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Theme] 모성, 과잉과 광기의 극단에서…
[7월 Theme] 모성, 과잉과 광기의 극단에서…
  • 유지나(영화평론가, 동국대 교수)
  • 승인 2019.06.26 15: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 여자가 춤을 춘다. 갈대가 바람결에 흩날리는 넓은 벌판. 그 벌판 가운데 머쓱하니 서있던 여자 가 조금씩 어색하게 몸을 흔들다가 팔을 올리고 어깨를 들썩이며 몸을 흔든다. 그러다가 한 손을 올려 얼굴을 가린다. 팔 밑에 드러나는 입술이 벌어지면서 이빨도 슬쩍 드러난다. 그녀는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고 웃는 것일까? 벌판에서 펼쳐지는 한 여자의 몸짓. 광대한 배경속에서 인물의 내면을 압축적으 로 드러내는 아나모픽 렌즈의 효과적 기능이 살아 나는 이미지이다. 그렇게 재현된 이 여인은 실성한 것처럼 보이면서도 속내 응어리를 바람결에 풀어내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살풀이처럼 풀어내는 그녀의 사연은 무엇일까? 그런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면서 영화가 시작된다.

  영화의 결말부 또한 그녀의 춤 장면으로 수미일관 구조를 보여준다. 마지막 춤에선 그녀만의 의식이 동반된다. 그 무대는 관광버스 안이다. (도준의) 엄마인 그녀는 침이 담긴 꽃무늬 철통을 열고 꽃무 늬 아롱진 치마를 걷어 올린다. 그녀는 자신의 허벅 지 어딘가 침자리를 찾아내 그곳을 침바늘로 찌른 다. (이 부분은 독수공방 여인네들이 허벅지를 찌 르며 성욕을 다스렸다는 전래담을 연상시키기도 한 다.) 그리고 그녀는 버스 통로로 나가 무리 중에 묻 혀 몸을 흔든다. 아래위로 흔들리는 버스의 움직임 과 좌우로 흔드는 카메라가 결합하면서 불안정한 프레임 속에 그녀 이미지가 묻혀진다. 첫 장면에서 마치 세상밖에 홀로 떨어진 처연한 새처럼 보이던 그녀의 몸짓은 이제 무리 속에 묻혀 흡수된다. 버스 안을 통과하는 작열하는 석양빛이 일군의 엄마들/ 아줌마들을 무리진 그림자로 녹여낸다.

  홀로 추는 춤에서 시작하여 군무로 마감하는 <마 더>는 춤/몸짓의 살풀이같은 격정을 엄마라는 캐릭 터에 응축시키고 풀어내며 드라마를 구축해낸다. 우리가 기억하는 봉준호는 이렇듯 블랙유머로 무장 한 명민한 세상 관찰을 약재를 써는 작두질의 ‘써걱’ 소리 만큼이나 섬찟하게 드러내 보인다. <괴물>이 나 <살인의 추억>, 그리고 <플란더스 개>에 비해 보 다 압축된 배경과 사건 속에서 보다 집요하게 인물 들, 특히 한 인물/엄마를 탐색하고, 그녀를 통해 세 상을 들여다 본다. 드라마의 토대인 엄마란 존재, 그 정체성을 풀어내는 모성애란 덕목, 그것이 태생 적인 것인지 혹은 사회적으로 부여된 것인지, 이중적으로 투영되면서 내러티브를 짜나간다.

  엄마가 자식에게 헌신하는 내러티브는 한국영화 멜로드라마 장르 속에 ‘모성애 코드’를 형성해 왔다. <말아톤>이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면, <마요네즈>는 그런 모성애 코드를 전복해 보이기도 한다. 그런 좌표 위에 놓고 보면 <마더>는 이중적이다. 겉으로는 모자란 자식을 위해 헌신하는 절박한 모성애 드라 마 같지만, 그 속에 섬찟한 구석이 포진한 악착같은 생존담의 흔적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자신을 위한 생존이 아들의 엄마로서 생존과 분리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여성 정체성의 내면적 분열을 보여준다.

