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Theme] 보편성의 미학, 알레고리의 정치성 -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
[7월 Theme] 보편성의 미학, 알레고리의 정치성 - 봉준호 감독의 〈설국열차〉
  • 강유정(영화평론가, 강남대 교수)
  • 승인 2019.07.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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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순환 열차의 공포 왜 열차였을까?

  산업혁명과 함께 등장한 증기기관차는 추진력의 상징물이 되었다. 피터 브룩스는 연소장치를 가진 자족적 동력기는 그래서 인간 욕망이라는 개념의 출현과 일치한다고 말한다. 과연, 증기기관차와 욕망은 동시대적인 발명품이었다. 욕망이 불가능한 세계가 신분사회였다면 시민이 출현한 이후 욕망은 출세나 변신을 가능케 했다. 에너지를 태워 달리면, 즉 욕망을 태워 달리면 그 끝에는 다른 세계가 기다릴 것이라고 믿었다.

  기차에 대한 낭만적 상상도 여기에서 시작된다. <은하철도 999>의 영원한 유랑이 우리를 아무 곳에도 없는 유토피아로 데려다 줄 것이라는 환상도,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가 우리를 데려다 놓을 파국도, 모두 인간의 내면 그리고 욕망의 발견과 함께 이뤄진 근대의 산물이었다. 자족적 동력기를 지닌 이 기계 장치는 인간을 매혹시키기 충분했다.

  기차의 등장은 흥미롭게도 인류 최초의 대중적 상업 서사인 범죄 소설(탐정 소설)의 출현과도 맞물린다. 발터 벤야민은 기차 여행 중 탐정 소설을 읽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안전하게 끝날 것인지 알 수 없는, 기차 여행의 공포를, 여행의 불가지성을 범죄 소설의 단순함이 달래준다고 말이다. 탐정 소설에서 발생하는 범죄는 언제나 영특한 탐정에 의해 해결되기 때문이다. 여행이 안전하게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분명한 결말이 존재하는 서사를 갈망하게 한다. 그렇게 서사는 발명되고, 발생한다.

  벤야민의 이런 농담은 불안을 달래는 데 있어, 명확한 서사가 도움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세상이 하수상해서 자꾸만 해찰하며 심란할 때엔 그것을 정곡으로 찌르는 ‘말’보다 오히려 대중적이며 상업적인 서사가 도움이 되기도 한다. 해결할 수 없는 현실이 모든 게 가능한 서사로 대체되는 것이다. 기차가 탈선할 위험이 있다면 적어도 모범적 장르 소설은 서사의 규제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런 점에서 <설국열차>의 ‘열차’는 여러 가지로 아이러니하다. 일단, <설국열차>의 배경은 미래이다. 판타지와는 달리 제2의 빙하기라는 제법 과학적인 설정을 제시했기에 <설국열차>는 SF로 분류되 기도 한다. 지독한 빙하기 이후, 무한한 자체 동력을 가진 ‘열차’만이 유일한 생존구역으로 남게 된다.

ⓒCJ엔터테인먼트

  문제는, 이 기차가 우주를 유영하는 미래의 운송 수단이 아니라 매우 고전적인 형태의 운송수단이라는 점이다. 즉, 정해진 레일을 반복해서 움직이는 것 외에는 항로가 없다. 끊임없이 달리지만, 목적지도 없고, 도착지도 없다. 휴식도 없다. 도착 없는 여행이라는 점은 ‘기차’를 감옥과 유사한 장소로 전도시킨다. 이는 미래이지만 낭만도 기대도 없는 디스토피아적 설정이라는 것과도 상통한다. 그들에게 레일은 탈선 불가능한 구속과도 같다. 멈추지 않는 욕망이 공포스러운 것처럼 멈출 수 없는 기차 역시 두렵다.

  두 번째 아이러니는 기차의 물리적 특성과 연결된다. 기차는 칸과 량으로 나뉘어 서로 연결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각각의 기차 칸은 1등석과 꼬리 칸까지 계층별로 분리되어 있다. 앞 칸으로의 이동은 절대 불가능하다. 잠깐의 여행일 때, 이 분리는 차별이 아니라 평등처럼 여겨진다. 우리는 KTX나 비행기를 타고 이동할 때, 더 많이 지불한 만큼 더 많이 누리는 것을 합리적으로 여긴다.

