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Theme] 보편성의 미학, 알레고리의 정치성 -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
[7월 Theme] 보편성의 미학, 알레고리의 정치성 -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
  • 강유정(영화평론가, 강남대 교수)
  • 승인 2019.06.26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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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환 열차의 공포 왜 열차였을까?

  산업혁명과 함께 등장한 증기기 관차는 추진력의 상징물이 되었다. 피터 브룩스는 연소장치를 가진 자족적 동력기는 그래서 인간 욕 망이라는 개념의 출현과 일치한다고 말한다. 과연, 증기기관차와 욕망은 동시대적인 발명품이었다. 욕 망이 불가능한 세계가 신분사회였다면 시민이 출현 한 이후 욕망은 출세나 변신을 가능케 했다. 에너지 를 태워 달리면, 즉 욕망을 태워 달리면 그 끝에는 다른 세계가 기다릴 것이라고 믿었다.

  기차에 대한 낭만적 상상도 여기에서 시작된다. <은하철도 999>의 영원한 유랑이 우리를 아무 곳에 도 없는 유토피아로 데려다 줄 것이라는 환상도, 욕 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우리를 데려다 놓을 파국 도, 모두 인간의 내면 그리고 욕망의 발견과 함께 이뤄진 근대의 산물이었다. 자족적 동력기를 지닌 이 기계 장치는 인간을 매혹시키기 충분했다.

  기차의 등장은 흥미롭게도 인류 최초의 대중적 상업 서사인 범죄 소설(탐정 소설)의 출현과도 맞 물린다. 발터 벤야민은 기차 여행 중 탐정 소설을 읽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안전하게 끝날 것인 지 알 수 없는, 기차 여행의 공포를, 여행의 불가지 성을 범죄 소설의 단순함이 달래준다고 말이다. 탐정 소설에서 발생하는 범죄는 언제나 영특한 탐정에 의해 해결되기 때문이다. 여행이 안전하게 끝나 지 않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분명한 결말이 존재 하는 서사를 갈망하게 한다. 그렇게 서사는 발명되고, 발생한다.

  벤야민의 이런 농담은 불안을 달래는 데 있어, 명 확한 서사가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이 하수상해서 자꾸만 해찰하며 심란할 때엔 그것을 정곡으로 찌르는 ‘말’보다 오히려 대중적이며 상 업적인 서사가 도움이 되기도 한다. 해결할 수 없는 현실이 모든 게 가능한 서사로 대체되는 것이다. 기차가 탈선할 위험이 있다면 적어도 모범적 장르 소설은 서사의 규제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설국열차>의 ‘열차’는 여러 가지로 아이러니하다. 일단, <설국열차>의 배경은 미래이 다. 판타지와는 달리 제2의 빙하기라는 제법 과학 적인 설정을 제시했기에 <설국열차>는 SF로 분류되 기도 한다. 지독한 빙하기 이후, 무한한 자체 동력 을 가진 ‘열차’만이 유일한 생존구역으로 남게 된다.

 

  문제는, 이 기차가 우주를 유영하는 미래의 운송 수단이 아니라 매우 고전적인 형태의 운송수단이라는 점이다. 즉, 정해진 레일을 반복해서 움직이는 것 외에는 항로가 없다. 끊임없이 달리지만, 목적 지도 없고, 도착지도 없다. 휴식도 없다. 도착 없는 여행이라는 점은 ‘기차’를 감옥과 유사한 장소로 전 도시킨다. 이는 미래이지만 낭만도 기대도 없는 디 스토피아적 설정이라는 것과도 상통한다. 그들에 게 레일은 탈선 불가능한 구속과도 같다. 멈추지 않 는 욕망이 공포스러운 것처럼 멈출 수 없는 기차 역시 두렵다.

