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영화 100주년 연재5] 황정순에서 손예진까지... 한국 영화 여자배우10인
[한국 영화 100주년 연재5] 황정순에서 손예진까지... 한국 영화 여자배우10인
  • 전찬일(영화평론가, 콘텐츠비평가협회장)
  • 승인 2019.07.0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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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광역시 소재 국립 아시아문화전당의 ‘2019 시민아카데미’에서 지난 4월 19일부터 5월 말까지 6주에 걸쳐 강의한 「한국 영화 100주년, 다시 묻는 “영화란 무엇인가?”―과학의 보조물에서 공론장(Public Sphere)까지」에서 활용한 강의안을 적절히 손본 원고다. 지면의 제약 등으로 인해, 대개는 명시했으나 더러는 참고·인용 출처들을 밝히지 않았다.

 남자 배우 10인에 이어, 스타를 넘어 시대의 얼굴을 담은 여자 배우 10인을 뽑아보면 어떤 그림이 그려질까? 이 원고의 토대가 된 강의안의 ‘(최고의) 한국 여자 배우 10인’에서는 춘사 나운규의 여성 버전이라 할 문예봉(文藝峰; 1917∼1999)으로부터 출발했다. 〈임자 없는 나룻배〉(1932, 이규환 감독)의 주인공 뱃사공 춘삼(나운규 분)의 딸 역으로 영화계에 데뷔 인기 배우로 발돋움한 뒤, 최초의 발성 영화 〈춘향전〉(1935, 이명우)을 비롯해 〈아리랑 고개〉(1935, 홍개명), 〈장화홍련전〉(1936, 홍개명), 〈나그네〉(1937, 이규환), 〈인생항로〉(1937, 안종화), 〈애련곡(환무곡)〉(1939, 김유영) 등에 출연하며 1930년대 일제식민기를 대표하는 여배우로 대중적 사랑을 받다, 1948년 월북해 북한 영화계를 움직였다던 북한 최초의 공훈배우.

 그녀에 대한 개인적 인상은, 〈미몽〉(1936, 양주남)의 주인공 예순으로 각인돼 있다. 2008년 〈청춘의 십자로〉(1934, 안종화)가 발굴되기 전까지만 해도 가장 오래된 현존 한국 영화. 〈심청〉(1937, 안석영)과 동시대 영화라고는 믿기 어려울 만큼 ‘모던 라이프’를 감각적·자극적으로 재현한 영화에서 문예봉은 “어머니이자 아내로서의 통념을 완전히 벗어나 자신의 욕망에 지독하게 충실한 악녀”를 ‘치명적 매혹Fatal Attraction’으로 구현한다. “호텔 침대에 앉아 유유히 담배 연기를 내뿜는 그녀의 모습은 한국전쟁 후 ‘성 모럴’을 개탄하게 한 〈자유부인〉(1956, 한형모)의 오선영보다 훨씬 멀리 가 있다.” (『한국 영화사 - 開化期에서 開花期기까지』, 김미현 책임 편집, 커뮤니케이션 북스, 2006)

 그때로부터 2, 3개월이 지난 이 시점, 문예봉을 다른 여우로 바꾸고 싶은 건 어인 일일까. ‘죽음의 자장가’라는 부제가 딸린 〈미몽〉의 예순 말고는 그녀의 연기를 목격한 적이 없거나, 월북배우여서는 아니다. 그보다는 개인적 인연도 인연이거니와, 우리 시대와 좀 더 가까운, 또 다른 치명적 여배우로 대체하고 싶어서다. 손예진이다. 황정순에서 최은희, 김지미, 윤정희, 문희, 장미희, 강수연, 전도연, 전지현, 손예진에 이르는 10인이, 고심 끝에 최종 선정한 한국 영화 배우사의 여걸들이다.

1. 황정순(黃貞順; 1925~2014) : ‘김승호의 어머니 버전’

 1941년 〈그대와 나〉로 신고식을 치른 황정순이, 영화에 본격 출연하는 것은 1949년부터였다고. 그 역할들은 주로 실제보다 더 나이 든 역들, 그 중에서도 ‘어머니’로서의 배역들이었다. 〈박서방〉(1960, 강대진), 〈마부〉(1961, 강대진), 〈김약국집 딸들〉(1963, 유현목), 〈갯마을〉(1965, 김수용), 〈장마〉(1979, 유현목) 등이 몇몇 대표작들. 황정순은 배우가 한 역을 맡게 되면 반드시 성격 분석에 충실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 배역이 되는 캐릭터의 과거사와 현재사, 미래사를 추적해서 이해하고 충분히 납득하고 있어야 하며, 특히 미래적 비전을 통해 인물의 연기 패턴을 결정해야 한다고 강변했다. 그 이후 가장 잘 해야 할 대목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부각시켜 연기해야 할 곳과 사건 전개의 맥락이 되는 지점을 찾아야 하며 그 부분을 중점적으로 강조하는 연기를 해야 한다고 했다. 배우라면 장르에 관계없이 해당되는 말이었다. 이래저 래 ‘김승호의 어머니 버전’으로 손색없다. (포털 다음, 『근현대 영화인사전』 참고)

