히 예술영화 프로듀서가 되려고 했던 저의 생각이 정리가 되지 않아서 영화제에 대한 제 태도는 좀 미온적이었어요. 저는 당시 30대 중반이었고, 의지가 강한 사람이어서 계속 밀고 나가려고도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당시에 유수의 영화제에 많이 초대됐던 박광수 감독이 영화에 대한 지식과 영화제 정보량이 많은 젊은 사람이 필요하므로 반드시 전양준을 데려와야 한다고 주장했고, 저를 설득해서 제가 합류하게 된 겁니다.

: 90년대 초 한국영화계는 기획영화가 등장하고 대기업이 영화계에 뛰어들면서 시스템이 바뀌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던 시기였는데, 부산국제영화제의 시작도 그런 분위기에서 시작되지 않았나 생각되는데요.

: 그 시기에 정말 국내 영화인들에게 왜 우리나라에는 국제영화제가 없는가 하는 공통의 콤플렉스가 있었던 것 같아요. 그래서 부산국제영화제보다 먼저 영화제를 출범하려는 조직적인 시도들이 여럿 있었어요. 일단 광주에서 가장 앞서 나갔었는데, 당시 신촌에서 문화운동단체인 ‘우리마당’을 이끌었던 김기종 씨가 있었죠. 몇 년 전, 전 주한 미국 대사(마크 리퍼트)를 공격해서 오명을 떨치게 되었지만 당시에는 한국의 전통문화와 그림자 놀이극의 대중화에 헌신적으로 앞장섰었죠. 그가 자기 고향인 광주에서 영화제를 열기 위해 명망 있는 감독과 평론가를 끌어들였어요. 하지만 김기종 자신도 영화인이 아니었고, 진정성이 있다고 보기도 어려웠죠. 그밖에도 영화진흥공사에서 국제영화제 TF 팀을 만드는 등 여러 시도들이 있었습니다만 자료 조사 정도에서 끝나고 말았죠.

: 그렇다면 부산이 그 중에서 성공적으로 영화제를 시작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뭐라고 생각하시는지요?

전: 아무래도 인력 구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구성원들의 역량이 가장 뛰어났죠. 박광수 감독은 영화감독으로서, 김동호 전 이사장은 영화진흥공사 사장으로서 경험이 많았고, 저는 젊은 사람들 중에는 국제영화제 참가 경험이 가장 많았어요. 여기에 김지석 부위원장까지 있었으니까 합쳐서 국제영화제 참가횟수가 약 200회에 달했던 겁니다. 상당한 경험과 내공이 있는 구성원들이 모여서 영화제가 출발할 수 있었던 거죠.

: 영화제의 초기 예산은 얼마나 되었나요?

: 초창기에 영화제의 컨셉, 방향에 대해 많은 고민이 있었죠. 우선, 전 세계 어디에도 없는 아시아 영화 중심의 영화제로 가자는 이야기가 있었고, 처음 시작하는 영화제니까 영향력을 갖기 위해서는 최소한 중간 규모는 되어야 한다. 즉, 당시 예산 규모로 20억 정도는 되어야 한다는 논의가 있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김동호 위원장과 친분이 있던 오세민 부시장이 3억원을 지원해줘서 시드 머니 삼아 영화제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 이사야 사진기자

그 동안의 직책 및 역할

: 위원장님께서 1회 때부터 지금까지 어떤 일을 담당해 오셨는지 말씀해주시죠

전: 당시 직책을 다 우리가 만들었죠. 실무를 맡게 될 세 명, 이용관, 김지석, 전양준이 있었는데, 이용관 이사장은 교수라는 직업이 있었고 서구 현대 영화 쪽에는 어두웠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한국영화 프로그래머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미주, 유럽 영화에 대한 정보와 지식이 많아서 한글화된 직책명으로 미주, 유럽 담당 프로그래머를 맡았고, 김지석 프로그래머가 아시아 영화를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 체제가 15년 이상 가게 된 거죠. 그런데 3회 정도 지나고 나서 제가 느낀 게 개인적인 푸념이지만 조연을 맡았다는 생각이 들더군요(웃음). 부산국제영화제는 아시아 영화에 많이 집중하는 특성도 있고, 저로서는 그 당시까지 충무로에 고락을 함께 했던 신구 영화인들이 많았는데 15년 동안 영화제 일을 하다 보니 많이 멀어진 거예요. 관혼상제도 잘 못 챙기고, 그렇게 소원한 관계가 되어 버리니 영화제 때문에 얻은 것도 많지만 잃은 것도 많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 15년간의 프로그래머 생활 끝에, 바로 부위원장이 되신 거죠?