  하지만, 이 열차가 평생을 순환한다는 점에서 이 차별적 평등은 합리적이지 않은 제도가 된다. 우리가 지금 꽤나 옳다고 믿고 있는 어떤 체제가 영화 속에서는 매우 불합리한 것으로 묘사된다. 엄밀히 말해, 사람을 그 지불 대가대로 구분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런데, 우리는 그 구분을 매우 당연하게 여기며 또 살고 있다. 이 괴리감이 바로 두 번째 아이러니의 근간이다.

ⓒCJ엔터테인먼트

  기차라는 폐소 공간

  봉준호 감독은 ‘기차’를 일종의 폐소 공간으로 사용한다. 바깥은 꽁꽁 얼어붙은 지옥이며 앞 칸으로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동 불가라는 점에서 ‘기차’는 전근대적 사회의 불평등에 대한 알레고리로 읽히곤 했다. 분명히 해야 할 것은 이동 금지는 근대 이전의 패러다임이었다는 사실이다. 기차의 주인이자 설계자인 윌포드는 ‘언어’와 ‘행동’으로 이동을 금지한다. 이동을 원해서도 안 되며 그것을 행하려 할 때, 윌포드는 자신의 수하를 풀어 피의 보복을 행한다.  

  중요한 것은 이 전근대적 세상에 대한 비유를 지금 현재의 것으로 읽어냈던 ‘우리’의 시선이다. 분명 지금 자본주의의 세계는 앞 칸으로의 이동을 허용하고 있다. 즉, ‘언어’, 법으로 규제하고 있지 않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동을 현실적 불가능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차라리 독재적인 법으로 금지된 설국열차의 풍경이 더 사실적이며 노골적이라고 여기는 것이다.

  가상의 현실에서 출발한 <설국열차>에서 후기 자본주의 사회가 선사한 개방성의 역설을 읽는 것은 <설국열차>가 관객에게 어떤 방식으로 소비되고 해석되었는지를 충분히 짐작케 한다. 따라서, 꼬리칸은 수직 구도로 그려질 때엔 맨 밑바닥에 놓이는 하위계층이 되며 맨 앞 칸은 피라미드의 꼭짓점으로 읽힌다. 수직적 구도로 이야기되던 후기 자본주의의 구조가 평면화될 때, 그것이 바로 <설국열차>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설국열차>는 곧 혁명의 열차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열차의 에너지를 개인의 욕망의 서사와 겹쳐 보았을 때, 이야기는 또 달라진다. 마치 시민 사회에 막 출현한 『적과 흑』의 줄리앙 소렐이 상류 계층과의 루머를 통해 신분 상승을 꿈꾸었듯이 어쩌면 커티스라는 혁명적 인물 안에 욕망의 씨앗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로 말이다. 만일, 앞 칸까지가 그것의 무의미함을 밝혀낸다면 커티스는 일종의 실존적 주체가 될 것이며, 한 칸 한 칸에 부여된 금지를 깨고 자유로운 선택을 이끌어낸다면 그는 혁명의 주체로 완성될 것이다. <설국열차>는 근대와 함께 성장한, 다양한 인문학적 해석을 감당한다.

ⓒCJ엔터테인먼트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폐소 공간을 통해 창조한 봉준호의 미장센들이다. 나뉘어진 각각의 폐소 공간은 기이한 리듬감을 선사한다. 그리고 이 미장센들은 <설국열차>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세계이자 일종의 관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그곳은 그냥 ‘장소’가 아니라 일종의 ‘사건’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커티스가 한 칸 한 칸 정복해 나감으로써 이야기는 진행되고, 이야기는 각 칸마다 서사의 틀을 바꾸어 나간다. 그 공간은 승객의 요구에 의해 생산된 장소가 아니라 장소가 있기에 승객의 요구가 발생하는 공간이다. 이미, 열차는 승객의 열망이나 욕망을 어딘가로 도착하게 하는 매체가 아니라 그 몸에 맞춰 사람들의 욕망을 생산해 내는 유기체가 된 것이다.

