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Theme] 재난영화가 아니라 노골적인 정치영화, 〈괴물〉
[7월 Theme] 재난영화가 아니라 노골적인 정치영화, 〈괴물〉
  • 강성률(영화평론가, 광운대 교수)
  • 승인 2019.07.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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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괴물>에 대해 아직도 할 이야기가 있을까? 타임 머신을 타고 잠시 2006년으로 돌아가 보자. 1300만 명의 관객을 동원한 이 영화에 대해, 그 뜨거웠던 여름 내내 언론과 인터넷에서는 온갖 이야기들을 쏟아냈다. 이런 상황에서 지금 <괴물>에 대해 쓴다는 것은 잘 해봐야 뒷북치기이고, 자칫 잘못하면 동어반복이거나 심지어 표절이라는 소리를 들어야 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2006년의 영화 가운데 단 한 편을 꼽으라면, 그리고 봉준호의 대표작을 들라면, <괴물>은 결코 빼놓을 수 없다. 엄청난 흥행도 흥행이지만, 영화가 담고 있는 정치성도 새롭거니와, 무엇보다 <괴물>에는 봉준호가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가장 포괄적이고도 노골적으로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약간 과장하자면, <괴물> 이후 봉준호의 영화는 <괴물>의 하위 버전에 불과하다.

  <괴물>에서 눈여겨볼 것 가운데 하나는 영화에 등장하는 괴물이다. 촌스럽고 직설적인 제목처럼, 영화에는 당연히 괴물이 등장한다. 그런데 그 괴물은 고질라나 용가리처럼 온 도시를 마비시킬 만큼 엄청난 힘을 가진 ‘울트라슈퍼캡숑!’ 괴물이 아니다. 단지 총 몇 방에 도망을 가는 ‘나약한’(?) 괴물이다. 다리를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리에 매달려 유연하게 덤블링을 하는 ‘부드러운’ 괴물. 농담조로 말하자면, 영화 속 괴물은 불쌍하고 외롭고 쓸쓸한 존재다. 영화 초반에 이미 드러난 것처럼, 괴물은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미군의 독극물 때문에 탄생했다. 멀쩡한 양서류가 변형에 변형을 거듭하며 흉측한 괴물로 변모한 것. 끔찍한 괴물이 풍찬 노숙하면서 한강변에 살아가지만, 곧 존재가 드러나면서 쫓기는 신세가 되고 만다. 더구나 존재하지도 않는 바이러스 유언비어 때문에 순식간에 ‘악의 축’이 되어버렸다. 결국 괴물은 오랜만에 먹잇감이 풍부한(?) 둔치로 나갔다가 세계보건기구의 조치와, 화염병과 신나의 연합공격에 살해당한다. 괴물 의 입장에서 보면 본의 아니게 흉측하게 변형되어 지탄을 받다가 죽는, 슬픈 존재인 것이다.

ⓒ쇼박스

  여기서 의문이 발생한다. 왜 봉준호는 이런 괴물을 등장시킨 것일까? 다시 말해, 절대적 악의 존재인 괴물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불쌍하고 상대적으로 나약한 괴물을 등장시킨 것일까? 그런데 더 의문인 것은 왜 그런 괴물 때문에 국제적인 메트로폴리탄 서울과 남한은 완전히 마비되어버린 것일까? 그리고 실사로 기록한 한강의 ‘진짜’ 다리와 도시 모습은, 왜 그리도 ‘가짜’ 괴물과 잘 어울리는 것일까? 마지막 의문. 왜 이런 영화를 1300만 명이라는 관객이, 이 불법 다운로드 시대에 극장에서 본 것일까? 영화 <괴물>의 핵심은 아마 여기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봉준호 감독이 한강에 나타난 괴물을 소재로 영화를 만든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 나는 그가 괴물보다는 괴물을 둘러싼 정치성 강한 영화를 만들 것으로 추측했는데, 그 추측은 적중했다. 그전까지 봉준호가 만든 영화를 보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가 연출한 단편 <백색인>, <지리멸렬>과, 장편 <플란다스의 개>, <살인의 추억> 등은 모두 장르의 틀을 빌려와서 한국 사회의 문제점을 풍자하거나 비판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백색인>은 계급 문제, <지리멸렬>은 지배층의 모순된 모습, <플란다스의 개>는 대학 모순, <살인의 추억>은 군부정권의 허상을 꼬집거나 비판하고 있었다. 흥미로운 것은, 봉준호가 장르의 틀을 고수하면서 또는 그 틀을 비틀면서 대중과의 교감을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대개는 코미디와 서스펜스 스릴러 스타일로 대중적 교감의 토대를 마련한 후 그 위에서 자신이 하고픈 이야기를 선명하게 진행시킨다(훗날 ‘봉준호식 장르’, 또는 ‘봉준호는 장르’라고 이야기하는 바로 그 장르의 전유). 봉준호 영화가 비평과 흥행 양측에서 성공을 거둔 이유는 분명 여기에 있다. 때문에 <괴물> 역시 재난영화나 괴수영화의 틀 속에서 괴물을 다루면서도 사회 비판의 메시지가 강하게 들어 있을 것으로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쇼박스

