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Theme] 강원도와 뉴욕, 반응과 반영, 이쪽과 저쪽 - 〈옥자〉의 정체성에 대한 짧은 질문
[7월 Theme] 강원도와 뉴욕, 반응과 반영, 이쪽과 저쪽 - 〈옥자〉의 정체성에 대한 짧은 질문
  • 송경원(영화평론가)
  • 승인 2019.06.26 15: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옥자>는 보고 발견한 것을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어지는, 실로 영리한 영화다. 산골소녀 미자(안서현)는 미란도 그룹이 홍보를 위해 전 세계 축산농가로 분양보낸 슈퍼돼지와 함께 자랐다. 돼지에게 옥자라는 이름을 붙이고 10년 넘게 함께 자란 미자에게 옥자는 가족이나 마찬가지다. 10년 후 미란도 그룹 은 상품의 출시를 위해 옥자를 데려가고 미자는 이를 되찾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여기에 미란도 그룹 의 공장형 축산에 반대하는 환경단체 ALF(동물해방 전선)가 난입하며 상황은 걷잡을 수 없는 아수라장 이 된다. 감독은 이 영화가 산골 소녀 미자와 슈퍼 돼지 옥자 간의 러브 스토리라고 소개했다. 혹자는 <미래 소년 코난>이나 가 생각나는 영화라고 한다. 미래의 식량 문제와 대기업의 공장형 축산 산 업에 대한 냉소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리처드 플레 이셔 감독의 1976년작 <소일렌트 그린>도 연상된다. 다 맞는 이야기다. 봉준호 감독이 늘 그래왔듯 이 <옥자>는 불균질하고 섞이지 않을 것 같은 요소 들을 거침없이 뒤섞는 영화다. 봉준호의 영화는 도 저히 어울리지 않을 것처럼 보이는 대상들을 한 화 면에 우겨넣었을 때의 쾌감 위에 서 있다. 동시에 조 형미로 꽉 채워진 화면과 간곡한 메시지 사이의 결 합이 빈틈없이 딱 떨어진다는 게 봉준호 영화의 놀라운 점이다. 그런데 바로 이 모자람 없이 들어찬 의미, 조합, 배치의 정교함이 <옥자>에선 다소 기계적으로 다가왔다. 이 글은 그간 봉준호 영화에서 접하 지 못했던(정확히는 <설국열차>부터 느껴졌던) 거리감에 대한 사소한 질문에서부터 시작할까 한다.

  이 영화는 진짜 해피엔딩인가.

  첫 번째 질문. 이 영화는 해피엔딩인가. 미자는 옥자를 구했다. 애초에 미자가 원했던 건 슈퍼돼 지를 생산, 소비하는 시스템을 박살내는 게 아니 다. 그건 동물해방전선(ALF)의 목표였고 잠시 이해 가 일치한 적은 있지만 미자가 끝내 다른 길을 걷는 건 타당하고 합리적인 선택이다. 어쨌든 미자는 목 표를 달성했다. 툇마루에 미자와 할아버지가 앉아 있고 그 옆에 새끼 돼지가 있으며 퇴창 뒤로 옥자 가 이를 바라보는 라스트숏은 조형적으로 매우 아 름답다. 미자의 산속 집을 이렇게 꾸미고 초반 툇 마루에서 할아버지와 식사하는 장면을 보여준 이 유가 엔딩의 한컷에 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는 지 의심이 들 정도다. 식탁에서 출발해 다시 식탁으 로 복귀하는 이야기. 심지어 희망으로 해석될 새로 운 생명과 함께한다. 톱니바퀴마냥 딱 맞아떨어지 는 구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옥자>의 마무리 를 해피엔딩으로 받아들이고 싶진 않을 것이다. 배 금주의로 상징되는 현실에 대한 인정 혹은 굴복처 럼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관객이 깔끔한 엔딩 너 머 희망의 불씨를 발견하기 위해선 전제가 필요하 다. 바로 공장형 축산의 비인간성에 대한 각성과 분 노다. <옥자>는 벽으로 맹렬히 돌진하는 소녀의 둔 탁한 진동을 통해 부조리를 구체화시키는 영화다. 끊임없는 충돌 끝에 영화는 지옥의 목격이라는 목 표를 달성한다. 구할 수 있는 자만을 구한 소녀의 선택은 시스템의 위악을 고발하기 위한 아이러니한 장치다. 홀로코스트 같은 살육을 보고난 뒤 세상과 단절된 채 낙원에서 누리는 행복은 온전할 수 있을 까. 알 수 없다. 다만 이미지적으로 <옥자>의 엔딩 이 정교하게 구획된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는 건 분 명하다. 그래서, 이질적이다. 이 평화로운 이미지 안에서는 내적인 인지와 이상한 불안감을 찾을 수 없다. 이 장면은 기계적으로 깔끔하다. 옥자와 미자 를 위해 마련된 이상향. 그리고 단절된(혹은 단절로 만 획득할 수 있는) 해피엔딩.

