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욱 · 이무영 시나리오] 미스테리오소 2회
[박찬욱 · 이무영 시나리오] 미스테리오소 2회
  • 박찬욱(각본) · 이무영(각본, 감독)
  • 승인 2018.10.01 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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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몽구와 수영의 집 외부

골짜기의 창고와 같은 가건물 풍경. 초승달 아래 가로등이 희미하게 빛난다. 합판과 양철로 조악하게 지어진 허름한 건물. 앞 장면부터 시작된 연주가 끝난다.

26. 몽구와 수영의 집

재래식 난로에서 조금 떨어진 허름한 매트리스 위에 몽구와 수영이 누워있다. 추운 듯 후드 달린 셔츠를 입고 이불을 덮은 두 사람, 추위에 떤다.

몽구
(이를 덜덜 떨며)
...꽉 껴 안구 자니까 좋다.

수영
(역시 이가 덜덜 떨리는데도 불구하고 일부러 장난스럽게)
...낭만적이잖아!

몽구
(수영의 품을 파고들며)
...낭만 떨다가 얼어 죽겠다.

수영
(야릇한 눈으로 몽구를 보며)
...그래도 할 건 하구 자야지.

몽구
(자신의 옷을 벗기려는 수영의 손을 잡으며)
너무 춥다.
오늘은 그냥 자자.

수영
...우리가 무슨 뱀이니? 겨울 내내 엉켜서 잠만 자게?

몽구
(울상이 되어)
그럼 어떡해, 추운데?

잠시 고개를 갸우뚱하는 몽구.
잠시 후 -
두 사람, 두터운 2인용 군용침낭 안에서 용트림을 한다. 아주 힘겨워 보인다. 몽구의 신음이 들린다.
잠시 후 -
몽구의 머리, 그리고 수영의 머리가 침낭을 헤집고 차례로 나온다. 둘 다 비 오듯 땀을 흘린다.
잠시 후 -
침낭을 뒤집어 쓴 채 서서 창 너머 달을 바라보는 몽구와 수영.

몽구
우리 판 내기루 했어! 양사장이 돈 댄대!

수영
...정말!

몽구
앨범커버 그림을 니가 좀 그려 줘!

수영
(눈을 흘기며)
...맨입으로?

몽구
(야릇한 표정을 지으며)
...이 세상에 맨입이 어딨니?
 
수영
(끌어안으려는 몽구를 저지하며)
...추워서 그냥 자재메?

몽구
(더욱 야릇한 표정으로)
...그러니까, 왜 얌전하게 겨울잠 자는 뱀을 깨우냐구?

말을 마치자마자 수영을 끌어안고 엎어지는 몽구.

27. 카페 리버사이드

중년남자와 앉아 차를 마시는 젊은 이훈, 하지만 씬#2와 마찬가지로 말쑥한 신사차림이다. 주인으로 보이는 젊은 사내 하나가 카운터에 앉아 젊은 여자 하나와 떠들고 있다. 사내를 자세히 보니 몽구의 친구로 수영의 전시회장에서 그림을 구매한 인물이다.

이훈
(긴장된 표정으로)
...얼마 드릴까요?
(남자가 대답 대신 손가락 세 개를 펼쳐보이자)
좋습니다.
사진하고 그밖에 말씀하신 자료들, 준비했습니다.

남자, 이훈에게서 건네받은 서류봉투에서 사진 하나를 꺼낸다. 사진 속의 여인, 삼십대 미모의 여인이다. 사진을 다시 봉투에 넣는 남자, 가볍게 목례한 후 사라진다. 가만히 앉아 뭔가 생각하던 이훈, 문득 맞은 편 벽에 걸린 두 점의 그림을 응시한다. 이훈, 일어나 그림 가까이 다가가 유심히 본다. 수영의 전시회에서 팔렸던 그림들이다.