: 2007년도에서 2008년 넘어갈 때 부위원장이 되었고, 2016년 12월에 사직을 했으니까 부위원장직을 9년 정도 맡았던 거죠. 이 조직의 문제가 진급이 안 된다는 거예요(웃음). 다른 영화제들도 그렇지만 너무 지나치게 집행위원장 중심의 1인체제이다 보니까 불합리한 점들이 있는 거죠. 스태프들도 마찬가지예요. 이번 영화제 끝나면 저는 편제를 고칠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승진 제도를 만들려구요. 승진을 위한 시험도 있어야 합니다. 집행위원장 1인체제가 강화되면 불합리한 일들이 많이 생겨요. 상명하달식의 집행위원장에게 아부하는 체제가 되어 버릴 수 있는 거죠. 그리고 2011년에 프로그래밍에서 손을 떼고 마켓 위원장을 겸하게 됩니다.

: 해외 영화제를 다녀보면 마켓의 활성화 정도에 따라 영화제의 위상이나 성패가 좌우된다고 할 정도로 그 중요성이 크더라구요. 부산국제영화제 또한 아시안 필름 마켓을 하면서 더 풍성해지고 해외 영화계의 주요 인사들도 많이 방문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데요, 그 이전에는 어땠나요?

: 우리는 이미 3회 때, 부산 프로모션 플랜이라고 하는, 현재 크고 작은 영화제에서 성행하고 있는 국내 프로젝트 마켓의 원형인 행사를 만들어서 성황리에 개최했고, 좋은 결과를 냈습니다. 그 이후에 영화 프로젝트 마켓을 강화시키고 확대하면서 메이저 영화제로 발돋움하기 위한 준비를 했죠. 10회 정도에 부산국제영화제가 메이저 영화제로 도약했다고 말한다면, 아시아 프로젝트 마켓의 역할이 컸죠. 아시안 필름 마켓도 2006년에 시작해서 올해 13회째를 맞게 됩니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그 동안 국내 메이저 회사나 영화진흥위원회가 별로 협조적이지 않았다는 겁니다. 많은 투자를 하지 않고 최소한의 비용으로 참석하면서 마켓을 이용하기만 하려는 양상입니다. 다른 나라의 예를 들면, 프랑스 영화인들에게는 칸 마켓이 세계 최대 마켓이자 프랑스 영화의 홈이기 때문에 유니 프랑스든 CNC 등 최고의 규모로 참가하면서 칸 필름 마켓에 힘을 실어주는데, 영화진흥위원회나 국내 영화 배급사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제가 계속해서 그들에게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하고 부탁을 했지만 하반기 모든 역량을 토론토 필름 마켓에 쏟아 붓더군요. 부산이 홈이라는 개념이 없는 거죠. 지금도 여전히 그렇습니다. 그래서 아시안 필름 마켓이 가능성과 한계를 동시에 안고 있는 건데, 다행히도 올해 오석근 감독이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이 되면서 부산국제영화제와 대화가 잘 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 훨씬 규모도 크고 효율적인 마켓을 만들자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부산국제영화제의 한정된 인력풀을 뛰어넘어 영화제와 협력하면서도 자율적인 기관으로서 키워나가는 큰 그림을 그리고 있습니다.

최고의 순간, 최고의 게스트

: 그렇게 프로그래머와 부집행위원장, 마켓 위원장을 역임하시고, 잠깐의 공백기를 거쳐서 올 2월에 집행위원장으로 위촉이 되셨습니다. 23년간 영화제의 발전에 주축이 되어왔는데요, 개인적으로 기억에 깊이 남는, 부산국제영화제 최고의 순간을 꼽는다면요?

: 주로 초창기인데요, 첫 회 때의 기억이 지금도 계속 새롭고 죽을 때까지 잊혀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첫 회 때 남포동 BIFF 광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을 봤을 때예요. 왜냐하면 개막이 다될 때까지 준비가 끝까지 않아서 몇 주째 잠을 자지 못하고 퀭한 눈으로 나갔거든요. 하루 이틀 먼저 도착한 영화인도 있어서 정신도 없고, 뭐가 제대로 되어가고 있는 건지 걱정도 많았는데 마치 예전에 남포동에서 정치유세를 할 때 풍경처럼 시쳇말로 유리창 깨질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있더라구요. 모두가 깜짝 놀랐죠. 그 관중들이 부산국제영화제의 모든 한계와 약점을 다 덮어 버린 겁니다.

: 그만큼 부산 시민들에게 국제영화제에 대한 열망이 있었다는 얘기겠죠. 부산뿐 아니라 전국의 영화 관객들이 국제영화제에 목말라 있었다는 이야기구요.

