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Theme] 21세기 어트랙션 시네마가 산출한 실재의 감각 -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7월 Theme] 21세기 어트랙션 시네마가 산출한 실재의 감각 -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
  • 김시균(매일경제 문화부 기자)
  • 승인 2019.07.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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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J엔터테인먼트

  6월 극장가에도 여러 편의 영화가 도착했지만 그 중 가장 눈여겨봐야할 것은 단연 <기생충>이다. 이 영화는 영화사 초기의 어트랙션 시네마의 흔적을 육체에 새긴 채 21세기 서사 영화와는 사뭇 다른 행로를 걷는다. 이미지의 물성, 시청각 너머 후각과 촉각으로서의 공감각적 수용 등이 그것이다.

  요컨대 <기생충>은 1910~20년대 무성영화적 운동성을 이미지로 구동하면서 액체와 기체를 통한 실재적 감각까지 산출해내는 영화다. (이와 달리 스크린 바깥에서 진동과 연기, 물줄기 따위를 유발해 감각을 자극하는 4DX 상영관은 영화적 체험의 실감과는 얼마나 유리돼 있는지.) 거기에 어느 한 장르에 기대지 않는 봉준호 특유의 장르 비틀기와 해체, 재조합으로 보는 이들로 하여금 전에 없던 오락적 재미를 충족시킨다. <기생충>이 계급 우화라는 편의적 해석에만 그쳐서는 안 되는 이유다.

  영화는 하류층 기택(송강호)네 식구가 상류층 박 사장(이선균) 저택에 차례로 진입(기생)하는 것으로 진행된다. 그 진입의 성공 과정이 극의 전반부를 이루고 있다. 나머지 절반에 해당하는 후반부는 기택네의 모략에 쫓겨난 가정부 문광(이정은)이 비 내리는 밤 현관벨을 누르고 대저택 실내로 난입하면서 촉발된다. 서사의 국면은 이로부터 급전환하는데, 경쾌한 블랙 코미디 풍이던 것이 알프레드 히치콕과 클로드 샤브롤 풍의 서스펜스 스릴러 및 호러로 재구동한다.

ⓒCJ엔터테인먼트

  첫 신의 배경은 기택(송강호)의 식구들이 사는 반 지하 집이다. 카메라는 네 켤레의 축 늘어진 양말과 창문을 잡아 이곳이 반지하임을 효율적으로 드러내 보인다. 플라스틱 빨래걸이에 메달린 양말들이 화면 왼쪽 상단을 점하고 있고, 후면에서는 네 칸으로 구획된 창문이 프레임 양끝을 채운다. 카메라가 아래로 천천히 고개를 내리면 청년 백수 기우(최우식)가 스마트폰으로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있다. 양말과 창문, 기우를 잡은 화면 구도는 정확히 영화의 마지막 숏과 대응하는데, 네 켤레 양말 아래 모스부호 해독 종이를 들고 있는 기우의 모습이 그것이다.

  <기생충>의 형식은 수많은 대구·대응 구조로 이뤄져 있다. 기택의 가족과 박 사장의 가족이 각각 네 명씩 대립쌍을 이루듯 영화는 대구와 대응 구조의 연속이다. 가난한 기택의 가족과 부유한 박 사장 가족을 담은 구도가 유사하게 반복된다. 예컨대 기우가 대저택 잔디밭에 누워 책을 읽는 숏이 있다. 구도는 다르지만 이는 박 사장의 아들 다송(정현준)이가 선글라스 렌즈로 하늘을 바라보는 숏과 대응한다.

  <기생충>의 빈자(하인)는 부자(주인)를 흉내낸다. 박 사장이 욕실에 누워 TV를 보던 숏은 이후 기정(박소담)이 욕실에 누워 TV를 보던 숏과 정확히 겹쳐진다. 기우는 그런 기정에게 “너 정말로 이 집 주인인 것 같다”고 말한다. 충숙(장혜진)과 남편 기택이 캠핑을 떠난 박 사장네 저택 쇼파에 가로로 누운 숏 또한 그렇다. 이후 박 사장과 아내 연교(조여정)가 가로로 누운 숏과 앞선 숏은 포개진다. 이 모두 흉내의 숏이라 불러도 좋을 것 같다. 그러나 하인이 주인이 될 수는 없는 일이다. 그것이 이 세계의 불문율이다. 이들 사이엔 넘어설 수 없는 계급적 간극이 놓여져 있다.