28. 클럽 시어

서정적이던 세민의 색소폰 솔로가 갑자기 격정적으로 변한다. 즉흥연주에 몰두하던 세민, 계속 솔로를 이어가려다가 급작스럽게 시작되는 몽구의 피아노솔로에 놀란다. 다시 틈을 노려 솔로를 이어가려는 세민. 하지만 몽구는 전혀 알아채지 못한 채 완전히 자기 연주에 몰입된 상태이다. 베이시스트 덕호가 화가 난 듯 외면한 채 연주한다. 온갖 폼을 다 잡으며 연주하는 몽구, 하지만 전혀 멋지게 들리지 않는다. 못마땅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몽구를 쳐다보는 세민과 덕호. 몽구가 엉망인 피아노솔로를 마무리하자 곧바로 세민의 멋진 색소폰 솔로가 재개된다. 이제야 신이 난 듯 베이스 지판을 두들기는 덕호와 드러머가 멋지게 세민의 솔로를 뒷받침한다. 마치 몽구가 없어도 될 듯 느껴진다. 따라서 연주하다가 벽에 붙인 듯 슬그머니 건반에서 손가락을 내려놓는 몽구.

29. 클럽 시어 화장실

세민과 덕호가 나란히 변기에 앉아 용을 쓰고 있다.

덕호
(용을 쓰다가)
몽구 그 새끼 우리가 연주하는 거 전혀 안 들어요!
...아니, 안 듣는 게 아니라 못 듣는 거죠!

세민
(한숨을 내쉬며)
그래도 우리 별 볼일 없을 때부터 같이 왔잖아.

덕호
(말을 끊으며)
음악을 의리로 해요, 형은?
...걔는 우리의 가능성을 갉아먹는 기생충이에요!

세민
(고개를 저으며)
...그래서 걱정이다.

덕호
...형, 그래서 말인데요.
우창이 형이 우리랑 같이 음악하고 싶은 거 같던데...

화장실 양변기 칸밖에 몽구가 굳은 표정으로 서 있다.

세민
나중에 하자 그 얘기!
(휴지가 없음을 확인하곤)
...거기 휴지 있니?

덕호
(휴지가 없음을 발견하고는 짜증난 투로)
아이... 씨이!
몽구한테 전화할게요.

덕호가 휴대폰 버튼을 누른다. 유유히 수도꼭지에 연결된 고무호스를 집어 드는 몽구, 물을 튼다. 덕호의 칸 문짝 위로 물을 뿌리는 몽구. 곧이어 덕호의 비명 소리, 그리고 몽구의 휴대폰 벨 소리가 들린다.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호스 끝을 잡아들고 양쪽 칸에 번갈아 물세례를 퍼붓던 몽구, 수도도 잠그지 않은 채 나가버린다.

30. 버스정류장 근처

택시에 오르는 몽구, 휴대폰을 귀에 대고 있다.

몽구
...한시까진 들어갈 거야.
(운전사에게)
...아저씨, 삼송리요!

수영
(소리만, 몽구의 말을 비꼬듯 흉내 내며)
아저씨, 삼송리요?
...너 또 지난번처럼 택시 타고 오면 죽는다.
우리 살림에 그냥 버스타구 와, 알았어?

몽구
(힘없이)
...알았어.
(전화를 끊은 후 운전사에게)
저어... 죄송한데, 좀 세워 주세요.

몽구를 노려보는 운전사.
잠시 후 -
몽구를 남겨둔 채 타이어 굉음을 내며 사라지는 택시. 몽구, 시간표를 확인하곤 근처 편의점을 향한다.
시간 경과 -
몽구가 담배 한 갑을 들고 나오는 사이 버스가 쏜살같이 오더니 손님이 없는 걸 확인하곤 빠른 속도로 지나친다. 몽구가 담배를 문 채로 한참 쫓아가지만 금방 사라진다. 포기하고는 풀이 죽은 채로 돌아서는 몽구. 뒤따라 뛰어오던 고등학생 남녀, 짜증난다는 표정이다.

남자 고등학생
(신경질적으로)
아이... 씨발, 저거 막찬데!

여자 고등학생
그냥 택시 타구 가자.

잠시 후 -
곧바로 택시를 타고 사라지는 남녀.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던 몽구, 어쩔 수 없이 뛰기 시작한다.

31. 다리 위

속도를 내어 뛰는 몽구. 휴대폰 벨이 울린다. 덕호다. 전화를 받는 몽구.

몽구
(힘겹게 입김을 내뿜으며)
여보세요.

덕호
(소리만)
너지?
너, 이 개새끼, 어디야?

몽구
근데, 어떻게 닦고 나왔니?

덕호
(더욱 흥분한 목소리로)
니가 뿌려준 물로 씻고 나왔다, 씹새꺄!

몽구가 여전히 땀을 흘리며 달린다.