  <옥자>는 봉준호가 늘 해왔고 잘 하는 것들을 집 약적으로 뭉쳐낸 영화다. 각 작품의 요소들을 총 정 리, 반복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런 의미에서 <괴물>(2006)의 엔딩과 비교하면 <옥자>의 엔딩은 다 른 차원에서 불만족스럽다. <괴물>의 엔딩은 불안 과 지옥의 연장이다. 딸도 괴물도 사라졌지만 아무 것도 바뀐 건 없다. 그래서 어둠 속에 홀로 버틴 섬 같은 한강 매점에서 총을 부여잡고 주변을 두리번 거린다. 이야기가 끝나도 강두(송강호)와 아이, 아 니 우리는 그곳에서 살아야 하기 때문에 영화 속 한 강은 우리가 두발을 디디고 선 한국 사회와 위화감 없이 겹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가 이야기를 닫지 않고 지옥을 연장하며 미국의 현실 을 장면화했던 것처럼 <괴물>은 한국에 발을 디디 고 반응하는 내셔널 시네마다. 내가 봉준호 영화를 사랑해왔던 건 그게 나의, 우리의 정서적 토대 위에 선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옥자>의 엔딩은 어떤가. 불만족의 카타르시스를 발견할 수 있을까. 시스템은 소녀에게 자본주의의 거 대한 힘과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의 한계를 잔혹하게 알려준다. 하지만 미자의 태도는 절망을 마주한 뒤 그럼에도 살아간다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절 망과 지옥은 저쪽-뉴욕과 공장에 있고 미자와 옥자는 산골, 아니 한국에 격리된다. 저쪽-뉴욕과 공장 이 고발해야 할 진실의 세계이고, 이쪽-한국의 산골 은 상당히 멀리 떨어진 안식의 장소인 셈이다. 이 거리감이야말로 영화와 현실, 봉준호와 한국 관객 사이의 거리처럼 느껴졌다. 요컨대 <옥자>는 한국인 봉준 호가 아니라 세계 시민 봉준호의 문제인식에서 출발하는 영화다. 감독이 영화에 현실을 반영한다는 건 일종의 인지반응이다. 눈앞의 끔찍한 현실을 직면한 체험과 이를 영화로 만든다는 감독의 자각이 결합하 여 이미지가 탄생한다. <옥자>에 앞서 봉준호가 목격 한 현실은 “영화를 찍기 전 프로듀서와 함께 미국 콜로라도에 있는 거대한 공장형 도살장에 간”(<옥자> 기자간담회) 경험에 근거하는 것 같다. 수천 수만 마 리 가축이 분해되어가는 광경의 체험은 우리 식탁으 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물론 우리 역시 공장형 축산 시스템의 영향력 아래 있다. 하지만 세계와 나(미자)의 맨몸이 부딪치는 고통의 감각은 저쪽 세계에서 체험되었고 상당 부분 거기에 머문다. 다시 말해 저 쪽에서의 체험(공장형 축산)과 이쪽에서의 체험(한국 의 풍경들) 사이에는 상당한 틈이 있다. 봉준호는 이번엔 이 거리를 능수능란하게 넘나들지 못한다. 아니 애초에 메울 생각이 없어 보인다.