  그 간극은 크게 세 가지로 제시된다. ‘계단’이 보여주는 상승과 하강의 반복 이미지, ‘냄새’와 ‘빗물’이라는 기체적·양체적 양식이 그것이다. 박 사장 네 대저택은 바깥에서 실내로 들어서는 계단부터 1층에서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동선 등이 끊임없이 상승의 이미지로 제시된다. 반대로 기택네 집과 박 사장네 비밀 지하실은 그 자체로 반지하·지하의 하강 이미지를 구현한다. 화면 상에 펼쳐지는 이러한 상승과 하강 운동의 거듭되는 충돌은 양자의 계급적 간극을 한층 전면화한다.

ⓒCJ엔터테인먼트

  극 초중반 다송(정현준)이가 처음 발화했고 박 사장이 지속적으로 발화하는 냄새라는 경멸 섞인 단어 역시 그 간극을 더욱 심화시킨다. 그가 무말랭이 냄새, 지하철 냄새 따위로 표현하는 이 기체적 물질은 빈자와 부자의 계급적 간극을 강화하며 화면에 냄새의 실감을 불어넣는다. 그리고 이는 기체 너머 액체적 물질을 통해서도 확인이 된다. 요컨대 <기생충>에서 빗물은 서사의 국면을 전환시키는 결정적 물질이다. 이를 예기하는 것이 기택네가 대저택 잔디밭 바깥으로 나와 있는 순간이다. 하늘 위엔 불길한 검은 먹구름이 가득히 드리워져 있다. 이제 곧 비가 내리고 참극이 시작될 것이다.

  개인적으로 <기생충>에서 가장 매혹적인 시퀀스는 기택과 기정, 기우가 탈출하는 대목이었다. 대저택에서 반지하집으로 재귀하는 이 중후반부는 강렬한 운동성으로 보는 이들 감각을 사로잡는다. 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이 제창한 움직임의 어트랙션이 연상될 만큼 놀라운 활력과 실감이 산포된다. 대저택을 나온 세 사람은 빗물에 젖은 생쥐 신세로 끊임없이 걷고 뛰며 지하 세계를 향해 하강한다. 롱숏, 익스트림 롱숏 등으로 잡은 너른 화면 구도 아래 세 사람이 펼쳐 보이는 아래로의 운동이 빗물의 액체적 운동과 함께 교직한다. 프레임 후면(전면)에서 전면(후면)으로, 좌측(우측)에서 우측(좌측)으로, 위에서 아래로 이어지는 인물들의 수직·수평·사선 운동이 그칠 새 없는 빗줄기의 수직 운동과 경사로와 계단을 타고 흘러 내리는 빗물의 사선 운동 등과 몽타주된다.

  이들이 마침내 동네에 당도했을 때, 사방은 온통 침수로 아수라장이다. 기택네 반지하집은 거의 허리춤까지 물이 차올라 있다. 그 물은 박 사장네 냉장고에 들어찬 맑은 생수와는 달리 더러운 오물 더미이고 진창이다. 이 세계는 물마저도 양극화한다. 극 초반 과외자리를 얻은 기우가 박 사장네 집에 처음 들어섰을 때, 그의 눈앞으로 펼쳐지는 건 스프링쿨러에 의해 흩뿌려지는 정원 위의 물이다. 그러나 반지하집 창가 바깥에서는 만취한 취객에 의해 방뇨되는 오줌이 있을 뿐이다. 대저택 통유리 바깥으로 떨어지는 비가 기택이 경탄하듯 운치 있는 풍경을 선사한다면 하류층에겐 실존을 위협하는 재해로 작용한다. 기정이 변기 위에 앉아 천장에 감추어둔 담배를 꺼내어 물 때, 그의 하반신 아래 변기 뚜껑 틈새로는 검은 오물이 세차게 역류하고 있다. 기체(냄새)와 액체(물)가 동시에 실감을 산출해내는 순간이다.

  <기생충>의 소소한 재미를 이루는 요소 중 복선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대구·대응 구조와 더불어 극의 디테일을 이루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기억나는 대로 열거해 보자. 기택네가 시킨 피자 위에 흩뿌려지는 붉은 소스는 문정이 기침하며 버린 휴지 위로 기택에 의해 흩뿌려진다. 창문 바깥에 놓인 전봇대에서 방뇨하는 남자에게 기택·기우 부자가 물을 끼얹는 신도 그렇다. 반지하집 내부에선 기정이 스마트폰을 꺼내어 이 장면을 찍고 있다. 그러면서 “물 바다야”라고 하는데, 이 발화는 이후에 있을 침수라는 재해를 미리 암시해준다. 박 사장네가 캠핑을 떠난 자축의 밤. 충숙이 남편 기택에게 농담 삼아 바퀴벌레라고 부르는 대목도 마찬가지다. 바퀴벌레는 얼마 후 캠핑에서 돌아온 박 사장 부부 몰래 테이블 밑에 숨어 있던 기택이 빠져나오는 순간 그대로 체현된다. 검은 어둠을 깔고 엎드린 그의 검은 모습은 그 자체로 바퀴벌레의 형상의 그것이다. 첫 신에서 빵을 먹던 기택의 손가락에 의해 튕겨나가는 꼽등이 역시 그렇다. 이후 꼽등이는 한밤중 대저택을 빠져 나가려는 기우와 기정의 구부린 동작에 의해 여러번 육화된다. 빈자가 부자에게 기생 해야만 하는 ‘충蟲’의 세계. <기생충>은 기택네 가족을 벌레의 형상으로 지속해 이미지화한다. 서사가 파국으로 치닫는 것은 이 ‘충’의 처지를 충들이 망각 하는 순간에 이르러서다.

