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Theme] 은밀하게 위대하게, 봉준호 음악에서 영화가 보일 때
[7월 Theme] 은밀하게 위대하게, 봉준호 음악에서 영화가 보일 때
  • 서영호(음악가, 본지 편집위원)
  • 승인 2019.07.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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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플릭스

  좋은 영화음악이란 무엇인가. 류이치 사카모토가 자신이 작곡한 영화음악이 영상보다 더 좋았다는 평가에 경악하고, 영화의 장면에 뒤따라야 할 음악이 장면에 앞서서 독자적으로 빛나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는 이야기는 영화음악의 본질에 관한 힌트를 던져준다. 영화에서 음악은 미술이나 조명처럼 철저히 영화라는 종합 예술의 완성을 위해 기여하는 보조자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따라서 늘 마시고 내뱉고 있지만 의식되지는 않는 공기처럼 영화 속에서의 음악은 들리지만 들리지 않아야 한다는 ‘불가청성’의 역설을 안고 있다. 그것은 독자적인 감상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이것이 영화음악으로서의 기본 덕목이다.

  하지만 때로는 ‘참으로 시의적절한’ 음악이 영상을 너무나 적절히 받쳐주어서 오히려 장면을 주도하거나, 빛나는 조연처럼 시선을 강탈하기도 한다. 또는 장면이 제시한 감성과의 독특한 조합으로, 혹은 의외의 이질감으로 도드라져 보일 때도 있다.

  봉준호 감독의 최근작들에서 음악으로 기억되는 몇 장면들을 떠올려 본다.

   <옥자>의 ‘애니스 송’

  사랑은 눈에 보이지 않아서 자주 발화하거나 증명해 보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존재를 자꾸 의심받는다. 하지만 그것이 불현듯 와락 느껴지는 순간에는 1초가 영겁처럼 강렬하다. 그리고 진실 한 사랑의 마음은 종종 아름다운 전설처럼 스며온다. 그런 면에서 <옥자>의 지하상가 추격장면에서 존 덴버의 74년 히트곡 ‘애니스 송Annie’s Song’이 소거된 오디오를 뚫고 흘러나오는 순간은 인상적이다. 동물해방전선(ALF) 대원들의 옥자와 미자를 향 한 마음이 몸의 행위를 통해 미자(안서현)와 옥자에게, 관객에게 전해지는 순간이다. 슬로우모션 처리된 이 장면에서 ALF 대원들이 쓰러진 미자를 일으켜 세우고 우산을 펴 포획자들의 마취총탄으로부터 옥자를 보호하고 옥자의 발에 박힌 파편을 빼주는 모습은 반신반의하던 미자와 옥자의 마음을 온전히 연다. 여기에 흐르는 친자연적 음악인 컨트리, 통기타 소리, 그리고 영원한 사랑의 갈구를 외치는 존 덴버의 음성은 추격자의 폭력을 비폭력으로 무마시키는 ALF대원들의 재기발랄한 임기응변 신을 감싸 안으며 일촉즉발의 난리통을 사랑과 평화로 가득 채운다.

ⓒCJ엔터테인먼트

  <설국열차>와 <기생충>에서의 하프시코드 연주와 바로크 음악

   봉준호 감독에게 있어 하프시코드 소리나 바로크 음악은 풍요와 안정, 안온함의 표상이다.

  감독이 <기생충>의 음악을 구상하면서 정재일 음악감독에게 제안한 영화음악의 키포인트는 바로크 음악이었다. 바로크 음악은 언뜻 화려하지만 그 구조에서는 다분히 유연하지 않은 경직성이 느껴진다. 바로크 음악이 주는 안정감과 편안함은 주로 단순한 박자, 거의 변화가 없는 일정한 빠르기, 장식음이 많아 화려하지만 반복과 대구가 많고 음역이 넓지 않은 멜로디 등에 기인한다. 특히 멜로디 구사는 순차적이거나 근접한 음의 사용이 빈번하고 한 번에 몇 개씩 뛰어넘는 큰 폭의 도약은 상대적으로 적다. 이러한 바로크 음악의 선율은 ‘계단’이라는 영화의 주요 모티프와 접점을 이루기도 하고 ‘계단 위’ 사람들의 견고하고 안온한 삶을 표현하기 적절한 수단으로 보인다. 그리고 <기생충>과 바로크 음악 이야기를 생각했을 때 곧 <설국열차>의 한 장면이 함께 떠올랐는데 바로 ‘꼬리칸’ 사람들이 비로소 ‘앞 칸’ 사람들의 영역에 진입한 장면이다. 그곳은 앞 칸 사람들의 농수산물 식량 확보를 위한 온실 칸과 수족관 칸이었다. 탐스럽게 열린 과일과 수족관 가득 평화롭게 오가는 다양한 물고기 때의 풍요로움이, 더럽고 어둡고 빈곤했던 꼬리칸의 공간과 대비되며 펼쳐지고 이때 객차의 실내를 은은히 채우고 있는 것은 바로 하프시코드로 연주되는 우아한 바로크 음악이다.