: 그렇죠. 그리고 5회 전까지 당시 부산국제영화제 위상으로 볼 때는 모시기 쉽지 않은 특급 게스트들이 많이 방문했습니다. 운도 많이 따랐고, 한국에 대한 호기심이 그들을 자극했다고도 할 수 있겠는데, 에피소드가 많습니다. 일례로, 라틴 아메리카의 기수이자 이론가였던 페르난도 솔라나스가 딸을 데리고 왔을 때, 서울에서 그를 보기 위해 온 관객들도 있었으니까요. 잔느 모로, 제레미 아이언스도 방문했었구요. 기타노 다케시,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이 명계남 씨가 열었던 <초록물고기> 리셉션에 참석해 당시 신인이었던 이창동 감독을 격려했던 일도 기억에 남습니다. 그런 일들로 영화제가 국제적 명성을 얻기 시작하니까 시에서도 신이 나서 지원을 늘려주었습니다.

: 영화제를 통해 책이나 영화에서만 보던 해외 영화관계자들, 배우들을 초대해 관객들과 만나게 하고 마스터클래스를 여는 것이 영화제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큰 보람이 아닌가 싶습니다.

: 그래서 저는 선정위원들에게 영화제에 누가 오는가가 좋은 영화 상영만큼 중요하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죠. 해외에 가서도 영화만 봐서는 안 되고,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으면서 우리 영화제를 방문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하는 거죠. 몇 년 전에 쿠엔틴 타란티노가 부산을 방문한 것도 그 전에 김동호 전 이사장과 제가 칸에서 그를 만났을 때 그의 이야기를 네 시간이나 들어줬기 때문이라고 봐요. 저도 할리우드 영화에 대한 정보가 많은 사람인데, 타란티노는 할리우드 B급 영화에 대한 지식이 너무 많아서 우리가 알지 못하는 작품과 배우들을 끊임없이 늘어놓더군요. 하지만 4년 정도 후에 그에게 항공, 호텔 다 필요 없으니 뱃지만 주면 영화제를 방문하고 싶다는 연락이 왔어요. 그래서 영화를 선정할 때는 영화인 초청과 방문 가능성까지도 생각해 봐야 하는 거죠.

: 위원장님과 김동호 전 이사장님도 많이 애쓰셨지만 고 김지석 부위원장이 그런 역할을 참 잘했던 것 같습니다. 칸에서 비보가 전해졌을 때 정말 많은 영화인들이 진심으로 애도했던 기억이 나는데요, 그런 관계가 결국 영화제에 대한 신뢰로 발전한 거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가장 기억에 남는 게스트는 누구인가요?

: 저는 잔느 모로가 제일 기억에 남습니다. 아시다시피 잔느 모로는 키가 작고 아담한 분입니다. 영화에서는 라울 꾸다르 같은 촬영감독들이 촬영을 잘 해서 그렇게 작아 보이지는 않지만요 (웃음). 2001년에 <마그리트 뒤라스의 사랑>(이하 <사랑>)이라는 작품을 상영하면서 잔느 모로를 초청했는데, 프랑스문화원과 얘기가 잘 되어서 비용도 우리가 대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었죠.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생겼어요. 잔느 모로가 자신의 영화를 오픈 시네마 섹션에서 상영해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운 겁니다. <사랑>이라는 영화는 저예산의 실내 장면이 많은 소품이거든요. 야외 상영으로는 아주 부적합한 작품이었던 거죠. 불행 중 다행으로 아시안게임 때문에 영화제가 늦춰지는 바람에 요트 경기장(5000석)이 아니라 벡스코의 한 관을 임시상영장으로 만들어서 3500~4000석 정도만 채우면 됐지만 그래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죠. 그러나 초청을 위해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했고, 오게 됐죠. 저는 너무 기뻐서 공항으로 마중을 나가서 잔느 모로와 사진도 찍었는데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그 사진을 지금 찾을 수가 없네요. 저에게 여러 모로 매우 소중한 사진인데, 구전으로만 전해지는 일화가 되었습니다(웃음). 이번에는 영화제가 끝나자마자 모든 사진과 동영상을 정리해서 부산국제영화제 사이트를 방문한 모든 사람이 열람할 수 있도록 할 예정입니다.

아무튼 <사랑>은 표가 900장 정도밖에 안 팔렸는데, 밤새도록 상영장의 좌석을 종으로 재배열해서 사람이 많아 보이도록 했습니다. 아무리 키가 작아도 좌석이 빈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잔느 모로는 자신의 요구를 들어줬기 때문에 그걸로 만족한다고 했던 기억이 나네요.