32. 몽구와 수영의 집

걱정스런 표정으로 방을 맴돌던 수영, 휴대폰을 집어 들고 전화하려 한다. 시계는 이미 새벽 3시 반이다. 초인종이 울린다.
잠시 후-
문이 열리면 몽구, 서 있다. 땀이 비 오듯 이마에서 흐른다.

수영
(놀란 표정으로)
...어떻게 된 거야?

몽구
(헉헉대며)
막차 놓쳐서 뛰어왔잖아!

수영
...그럼 택시 타구 와야지, 이 바보야.
...니가 무슨 마라톤 선수니, 홍대에서 삼송리까지 뛰어오게?

몽구
(철퍼덕 주저앉아, 아이가 투정부리듯 발버둥 치며)
니가 택시 타지 말래메...!!!

잠시 후 -
수영이 그림을 그린다. 얼굴에 검은 칠을 한 채 피아노 앞에 앉은 몽구, 머리에 흑인가발을 쓰고 있다. 진짜 피아니스트 같다.

수영
(계속 그림을 그리면서)
...근데, 당신 그렇게 융통성이 없어서,
이 치열한 경쟁사회에서 어떻게 살아남으려고 하니?

몽구
(한참 생각하다가)
...경쟁 안 하면 되지!

수영
(답답하다는 듯)
어떻게 경쟁을 안 하고 사니?

몽구
(다시 깊이 생각하다가)
...그럼 남들 경쟁할 때 나는 심판 보면 되잖아!

할 말을 잃은 수영, 몽구를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다.

33. 녹음실

몽구가 피아노 앞에 앉아있고, 세민과 덕호, 그 옆에 서 있다.

세민
(몽구를 보며)
...넌 어째 지난주나 이번 주나 솔로가 똑같으냐?
자기 복제도 아니고...

몽구
(능청맞게)
...형, 이사 하느라고 연습을 좀 못해서 그렇지...

덕호
새끼, 변명은!
(경멸조로)
너는 우리가 매번 다르게 연주하는 거 자체를 몰라!

몽구
(항의하듯)
나도 매번 다르게 연주할 수 있어! 봐봐!
...버드 파웰!
(버드 파웰의 난해한 스타일을 흉내 낸 후)
...오스카 피터슨!
(한참 감미로운 오스카 피터슨의 스타일을 흉내 낸 후)
...뗄로녀스 몽크!
세민
(불쌍하든 듯)
...몽구야, 재즈는 즉흥연주잖아!
...매 번 다르게 연주할 수 있어야 하는 거야!
그건 죽어라 연습만 한다고 되는 게 아니잖아!

덕호
(퉁명스럽게)
니가 무슨 복사기니, 매번 똑같아 연주하게?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며)
...넌, 니 게 없어, 인마!

덕호의 말에 할 말이 없는 몽구, 위스키를 단숨에 들이킨다.

덕호
(핀진 투로)
그리고 너, 술 좀 그만 처먹어!

몽구, 괴롭지만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애쓴다.

34. 다라 갤러리 전경

잘 지어진 아담한 하얀 건물. 밖에서 보이는 내부, 전시회로 분주하다. 미술관의 위상에 눌린 듯 애써 심호흡을 한 후 내부로 걸어 들어가는 수영.

35. 갤러리 관장실

클래식 음악이 흐른다. 세련된 느낌의 넓은 공간. 이훈이 창 너머 풍광을 바라본다. 문이 열리고, 여비서와 함께 들어오는 수영. 천천히 돌아보는 이훈, 수영과 여비서를 번갈아본다.

비서
두 시 미팅 잡혀있는 유수영씹니다.
(여전히 멍하니 보는 이훈을 향해)
...그때 그 카페에서 구입하신 그림!

이훈
(이제야 알겠다는 듯)
...아아!

수영
(기가 죽지 않으려 애써 목소리에 힘을 주며)
안녕하세요?

이훈
(밝게 웃으며)
반갑습니다.

이훈, 말을 마치자마자 한쪽 벽에 걸린 두 점의 그림을 쳐다본다. 수영도 이훈의 시선을 따라서 본다. 전시회에서 팔렸다던 수영의 그림이 모습을 드러낸다. 수영, 놀란다.
잠시 후 -
수영과 이훈이 앉아 얘길 나눈다.

이훈
(수영의 그림 두 점을 보며)
제가 작갈 수소문하느라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세요?