  그러나 종종 블랙코미디적 시선을 견지하는 봉준호 감독의 영화들에서 묘사되는 지배계급 혹은 상층민의 우아함이나 안온함은 그 이면에 부조리나 위선을 감추어 두고 있는 허울일 때가 많다. 이것은 또한 턱밑까지 차오른, 파국으로 치닫을 포텐셜에너지를 애써 외면하고 있는 폭풍전야의 고요함이기도 하며 따라서 이러한 장면에 흐르는 우아한 하프시코드 연주나 바로크 음악은 오히려 기묘한 불안감을 조장하거나 예고한다.

  <기생충>에서는 연교(조여정)가 신뢰하는 ‘믿음의 벨트’가 어떻게 ‘파멸의 벨트’가 되어가는지 정재일 식의 바로크곡 ‘믿음의 벨트’가 보여준다.

ⓒCJ엔터테인먼트

  <기생충>의 계단, ‘시작’과 ‘끝’

  인간사회의 계급에 대한 문제의식을 전면에 내세우고 그것을 수평적으로 담아낸 것이 <설국열차>라면 <기생충>은 그것을 수직적으로 그려낸 영화다. <설국열차>에서 기차의 앞과 뒤로 상징된 계급은 <기생 충>에서는 계단의 위와 아래로 표현된다. 따라서 <기생충>에서 ‘계단’이 의미하는 무게는 남다르다.

  <기생충>의 첫 장면과 마지막에 쓰인 ‘시작’과 ‘끝’ 은 계단과 이를 오르내리는 하층민의 심리를 매우 적절히 청각화한 음악이다. ‘시작’은 영화의 첫 장면에서 카메라가 반지하 기택(송강호)의 집과 거기서 살아가는 4식구의 모습을 찾아 비출 때 배경에 흐른다. 피아노를 중심으로 거기에 살짝 얹어진 실로폰 계열의 악기만으로 이루어진 단출한 사운드이지만 이 ‘계단의 테마’에서 저음부의 피아노 선율은 의미심장하다.

  음의 도약 없이 음계를 순차적으로 오르는 저음부의 스텝와이즈stepwise 멜로디, 이 멜로디는 몇 걸음 떼었다가 멈추는 것, 그리고 계속해서 다시 오르는 것을 반복한다. 하지만 이내 몇 음정을 훌쩍 떨어뜨리며 다시 출발했던 저 낮은 저음에서 오르는 앞의 멜로디를 반복한다. 곡은 중간중간 조를 바뀌기도 하고 메이저와 마이너를 오가며 밝음과 어둠의 정서를 교차한다. 우여곡절 가다서다 계단을 올랐지만 이내 시작점으로 떨어져 다시 오르는 것을 반복하는 이 테마에서 희망과 절망의 반복으로 점철된 하층민의 삶이 겹쳐 보이는 것은 자연스럽다.

  특히 영화가 이야기를 마치고 엔딩에서 다시 이 계단의 테마가 흘러나올 때, 그것은 더 많은 생각과 감정을 몰고온다. 그것은 도대체 어찌해 볼 수 없는 ‘절망’이다. 한때 희망을 품고 지상 대저택에 발이라도 들였지만 결국 가족의 일원이 죽는 처절한 과정을 겪은 이후에도 하층민들의 위치는 변함이 없다. 일말의 오르내림이 전개되었지만 오히려 그것은 하층민끼리의 자리다툼, 바꿈일 뿐이었고 결국 계단 밑 신세임에는 변화가 없음을 ‘끝’ 음악은 일깨워준다. 특히 기우(최우식)가 세운 계획-돈을 아주 많이 벌어서 아버지가 숨어 사는 저택을 사버리겠다는-은 실현될 가망성이 없다는 것을 암시해 주는 계단의 테마 음악 ‘끝’은 그래서 더욱 섬뜩하다.

 

 

* 《쿨투라》 2019년 7월호(통권 6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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