  도준은 28세 청년이지만 여전히 엄마의 보호가 필요한 모자란 아들로 보인다. 여자랑 자는 것과 엄 마랑 자는 것을 동일하게 표현하는 도준은 동네 아 이들에게조차 놀림감이 된다. 자기가 한 일과 남이 한 일조차 헷갈리는 박약한 기억력 탓에 친구가 깬 벤츠의 차창 거울도 자기가 한 것으로 여겨 덤탱이를 쓰기도 한다. 살인사건 현장에서도 마치 살인범 인양 어수룩한 재현을 하면서, 몰려든 사람들 앞에 서 손을 흔들며 영웅행세를 하는 그는 분명 엄마 없이는 살아남을 방법이 없는 부족한 아들이다. 간혹 도준은 엄마의 과잉보호에 반항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마마보이로 살아 남아가야 할 약자이다.

  그런 아들이기에 살인누명을 벗겨주려 스스로 살인자가 될 수밖에 없는 지극한 모성애가 정당화 된다. 그러나 그 속에는 과도한 관계욕망과 광기가 내재되어 있다. 노상방뇨를 하는 아들에게 한약사발 을 들이밀며 먹이는 엄마의 모습이 바로 그런 모성애 코드 과잉을 보여준다. 남은 한약 사발을 들고 아들의 노상방뇨 흔적을 지우는 엄마의 모습은 세상에서 떠받드는 모성애의 비루한 이면을 블랙유머 장치를 통해 드러내 보인다. 면회시 아들이 기억해 낸 다섯 살 때 겪은 엄마가 시도했던 동반자살의 기억은 어떤가? 사회적 육아 개념이 부재한 이곳에서 가난한 싱글맘에게 강요되고 칭송되는 모성애는 죽음의 욕망을 불러 일으킬 정도로 절박하다. 문제해결 방도를 도모할 여지가 없는 여자들은 모성애 차원에서 아들 갖기 욕망 속으로 도피한다. 아들의 엄 마되기로 강렬하게 주입된 가부장적 욕망은 여성 정체성의 분열을 광기로 대체하고, 그걸 모성애라고 칭송한다. (이 부분에서 <밀양>의 주인공역인 엄마 캐릭터가 떠오르는 건 우연이 아닐 것이다). 게다가 여기에서 모성애는 부성부재를 전제로 한다. 도준의 엄마만 그런게 아니라 사진관 여자도 죽은 아정도 마찬가지이다. 누구에게도 어버지는 없다. 부성이 박탈된 모성의 과잉이다. 야매로 침을 놔주는 엄마가 사진관 여자에게 아들 낳는 침을 놔 주는 장면은 그런 의미에서 의미심장하다. 그런 효력을 갖춘 침은 부재하지만 그런 침의 존재는 가부장적 욕망의 기호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과연 도준은 그런 지극한 모성이 필요한 모자란 아들일까? 처음에는 그렇게 보이지만 결정 적으로 엄마에게 침통을 건네주는 도준은 어떤가? 꽃미남 원빈의 외모를 최대한 어수룩하게 분장한 도준은 사슴같은 맑은 눈을 감추고 멍한 표정을 지으며 어수선한 머리모양에 최대한 모자란 티를 내지만 어딘가 인위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원 빈의) 연기력 부족(어쩔 수 없이 김혜자에 비해)일 수도 있지만, 가진 것 없는 자가 살아남기 위한 술 책이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막판에 그가 잿더 미에서 찾아낸 엄마의 침통을 건네주며 던지는 충언, “이런걸 막 흘리고 다니면 어떡해”는 엄마와 관 객을 어안이 벙벙하게 만든다. 바보티를 내며 살아 남아 권좌에 오른 바보왕 이야기, 똑똑하면 다치니까 일부러 하는 바보짓거리...아무튼 도준이 건네준 침통과 조용히 속삭이는 조언에 경악한 엄마의 망연자실한 태도처럼 풀릴만했던 드라마는 다시 미궁에 빠지면서 엄마는 침 기운을 받아 춤을 춘다.