  그런 점에서, 모든 것들이 결핍된 꼬리 칸 사람들이 여전히 욕망을 가진 주체라는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앞 칸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대체 마약, 크로놀에 중독되어 있다. 이는 그들이 이미 욕망을 잃어 버렸음을 보여준다. 관습적 환멸은 기계 장치를 유지하는 윌포드에게서도 발견된다. 그는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금지를 제안하고, 공간의 이동을 제한한다. 환대받지 못하고 결핍된 자들이야말로 여전히 욕망하는 주체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윌포드는 자신의 세계를 지탱하기 위해 일부러 금지를 행한다. 금지야말로 욕망을 불러일으키기에, 폐소된 공간이 기차의 순환을 유지하는 역설, 결국 시스템을 유지하는 것은 폐소와 금지이다.

  사회적 현상으로서의 ‘열차’

  최하위 계층의 지도자가 맨 앞까지 가서 지도자 와 대면한다는 점에서 <설국열차>는 계급투쟁의 역사를 상기시키곤 한다. 흥미로운 사실 중 하나는 <설국열차>가 무성애의 공간이라는 사실이다. 앞으로의 이동을 꿈꾸는 커티스, 그리고 그의 동료와 대부가 존재하지만 그가 사랑하는 사람은 없다. 남궁민수나 그의 딸 사이도 마찬가지이다.

  <설국열차>는 철저히 개체의 생존 본능에 의해 유지되는 무성애의 공간이다. 심지어, <설국열차> 에 등장하는 여자들은 매우 가학적이며 관료적일 뿐이다. 이는 원작과 차별화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원작 <설국열차>에서 주인공은 반복 순환의 무료함을 버티고 살아 있음의 확인을 위해 여성 동료와 섹스를 나눈다.

ⓒCJ엔터테인먼트

  이는 한편, <설국열차>의 ‘열차’가 매우 이념적이며 관념적인 공간이라는 사실을 의미하기도 한다. 각각의 의미소에 맞게 배치된 인물들은 철저한 서사의 틀 안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열차를 점령할 것이냐 아니면 열차를 파괴하고 밖으로 나갈 것이냐는 질문의 대결도 이념적이다.

  이 이념성과 정형성은 기존의 봉준호 스타일과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봉준호의 대표작인 <살인의 추억>이나 <마더>, <괴물>은 구체성에서 그 미학을 길어내는 작품들이다. 실제 사건과 허구, 실제 한강과 상상의 한강 사이의 괴리 사이에 봉준호는 구체성을 드러냈다. 이는 결국 봉준호만이 해낼 수 있는 매우 한국적인 영상 사회학의 일면이기도 했다.

  <설국열차>의 관념성은 보편성과 통하기도 한다. 해외 원작, 다국적 배우와 이중 언어로 이루어진 <설국열차>은 그러므로 보편적 알레고리화를 지향한 셈이다. 결국, <설국열차>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해설, 평가들은 이 알레고리화의 성공을 증명한다. 보편성은 구체화 작업과는 정반대로 이루어진다. 오히려 많은 세부들을 도려냄으로써 인물과 사건, 배경은 어떤 정황에도 맞아떨어질 수 있는 상징이 된다.

  <설국열차>는 그러므로, 언제나 ‘사건’이 될 만한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만일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존재 방식을 결정짓도록 강요하는 게 ‘사건’이라면, <설국열차>는 공간과 장소를 달리 할 때마다 새로운 존재 방식을 요구할 것임에 분명하다. 그 ‘사건’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이냐에 따라 드러나는 것은 설국열차의 색깔이 아니라 바로 그것을 해석하는 사람, 그 자체이다. 풍부한 해석과 상징을 모두 포괄하는 작품, 그래서 <설국열차>는 문제적 작품임에 분명하다.

 

 

* 《쿨투라》 2019년 7월호(통권 6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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