2. 최은희(崔銀姬; 1926~2018) : 한국 영화 100년의 최고 여배우

 명실상부 한국 영화 100년사의 최고 여배우다. 황정순처럼 더러는 어머니 역을 소화했음에도 그 외연과 내포에서 사뭇 달랐다. 신상옥 감독의 〈지옥화〉(1958)나 〈어느 여대생의 고백〉(1958) 등에서 드러나듯 양공주, 여대생 등 다채로운 역들을 실감 넘치게 소화해낸 입체적 배우였다. 6·25전쟁 이후 한동안 한국 영화계에서 그녀의 존재감은 절대적이었다. 아이콘적 위용을 과시했다고 할까. “최은희의 인생은 그 자체로 드라마 였다. 전쟁을 겪으면서 살아남아야 했고, 어두운 여건에서도 영화를 찍고 제작하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야 했으며, 북한에서 자유를 찾아 다시 장벽을 넘어야 했다. 배우로서 그녀의 이미지는 겉으로 보면 대단히 부드럽게 보인다.” 무엇보다 1961년 선보인 신상옥 감독의 두 영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와 〈성춘향〉의 다소곳한 이미지 덕분이다. 하지만 “그녀의 부드러움 너머에는 꿈틀거리는 강함이 있다. 그 강함은 연극을 위한 의지이고, 두려움 없는 도전이고, 자유를 향한 열정이었다. 그녀는 내부에 불씨를 간직한 휴화산과 같은 배우였다.”(『근현대 영화인사전』)

3. 김지미(金芝美; 1940~ ) : ‘동양의 엘리자베스 테일러’

 한때 세계의 미인을 대표하던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비교되며 ‘동양의 엘리자베스 테일러’라고 일컬어졌던 여배우가 있었다. 불세출의 미모와 여장부 같은 강인한 캐릭터를 토대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디바 중 디바, 김지미였다. 그녀는 1960년대 초중반에는 최은희, 문정숙 등의 선배들과, 1960년대 중후반에는 후배들인 윤정희-남정임-문희, 60년대 트로이카와 경쟁을 해야 했다. 그 경쟁들의 최종 승자는 김지미였다. 흔히 한국 영화 암흑기로 칭해지는 1970년대를 거치며 은막을 떠나거나 2선으로 물러난 다른 여걸들과는 달리, 1980년대에도 건재를 과시하며 생애의 대표작들을 선보였다. 김기영 감독의 〈화녀 82〉, 임권택 감독의 〈길소뜸〉(1985)과 〈티켓〉(1986) 등이었다. 배우, 제작자 외에도 1990년대 이후 로는 영화인협회 이사장, 스크린쿼터 사수 범영화인 비대위 공동위원장, 영화진흥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약했다. 2002년 영진위 위원을 그만두고 미국으로 이주, 미국과 한국을 오가며 지내고 있다. 2010년에는 부산영화제에서 김지미 회고전이 열렸다.

4. 윤정희(尹靜姬; 1944~ ) : 학구파로도 정평 난 톱스타 연기자

1966년 당시 1,200:1의 경쟁률을 뚫고 합동영화주식회사 신인배우 공모전에 단독 선발돼, 〈청춘극장〉(1967, 강대진)으로 데뷔했다. 신성일, 고은아 등과 협연한 첫 주연작으로 대종상 신인여우상, 청룡영화상 인기 여우상 등을 거머쥐었다. 1960년대 후반 문희·남정임과 함께 여배우 트로이카 시대를 이끌었으며, 1976년 피아니스트 백건우와 프랑스에서 결혼하며 잠정 은퇴하기까지, 매해 30여 편에서 60여 편 가량의 다양한 영화를 찍었다. 멜로드라마 〈강명화〉(1967, 강대진), 〈물망초〉(1969, 최훈) 등 사극 〈내시〉(1968, 신상옥), 〈이조 여인잔혹사〉(1969, 신상옥) 등, 문예영화 〈안개〉(1967, 김수용), 〈장군의 수염〉(1968, 이성구) 등이 그 대표작들. 학구파로도 정평이 자자한데, 한국 최초의 석사 여배우로 만족하지 않고, 결혼 후 파리 제3대학 대학원 영화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다. 1980년대에 컴백해 〈자유부인〉(1981, 박호태), 〈위기의 여자〉(1987, 정지영), 대종상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만무방〉(1994, 엄종선), 2010 칸 각본상의 〈시〉(이창동)를 통해 ‘현역’으로의 건재를 뽐냈다.