영화제의 개선방향성과 장,단기 플랜

: 2014년이었죠, 일명 <다이빙벨> 사건 이후 영화제가 파란을 겪으면서 말 그대로 ‘정치적인’ 싸움에 휘말리셨는데, 이용관 이사장과 함께 법정까지 드나들어야 하셨죠. 복귀가 결정될 때까지 그간의 마음고생은 말로 다 못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영화제 바깥에서 영화제를 객관적으로 볼 수 있는 기회도 되었을 것 같은데요.

: 작년에 직원들의 초대로 영화제 참석을 했습니다. 영화제를 떠난 지 10개월 만에 관객, 혹은 게스트로 돌아오게 되었는데, 많은 게 보이더군요. 개선시켜야 될 점들이 많다는 걸 느꼈어요. 임기 내에 책임감을 갖고,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신념으로 고쳐나갈 생각입니다.
가장 먼저, 다시는 불미스런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검찰 고발의 빌미를 제공했던, 투명성이 부족했던 부분을 유리처럼 투명하게 개선시켜야겠다라는 생각은 했구요, 정관개정을 해서라도 사무처장제를 도입해서 금전적인 부분, 재정에 대한 최종결정권을 주고, 책임을 지도록 하는 방식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그제큐티브 디렉터(Executive Director)라고, 북미나 유럽 일부 영화제에서 오래 전부터 있는 직제입니다. 이런 직제가 도입되면 집행위원장의 권한은 어느 정도 축소되겠죠. 사무처장제가 필요한 이유는 집행위원장이 법을 잘 모르는 상태에서 120억의 예산을 집행하게 되면 부지불식간에 위법적인 결정을 할 수 있다는 겁니다. 고용과 인사에 대한 전문성도 필요합니다.

: 외부인으로서 영화제를 바라봤을 때 눈에 띄었던 문제점들이 곧 개선의 방향성이 되었군요.  

: 그렇죠.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부산국제영화제 초창기 멤버들이 아이디어도 많고 영화에 대한 지식이 많은 사람들의 집합체였기 때문에 지금 생각해도 기초를 잘 다져놓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렀기 때문에 내용과 형식이 맞지 않는 부분도 꽤 많아요. 예를 들어 특정 섹션에 작품수가 지나치게 많다던가, 거장과 신인 감독의 신작이 같은 섹션에 들어간다든가 이런 문제점들은 바로잡아야 한다고 봅니다. 그리고 메이저 영화제인데 선정위원에 외국인 전문가가 없다는 것도 이상하죠. 선정위원에도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이번 영화제가 끝나고 나면 이용관 이사장과 긴밀히 협의해서 어느 정도 사람들이 기대하는 만큼의 개혁, 개선의 결과물들이 나오도록 할 생각입니다.

: 장기적인 영화제 플랜을 들어봤는데요, 복귀 후 영화제를 재정비하기에 넉넉지 않은 시간이긴 했지만 올해 영화제에 역점을 둔 사업에 대해 마지막으로 소개해 주시죠.

: 23년 역사에 유례가 없었던 이사장과 집행위원장의 4개월 이상의 공백, 선정위원회의 결원 상황 때문에 올해는 예년 스케줄에 비해 3개월 정도 모든 게 늦어졌어요. 영화제가 기본적으로 저력이 있기 때문에 프로그래밍과 초청을 하는데 큰 차질은 없었지만 뭔가 새로운 시도를 하기에는 늦어버린 거죠. 다만, 새롭게 부산 클래식이라는 프로그램을 시작하는데요, 기존의 회고전과 다른 점은 반드시 영화인들을 함께 모셔서 젊은 관객들이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영화 세계와 시대정신으로 그들을 안내하려고 합니다. 제가 아니라 주인공들이 안내하는 거죠.
또 한 가지는 포스터가 의미하듯이 화합과 화해를 올해의 모토로 내세웠습니다. 우리가 영화제에 왜 오는가, 왜 열광하는가. 결국 영화에 대한 열정일텐데, 영화제를 거듭해오는 동안 많이 사라졌던 것 같아서 안타까웠거든요. 다른 대립항들이 사람들의 마음에 들어앉았던 것 같아요. 정치적인 갈등, 질투와 비난 같은 것들이죠. 이제 다시 열정을 되찾고 필름 페스티벌이라고 하는 영화축제 본연의 분위기를 복원시키는 것을 올해 가장 방점을 두어야 할 목표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와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22년 전에 남포동을 가득 메웠던 관객들의 영화에 대한 열정, 하나였던 마음을 이번 영화제에서도 볼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영화제를 앞두고 가장 바쁜 시점에서 인터뷰에 응해주신 것,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 《쿨투라》 2018년 10월호(통권 5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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