  두 번째 아이러니는 기차의 물리적 특성과 연결 된다. 기차는 칸과 량으로 나뉘어 서로 연결되는 구 조를 가지고 있다. 각각의 기차 칸은 1등석과 꼬리 칸까지 계층별로 분리되어 있다. 앞 칸으로의 이동 은 절대 불가능하다. 잠깐의 여행일 때, 이 분리는 차별이 아니라 평등처럼 여겨진다. 우리는 KTX나 비행기를 타고 이동할 때, 더 많이 지불한 만큼 더 많이 누리는 것을 합리적으로 여긴다.

  하지만, 이 열차가 평생을 순환한다는 점에서 이 차별적 평등은 합리적이지 않은 제도가 된다. 우리 가 지금 꽤나 옳다고 믿고 있는 어떤 체제가 영화 속에서는 매우 불합리한 것으로 묘사된다. 엄밀히 말해, 사람을 그 지불 대가대로 구분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그 구분을 매우 당연하게 여 기며 또 살고 있다. 이 괴리감이 바로 두 번째 아이러니의 근간이다.

  기차라는 폐소 공간

  봉준호 감독은 ‘기차’를 일종의 폐소 공간으로 사용한다. 바깥은 꽁꽁 얼어붙은 지옥이며 앞 칸으로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동 불가라는 점에서 ‘기차’는 전근대적 사회의 불평등에 대한 알레고리 로 읽히곤 했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이동 금지는 근대 이전의 패러다임이었다는 사실이다. 기차의 주인이자 설계자인 윌포드는 ‘언어’와 ‘행동’으로 이 동을 금지한다. 이동을 원해서도 안 되며 그것을 행 하려 할 때, 윌포드는 자신의 수하를 풀어 피의 보복을 행한다.  

  중요한 것은 이 전근대적 세상에 대한 비유를 지금 현재의 것으로 읽어냈던 ‘우리’의 시선이다. 분 명 지금 자본주의의 세계는 앞 칸으로의 이동을 허 용하고 있다. 즉, ‘언어’, 법으로 규제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동을 현실적 불가능으로 받 아들이고 있다. 차라리 독재적인 법으로 금지된 설국열차의 풍경이 더 사실적이며 노골적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가상의 현실에서 출발한 <설국열차>에서 후기 자본주의 사회가 선사한 개방성의 역설을 읽는 것은 <설국열차>가 관객에게 어떤 방식으로 소비되고 해석되었는지를 충분히 짐작케 한다. 따라서, 꼬리칸은 수직 구도로 그려질 때엔 맨 밑바닥에 놓이는 하위계층이 되며 맨 앞 칸은 피라미드의 꼭짓점으로 읽힌다. 수직적 구도로 이야기되던 후기 자본주의 의 구조가 평면화될 때, 그것이 바로 <설국열차>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설국열차>는 곧 혁명의 열차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열차의 에너지를 개인의 욕망의 서사 와 겹쳐 보았을 때, 이야기는 또 달라진다. 마치 시민 사회에 막 출현한 『적과 흑』의 줄리앙 소렐이 상류 계층과의 루머를 통해 신분 상승을 꿈꾸었듯이 어쩌면 커티스라는 혁명적 인물 안에 욕망의 씨앗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로 말이다. 만일, 앞 칸까지가 그것의 무의미함을 밝혀낸다면 커티스는 일종의 실존적 주체가 될 것이며, 한 칸 한 칸에 부여된 금지를 깨고 자유로운 선택을 이끌어낸다면 그는 혁명의 주체로 완성될 것이다. <설국열차>는 근대와 함께 성장한, 다양한 인문학적 해석을 감당한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폐소 공간을 통해 창조한 봉준호의 미장센들이다. 나뉘어진 각각의 폐소 공간은 기이한 리듬감을 선사한다. 그리고 이 미장센들은 <설국열차>가 단순한 배경이 아 니라 세계이자 일종의 관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그곳은 그냥 ‘장소’가 아니라 일종의 ‘사건’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커티스가 한 칸 한 칸 정복해 나감으로써 이야기는 진행되고, 이야기는 각 칸마다 서사의 틀을 바꾸어 나간다. 그 공간은 승객의 요구에 의해 생산 된 장소가 아니라 장소가 있기에 승객의 요구가 발 생하는 공간이다. 이미, 열차는 승객의 열망이나 욕망을 어딘가로 도착하게 하는 매체가 아니라 그 몸에 맞춰 사람들의 욕망을 생산해 내는 유기체가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것들이 결핍된 꼬리 칸 사람들 이 여전히 욕망을 가진 주체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 하다. 앞 칸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체 마약, 크로놀에 중독되어 있다. 이는 그들이 이미 욕망을 잃어 버렸음을 보여준다. 관습적 환멸은 기계 장치를 유지하는 윌포드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는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금지를 제안하고, 공간의 이동을 제 한한다. 환대받지 못하고 결핍된 자들이야말로 여 전히 욕망하는 주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윌포 드는 자신의 세계를 지탱하기 위해 일부러 금지를 행한다. 금지야말로 욕망을 불러일으키기에, 폐소 된 공간이 기차의 순환을 유지하는 역설, 결국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은 폐소와 금지이다.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열차’