5. 문희(文姬; 1947~ ) : 치명적인, 너무나도 치명적인…

 사심을 허락한다면 1960년대 여배우 트로이카, 아니 한국 영화사 100년을 통틀어 개인적으로 가장 선망해온, 역시 치명적 매혹의 디바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의 스칼렛 오하라, 비비안 리의 매력에 흠뻑 빠져 배우를 꿈꾸기 시작했고, 그 꿈을 실현키 위해 서라벌 예대에 들어갔다. KBS TV 탤런트 시험에 응시해 오디션을 받다 이만희 감독의 조감독 눈에 띄어 〈흑맥〉(1965)으로 데뷔, 배우로서의 가능성을 인정받았다. 신성일과 호흡을 맞춘 〈초우〉(1966, 정진우)로 스타덤에 오른 후, 1971년 결혼과 더불어 은퇴할 때까지 22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며 정상의 인기를 구가했다. 유현목 감독의 〈막차로 온 손님들〉(1967), 신상옥의 〈이조잔영〉(1967), 김기덕의 〈섬마을 선생〉(1967), 이규웅의 〈공주 며느리〉(1967), 그리고 정소영의 〈미워도 다시 한번〉(1968) 등이 그들이다. 〈미워도 다시 한번〉은 37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당시 한국영화 최고 흥행기록을 세웠고, 오늘날까지도 국산 (신파) 멜로영화의 대명사로 간주되고 있다.

6. 장미희(張美姬; 1958~ ) : 1970년대 여배우 신-트로이카 선두주자

 정윤희, 유지인과 함께 1970년대 여배우 신-트로이카로 일컬어졌던, 역시 치명적 매혹의 톱스타. 인기의 강도나 팬들의 호불호에서는 적잖이 갈리나, 소녀와 창녀의 이미지를 동시에 구현한 결정적 출세작 〈겨울여자〉(1977, 김호선)를 비롯해 배창호의 〈적도의 꽃〉(1983), 〈깊고 푸른 밤〉(1985), 〈황진이〉(1986), 김호선의 〈사의 찬미〉(1991) 등 주연작의 면면에서나, 40여 년의, 스타-연기자로서 생명력 등에서 두 디바를 압도한다. 1976년 영화 〈성춘향전〉(박태원)과 TBC TV의 드라마 〈해녀 당실이〉에 나란히 출연하면서 배우 생활에 뛰어들었다. 이후로도 줄곧, 숱한 굴곡· 우여곡절 와중에도, 영화와 TV를 오가며 연기 생활을 지속시켜오고 있다. 한국 영화사의 기념비적 캐릭터 이화로 분한 〈겨울여자〉 때도, TBC 인기드라마 〈청실홍실〉로도 정상의 인기를 누렸다. 1989년부터는 명지대 연극영상학과 교수 등으로 재직해왔다. 배우, 교수 외에도 적잖은 활동을 펼쳐왔는바, 올해에는 이장호 감독과 한국 영화 100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 등을 맡고 있다.

7. 강수연(姜受延; 1966~ ) : 일찌감치 ‘월드 스타’로 불렸던 한국 대표 여배우

 임권택 감독의 〈씨받이〉(1986)로 87년 베니스영화제 여우주연상, 〈아제아제 바라아제〉(1989)로 89년 모스크바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안으며 일찌감치 ‘월드 스타’로 불렸던, 또 한명의 한국 대표 여배우. 1976년 〈핏줄〉(이혁수)과 TV드라마 〈똘똘이의 모험〉의 아역배우로 연기 생활을 시작한 이래, 〈고래사냥2〉(1985, 배창호), 〈미미와 철수의 청춘스케치〉(1987, 이규형) 등의 청춘스타를 거쳐, 〈연산군〉(1987, 이혁수), 〈우리는 지금 제네바로 간다〉(1987, 송영수),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1989, 장길수), 〈베를린 리포트〉(1991, 박광수), 〈경마장 가는 길〉(1991, 장선우), 〈그대 안의 블루〉(1992, 이현승), 〈지독한 사랑〉(1996, 이명세), 〈처녀들의 저녁식사〉(1998, 임상수) 등 성인연기자에 이르기까지 그 변신은 단연 큰 주목을 요한다. “천부적인 끼를 타고난 스타”로, “80년대 중반 원미경, 이미숙, 이보희 등의 트로이카 체제가 배우들의 결혼 등의 이유로 주춤한 이후 90년대 새로운 여배우 스타들이 몰려올 때까지 강수연은 ‘영화만을 지키는 독보적인 존재’로 영화계의 중심에 있었다.” (『여성영화인사전』)