ⓒCJ엔터테인먼트

  이쯤에서 산수경석에 대해 언급해야할 것 같다. 산수경석은 이 글의 서두에 언급한 이미지의 물성을 가장 강력하게 보여주는 사물이다. 이 주물呪物적이면서도 마신魔神적인 덩어리가 기택네 가족의 운명을 주재하였노라 보는 것은 조금 과한 해석일까. 그러나 극 초반 기우의 친구 민혁(박서준)이 선물하고 가는 수석이 극 내내 불길한 느낌을 안겨 주는 것은 사실이다. 수석의 시점에서 기우를 바라보는 듯한 비인칭 숏에 이어 모여 앉은 기택네 가족 뒤편의 서랍장 위에 놓인 수석의 이미지는 그 자체로 분명 기이한 기운을 드리우고 있다. 가령 침수된 반지하집 어딘가에서 떠오르는 수석을 화면 가득 잡아낸 정면 숏은 실로 무시무시하다. “상징적”(기우는 여러번 “상징적이네”라고 말한다)으로 뵈던 사물이 더러운 반지하 동네의 오물 위로 부유하는 순간을 담은 이 숏은 영험한 사물이 악마적 물질로 변태하는 것처럼 불길하다.

  극 후반, 기택과 기우의 대화 신을 보자. 침수 대피소가 마련된 체육관에서 기택과 기우가 나란히 누워 대화를 나누고 있다. 계획을 해보았자 실현되는 것은 없으니 무계획이 낫다는 아버지가 “돌을 왜 껴안고 있는 거냐”고 묻자 아들은 답한다. “얘가 자꾸 나한테 달라 붙는 걸요. 진짜로, 얘가 자꾸 날 따라와요.” 기우의 얼굴은 마치 귀신에 홀린 듯 보인다. 자꾸 따라오는 돌을 안고 박 사장네 지하실로 내려가는 기우의 행위는 제 의지와 무관히 돌의 의지에 이끌려 내려가는 듯하다. 이후 수석은 마치 자의로 기우의 손에서 벗어나려는 것처럼 지하 계단 아래로 거칠게 굴러떨어지고 이내 근세의 손에 쥐어진다. 이어지는 건 푸르른 잔디밭을 물들이는 핏빛 아수라다(<기생충>에서 기택네 가족이 너무나 손쉽게 박 사장네 집에 진입하는 것을 두고 의구심을 갖는 이가 없지 않았다. 이 모든 걸 저 불가해한 산수경석의 악마적 의지의 산물로 본다면 어떻겠는지.).

  흥미로웠던 점 하나만 더 언급하며 이 글을 맺고 싶다. 극중엔 봉준호의 자기 오마주로 여겨지는 설정이 여러군데 발견된다. 지상과 지하라는 상하 공간 대비는 아파트 단지의 지상과 지하를 대비시킨 <플란다스의 개>(2000)를 연상케 한다. 근세라는 어수룩한 빈민에게선 향숙이로 유명한 <살인의 추억>(2003)의 광호(박노식)의 이미지가 오버랩되며, 그치지 않을 듯한 축축한 빗줄기의 액체적 화면, 딸의 죽음이라는 설정 등은 자연스레 <괴물>(2006)이 떠오른다. 모멸감을 주는 언사를 계기로 충동적 살인이 발생한다는 점에선 <마더>(2009)가, 수직선으로 표현된 세계를 가로로 눕힐 경우 수평의 계급 열차가 된다는 점에선 <설국열차>(2013)가 생각나고, 자본(돈)이 세상을 지배하는 맘몬적 세계관은 전작 <옥자>(2017)의 연장선처럼 보인다. 하지만 봉준호 의 <기생충>이 자신의 전작들을 자기 오마주하되 그 너머의 지평으로 이행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 지평엔 인간과 세계를 고민하는 작가의 짙은 고뇌가 굵은 주름들로 새겨져 있다.

 

 

* 《쿨투라》 2019년 7월호(통권 6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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