  지역적이면서 보편적인 이야기라는 이종교배

  항상 궁금했다. <괴물>에서 영어를 알아듣지 못 하는 강두를 눕혀두고 떠드는 미 군의관들의 대화를 미국인들은 어떻게, 아니 어떤 속도로 받아들였을까. <옥자>를 보면서 반대로 그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했다. 케이(스티브 연)가 통역의 신성함을 저 버리고 짧게 축약해서 말을 전할 때, 혹은 김군(최우식)이 비정규직의 애환을 분노로 표출할 때 한국 관 객이라면 그 농담을 즉각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반 면 한국어를 모르는 관객이라면 맥락을 이해하는 데 다소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우리에 게 시차가 없는 제로 거리의 농담이 <옥자>의 세계 와 한국 관객의 거리감을 발생시킨다. 마치 외국영 화에서 한국 사회의 부조리를 반영한 장면을 보는 것 같은 익숙하고도 낯선 상황. 저쪽(트랜스 내셔널 시네마) 세계에서 이쪽(내셔널 시네마) 세계를 해설 하는 느낌. 절박한 분노를 깔고 있는 김군의 항변은 사실 <옥자>의 전체 맥락에서 벗어난 곁가지다. 때 문에 저쪽-<옥자>의 세계에서 부담 없는 농담으로 배치될 수 있다. <괴물>에서 “노 바이러스?” 한마디로 귀신같이 상황을 파악했던 강두의 어리숙한 예민 함, 봉준호의 ‘웃픈’ 엇박자와는 결도 속도도 방향도 미묘하게 다르다. 봉준호는 잘해왔던 걸 여전히 잘 한다. 대신 변명을 하나 해보자면, 딱딱하게 겉도는 뉴욕 장면이나 몇몇 외국 배우들의 기계적인 사용은 봉준호가 여전히 이쪽-한국이라는 정서적 예민함을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그가 잘하는 건 여전히 이쪽의 이야기다.

  여기서 두 번째 질문, <옥자>는 할리우드영화인 가, 한국영화인가. 한발 더 나아가서 영화는 여전히 (감독의 문화적 정서나 토대를 기반으로 한) 감독의 것인가. 국적을 잣대로 영화를 판별하는 건 이미 무 의미해진 시대지만 창작자의 정서적 지향과 뿌리는 여전히 더듬어볼 가치가 있는 것 같다. 할리우드 장르영화의 힘은 맹렬하게 전진한다는 데 있다. 멈추 지 않고 빽빽하게 진행되는 이야기가 영화의 동력 이자 존재의 이유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이야기가 전진을 멈춘 채 가만히 스며드는 것들을 허락하는 영화들도 발견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가 그랬고 <괴물>이 그랬으며 <살인의 추억>(2003)이 그랬다. 이런 영화들의 머뭇거림에는 모호함, 관조, 뉘앙스, 풍경 등 어떤 이름이든 붙일 수 있을 것이다. 왜 이야기를 멈추는가. 장소와 시대, 공기를 묘사하고 해석이 아니라 반응을 전달하기 위해서다. <살인의 추억>의 박두만(송강호)이 형언할 수 없는 눈빛으로 “밥은 먹고 다니냐”고 물었을 때 이 장면은 해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달리 말하자면 누가 어떤 맥락에서 그 눈빛을 접하느냐에 따라 어떤 방 식으로든 받아들일 수 있다. 언어와 이야기 이상의 어떤 것. 영화가 끝나도 이야기가 계속되는 이유. 하지만 할리우드 장르영화, 조금 과장하자면 세계 시민을 대상으로 한 트랜스 내셔널 시네마는 그 모 호함에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정확히 맞물려 돌 아가야 하는 이야기의 세계는 어떤 방식으로든 이야기의 문을 닫아야만 한다. <옥자> 역시 명쾌한 엔딩을 향해 나아간다. 다만 해피엔딩의 이미지는 이 쪽(한국), 불만족을 유도하는 메시지는 저쪽(뉴욕) 으로 분리되어 있는 것 같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이 지저분하고 혼란스럽게 섞였던 봉준호의 순간들이 조금 더 그립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