  최하위 계층의 지도자가 맨 앞까지 가서 지도자 와 대면한다는 점에서 <설국열차>는 계급투쟁의 역 사를 상기시키곤 한다. 흥미로운 사실 중 하나는 <설국열차>가 무성애의 공간이라는 사실이다. 앞으로의 이동을 꿈꾸는 커티스, 그리고 그의 동료와 대부가 존재하지만 그가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남궁 민수 나 그의 딸 사이도 마찬가지이다.

  <설국열차>는 철저히 개체의 생존 본능에 의해 유지되는 무성애의 공간이다. 심지어, <설국열차> 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매우 가학적이며 관료적일 뿐이다. 이는 원작과 차별화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원작 <설국열차>에서 주인공은 반복 순환의 무료함을 버티고 살아 있음의 확인을 위해 여성 동료와 섹스를 나눈다.

  이는 한편, <설국열차>의 ‘열차’가 매우 이념적이 며 관념적인 공간이라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각각의 의미소에 맞게 배치된 인물들은 철저한 서사의 틀 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열차를 점령할 것 이냐 아니면 열차를 파괴하고 밖으로 나갈 것이냐는 질문의 대결도 이념적이다.

  이 이념성과 정형성은 기존의 봉준호 스타일과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봉준호의 대표작인 <살인 의 추억>이나 <마더>, <괴물>은 구체성에서 그 미학을 길어내는 작품들이다. 실제 사건과 허구, 실제 한강과 상상의 한강 사이의 괴리 사이에 봉준호는 구체성을 드러냈다. 이는 결국 봉준호만이 해낼 수 있는 매우 한국적인 영상 사회학의 일면이기도 했다.

  <설국열차>의 관념성은 보편성과 통하기도 한다. 해외 원작, 다국적 배우와 이중 언어로 이루어진 <설국열차>은 그러므로 보편적 알레고리화를 지향한 셈이다. 결국, <설국열차>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해설, 평가들은 이 알레고리화의 성공을 증명 한다. 보편성은 구체화 작업과는 정반대로 이루어 진다. 오히려 많은 세부들을 도려냄으로써 인물과 사건, 배경은 어떤 정황에도 맞아떨어질 수 있는 상징이 된다.

  <설국열차>는 그러므로, 언제나 ‘사건’이 될 만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존재 방식을 결정짓도록 강요하는 게 ‘사건’이라면, <설국열차>는 공간과 장소를 달리 할 때마다 새로 운 존재 방식을 요구할 것임에 분명하다. 그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 들이냐에 따라 드러나는 것은 설국열차의 색깔이 아니라 바로 그것을 해석 하는 사람, 그 자체이다. 풍부한 해석과 상징을 모두 포괄하는 작품, 그래서 <설국열차>는 문제적 작품임에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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