  어떻게 보면 <괴물>은 장르영화로서는 그리 흥미진진한 영화라고는 할 수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살인의 추억>이 <괴물>보다 몇 배나 재미있었다. <살인의 추억>처럼 영화가 끝날 때까지 질퍽한 늪에 빠진 것 같은 끈적끈적한 공포를 느끼게 하는 힘이 <괴물>에는 없다. 괴물의 실체는 이미 영화 초반에 모두 드러난다. 출렁이는 한강을 보기만 해도 당장이라도 괴물이 덮칠 것 같은 공포감도 압도적이지 않다. 괴물의 결정적 약점을 공략해야만 이길 수 있는 장르적 스릴도 부재하다. 처음부터 괴물은 그리 강한 존재가 아니었다. 때문에 감독이 정작 하고자 하는 이야기기는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이 <괴물>의 딜레마이고, 한편으로는 <괴물>의 장점이다.

  역설적으로 <괴물>이 흥행에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 가운데 하나는 ‘한국형’ 블록버스터의 전략을 충실히 답습했기 때문이다. 최고의 스타가 등장하고, 엄청난 자본이 투입되었으며, 화려한 볼거리를 갖춘 동시에 내용면에서는 온 세대가 공감할 수 있는 남한만의 상황이 영화에 녹아있다. <괴물>은 대형 사고의 기억과 가족주의를 직접적으로 다룬다. 먼저 대형 사고의 기억과 영화적 재현의 문제. 한강에 괴물이 등장해 사람을 죽인 사건은, 출근길에 다리가 끊기거나 갑자기 백화점이 무너지거나 도로의 가스관이 폭발하거나 지하철에 화재가 나서 사람이 죽은 사건 등과 다를 바 없는 인재人災이다. 이 사건 들에는 정치권의 졸속적 대응, 복지부동인 공무원의 행태, 호들갑 떨다가 피해자를 가해자로 만드는 언론의 비열함, 참을성 없는 시민들의 표리적 행동 등이 거의 동시에 등장한다. <괴물>은 바로 그것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더 나가, (이것이 정말 대단한데) 그동안 금기시되던 반미 정서를 거대한 자본이 들어간 영화에서 다루었다. 분단 상황에서, 세계 4강의 틈바구니에서 우리가 의지할 것은 미국이라는 인식이 너무도 강하기 때문에 감히 반미 정서를 주장한 영화가 천만 관객을 동원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아무 문제없다는 듯 <괴물>이 해냈다.

ⓒ쇼박스

  영화에 재현된 가족주의도 빼놓을 수 없다. 가족 가운데 가장 정상적이고 귀여운 딸이자 조카인 손녀가 괴물에게 잡혀가면서 일가족의 소녀 찾기가 시작된다. 여기서 핵심은 가장 귀여운 딸이 괴물에게 잡혀갔다는 것이다. 남한에서 가족, 특히 자식에 대한 애정은 각별하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다” 라는 말은 이럴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현서가 잡혀 갔을 때 온가족이 모든 것을 포기한 채 현서를 찾아 헤매는 것에 공감할 수 있는 것은 남한의 가족주의와 이 영화가 깊이 공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괴물>은 가족주의를 조장하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가족 해체를 다룬다. 일가족은 현서의 죽음 때문에 (물론 이때까지 죽지는 않았지만) 한 곳에 모일 수 있었고, 그녀의 생존 소식 때문에 다시 뭉칠 수 있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괴물에게 죽임을 당하고 현서는 죽고, 가족들은 각자 흩어진다. 여기서 굳이 현서를 죽였어야만 했는지, 개봉 당시 크게 논란이 되었던 이야기를 잠깐 해야 할 것 같다. 해피엔딩이 거의 없는 봉준호 영화이기에, 가족 해체를 다룬 영화이기에 현서는 죽어야 한다. 그리고 현서가 죽는 것이 대중들과 교감하는 데 반드시 불리한 것도 아니다. 정서적 강렬함을 더욱 강하게 자극할 수 있기 때문이다(언젠가 기회가 되면 봉준호 영화의 소녀 죽임과 살림에 대해 논하고 싶다. 그의 영화에서는 끊임없이 교복 입은 소녀를 죽였는데, 특이하게도 두 편에서는 소녀를 살려 희망을 이야기했다).

  다시 보고 다시 봐도 <괴물>은 그리 탁월한 영화는 아니다. 영화적 상황이나 스토리의 전개는 쉽게 읽힐 수 있도록 설정해 놓았고, 숨죽이는 스릴도 덜 하며, (엄밀히 말하자면) 괴물의 CG도 그렇게 뛰어나다고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영화는 이 모든 한계를 간단하게 뛰어넘었는데, 그 이유는 영화 속에 남한 사회의 다양한 모순이 매우 날카롭게 녹아 있기 때문이다. 나이와 성별, 직업을 초월해 남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 영화 속에 들어있다. 대중 영화의 모범 사례라고 할까?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영화가 현실을 반영한다면 <괴물>보다 더 적절한 예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그런 의미에서 <괴물>은 재난영화가 아니다. 노골적인 정치영화다.

 

 

* 《쿨투라》 2019년 7월호(통권 6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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