8. 전도연(全度姸; 1973~ ) : 타의 추종을 불허할, 현존 대한민국 최고 (여)배우

 연기력과 배역의 다채로움 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현존 대한민국 최고 (여)배우. 한석규와 호흡을 맞춘 〈접속〉(1997, 장윤현)으로 일약 스타덤에 오른 이후 최근작 〈생일〉(2019, 이종언)에 이르기까지 지존적 여배우 위상을 지켜왔다. 〈해피 엔드〉(1999, 정지우), 〈너는 내 운명〉(2005, 박진표), 〈집으로 가는 길〉(2013, 방은진), 〈무뢰한〉(2014, 오승욱> 등 20편에 달하는 주연작 모두가 대표작이라 한들 무리가 아닐 절대적 존재감을 뿜어왔다. 여러모로 강수연과 비교될 법한데, 1980~90년대에 강수연이 영화계에서 했던 역할을 데뷔 이래 줄곧 전도연이 해왔다고 할까. 월드스타적 면모에서도 닮은꼴. 〈밀양〉(2007, 이창동)으로 대한민국 배우로는 처음으로, 아시아 배우로는 장만옥에 이어 두 번째로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2009년 10월에는 프랑스 정부로부터 문화예술공로훈장 슈발리에를 받았으며, 2014년에는 제67회 칸 경쟁부문 심사위원에 위촉됐다. 이 또한 대한민국 배우로는 최초였다.

9. 전지현(全智賢;1981~ ) : 스타의 속성에서 견줄 이 부재할 절대적 스타 여배우

 심심치 않게 연기력 논란을 불러일으키긴 했어도, 이미지나 기호로서 스타의 속성에서는 견줄 이가 거의 부재할 절대적 스타 여배우다. 적어도 2000년대 이후로는. 1997년 하이틴 잡지 《에꼴》의 표지 모델로 연예계에 뛰어 들어, 2001년 곽재용 감독의 〈엽기적인 그녀〉를 통해 결정적 스타덤을 구축했다. 한국 로맨틱 코미디 영화사상 최다 관객 동원 등 절정의 인기를 누리고, 대종상영화상 여우주연상 수상 등의 쾌거에도 불구하고 영화는 그녀에게 축복이자 굴레였다. ‘엽기녀’로서의 이미지가 워낙 강력해, 연기 변신을 향한 시도 등이 좌절됐기 때문. 〈4인용 식탁〉(2003, 이수현)이 그 대표적 경우.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2004, 곽재용)로 대중적 참패를 떨쳐냈으나, 한동안 슬럼프를 겪어야 했던 것도 사실. 〈블러드〉(2009, 크리스 나혼), 〈설화와 비밀의 부채〉(2011, 웨인 왕) 등 해외 진출 도전도 무위에 그쳤다. 하지만 〈도둑들〉(2012, 최동훈)로 화려하게 재기했다. 예의 엽기녀 이미지도 탈피하는데 성공했다. 〈베를린〉(2013, 류승완), 〈암살〉(2015, 최동훈) 등으로 이어지는 연타를 날리며, 제2의 전성기를 구가 중이다. 14년 만에 출연한 〈별에서 온 그대〉도 그 증거.

10. 손예진(孫藝珍;1982 ~ ) : ‘포스트-전도연’이자 ‘포스트-전지현’

 2000년대 한국 영화가 낳은 압도적 대형 톱스타. 〈취화선〉(2002, 임권택) 의 조연으로 배우로서 존재감을 입증한 뒤 차태현, (고)이은주와 열연한 수작 멜로 〈연애소설〉(2002, 이한)을 통해 그 존재감을 굳혔다. ‘조승우의 발견’이기도 한 〈클래식〉(2003, 곽재용)으로 그녀의 트레이드마크가 될 ‘멜로퀸’의 위상을 확보했다. 그 위상은 〈내 머리 속의 지우개〉(2004, 이재한), 〈외출〉(2005, 허진호), 〈아내가 결혼했다〉(2008, 정윤수) 등으로 이어지며 더욱 공고해졌다. 멜로 이미지가 워낙 강렬해서 그렇지, 손예진은 일찌감치 연기 변신에 성공한 흔치 않은 여배우다. 〈작업의 정석〉(2005, 오귀환) 등 코미디, 〈무방비 도시〉(2008, 이상기), 〈협상〉(2018, 이종석) 등 범죄 액션, 〈타워〉(2012, 김지훈) 등 재난 드라마, 〈해적: 바다로 간 산적〉(2014, 이석훈) 등 액션 시대극, 〈비밀은 없다〉(2016, 이경미) 등 스릴러, 〈덕혜옹주〉(2016, 허진호) 등 사극......  그 증거들은 수두룩하다. 결국 ‘포스트-전도연’이자 ‘포스트-전지현’으로도 손색없다.

 

 

* 《쿨투라》 2019년 7월호(통권 61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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