  도준과 엄마의 관계를 드러내는 또 다른 축에 존재하는 아정과 할머니의 관계는 역설적으로 모성의 이면을 대변한다. 할머니와 사는 아정은 ‘쌀떡 순이’로 불리운다. 쌀주면 떡친다, 라는 뜻의 치욕적인 이 별명은 토속 에로붐을 조장한 <뽕>의 이미 숙이 구사했던 생존술이지만, 봉준호는 그런 생존 술을 눈요기 향락으로 재현할 의도가 없는 냉정한 관찰자이다. 마치 앞날을 예견하듯 자신과 성관계를 맺은 남자들을 핸드폰 사진으로 기록한 아정은 세상의 비루함에 증거를 남긴 셈이다. 그녀가 몸으로 벌어온 쌀로 연명하는 치매 노인 할머니는 또 어떤가? 핸드폰과 막걸리를 바꿔 먹을 생각에 가득찬 막걸리 중독 할머니는 미쳤기에 가련한 손녀에 대한 모성애가 없는 것일까? 아들의 무죄를 호소하러 아정의 장례식장에 갔다가 몰매를 맞는 엄마 앞에 나타난 할머니는 모두에게 막걸리를 끼얹으며 이 소동을 일단락 짓는다. 살인범을 찾는 증거가 담긴 아정의 핸드폰을 찾기 위해 엄마는 할머니를 돈으로 유혹한다. 미친 할머니같지만 막걸리와 쌀이 필요한 생존본능으로 그녀는 비밀스런 기억을 간직하 고 있다. 할머니는 없다고 잡아떼던 핸드폰을 쌀 속 에서 꺼내준다. 할머니는 손녀를 쌀/막걸리를 벌어 다 주는 피붙이로 여기는 이기적인 존재, 비정한 모성을 대변한다. 그건 자식, 특히 딸을 팔아 먹는 비효심으로 대체한 효녀 심청이나 바리데기 신화들 그리고 역사적으로 존재해 온 증언 들과 무관하지 않다. 그리하여 <마더>를 내건 이 영화에서 모성은 도준의 엄마에게만 그치지 않는다. 미쳐버린 할머니, 아들 낳기를 원하는 사진관 여자, 살인범으로 몰린 또 다른 바보 종팔의 부재하는 엄마, 이 모두를 가로지르는 모성, 엄마라는 존재 의미와 개인/여성의 정체성에 대해 질문하게 만드는 것이 <마더>에 은닉된 앙금이다.

  그 앙금은 봉준호 영화세상이 바라보는 지리멸렬 함의 잔영이다. <마더>가 보여주는 세상은 그의 전작 들처럼 그리고 무엇보다 원초적으로 그의 단편영화 <지리멸렬>처럼 비루하고 부조리하다. 가진 자의 속내는 심각하게 탐구할 필요조차 없이 슬쩍 들춰지기만 해도 속물스럽기 그지 없다. 소위 교수, 검사, 변 호사, 공무원, 언론인등 사회지도층이란 이들은 직위를 이용해 앞에서는 폼을 잡고 대접받으며 뒤에서는 받아먹기 바쁜 타락한 인물들이다. <마더>의 골프 장에 등장하는 교수 일당은 <지리멸렬>에 등장하는 기득권 인물들과 유사하다. 룸살롱에서 어린 여자 들을 주물럭대며 병원장 검사와 히히덕대는 변호사의 모습도 낯익다. 기득권층의 이런 비루한 모습은 카메라/엄마의 시선으로 다큐처럼 담담하게 관찰된 다. 지리멸렬한 부조리한 세상에서 가진게 없어 만만한 이들은 억울한 일을 당하기 십상이다. 그래도 이들은 노골적으로 분노하고 투쟁하기보다 문제의 핵심을 빗겨가며 어수룩하게 살아남는다. 이른바 부조리한 세상을 돌파하는 바보인척하기 생존술이다. 이런 생존술을 봉준호는 특유의 블랙유머를 통해 흥미로운 관찰로 변화시켜 나간다. 그런 흥미로움 속에, “당신은 이런 세상을 어떻게 보는가? 당신은 이런 부조리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 라는 화두를 던져놓으면서.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