수영
제 그림을 좋아하는 분이 있다는 게 정말 믿기지가 않네요.

이훈
요즘 기성화가들 작품이 워낙 비싸서 작전을 바꿨어요.
무명작가들한테 집중적으로 투자하기로...
(수영이 피식 웃자)
...농담 아닙니다. 솔직히 제 생각엔, 저어...
죄송해요, 성함이?

수영
유수영입니다.

이훈
...그래요, 수영씨.
전 수영씨 그림에서 상당한 가능성을 봤어요.
잘하면 수영씨가 절 더 큰 부자로 만들어 줄 것 같아요.
(황당하지만 환히 웃는 수영을 보며)
어때요, 생각 있어요?

수영
(당당하게)
당연히 있죠.

이훈
(갑자기)
그럼 작업실을 한번 방문하고 싶은데 언제가 좋을까요?

수영
(잠시 생각하다가)
지금 당장 가셔도 되는데...

36. 녹음실

몽구를 포함한 네 명의 연주자들이 한창 연주 중이다. 다시 세민의 솔로가 시작되는데 몽구가 또 다시 연주를 망친다. 다들 실망한 표정이다. 피아노를 손가락으로 세게 내려치며 멈추는 몽구, 애써 덤덤한 척 하려한다.

몽구
(자기 머리를 때리며)
어휴... 병신!
(애써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너스레를 떨며)
죄송해요, 형님!
요번엔 왠지 제대로 나올 거 같으니까, 빨리 다시 가죠.

세민
(몽구를 보다가 덕호와 드러머를 향해)
니들 좀 나가 있어.
아니... 아예 점심 먹고 와라.

덕호와 드러머, 세민의 눈치를 보며 스튜디오 문을 열고 나간다. 녹음부스 밖 엔지니어들까지 나간다. 피아노로 다가와 몽구를 바라보던 세민, 껌을 하나 꺼내 씹는다.

세민
(껌 하나를 건네며)
씹을래?

몽구
(시무룩한 표정으로)
괜찮아요!

세민
(다시 한참 껌을 씹다가)
몽구야, 어떤 연주자도 너 같은 열정은 없을 거야. 근데...
(머뭇거리다가)
...피아노 치는 건 이제 포기해라!
...대신 재즈보컬 가르치는 거 있잖아! 그거 열심히 해!
...아무리 생각해도 넌 가르치는 게 맞는 거 같다.

몽구
(한동안 멍하니 아무 말도 못하다가 겨우)
...저, 이제 겨우 서른둘이잖아요. 앞으로 더 나아지지 않을까요?

세민
(냉정하게)
클리포드 브라운은 스물여섯에 죽었어.

세민의 말에 망치로 맞은 듯 무너지는 몽구, 천천히 피아노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인 채 스튜디오 문을 열고 나간다.

37. 몽구와 수영의 집

벽에 겹쳐 세워놓은 작품들을 하나씩 관찰하는 이훈, 중앙에 놓인 그림을 유심히 본다. CD커버 그림으로 쓰기 위해 수영이 그린 것이다. 피아니스트인 몽구를 중심으로 선 ‘하세민 쿼텟’ 멤버들.

이훈
(유심히 보다가)
이거 흥미로운데... 파는 건가요?

수영
(유심히 보는 이훈에게)
아뇨! 제 남편이 재즈피아니스튼데...
새 앨범 커버로 쓸 거예요.

무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인 후 다른 그림으로 시선을 옮겨가는 이훈, 문득 바닥에 뉘어있는 그림 한 점을 집어 든다. 긴 머리카락으로 얼굴 전체를 가린 여성 세미누드화다. 캔버스 귀퉁이에 폴라로이드로 찍은 그림과 동일한 사진 하나가 붙어있다.

이훈
(그림 한 구석을 손가락질하며)
...어, 이게 뭐지?
뭐가 묻었네?

수영
(급히 허리를 굽혀 들여다보며 냄새까지 맡아본 후 허리를 펴며)
...쥐 오줌이네요.
...죄송해요. 보시다시피 작업환경이...

이훈
(떼어 낸 폴라로이드 사진과 수영을 번갈아 보다가 빙그레 웃으며)
그림 사면, 사진도 같이 주나요?

수영
...그것도 곤란한데...
(고개를 갸우뚱하는 이훈을 보고 민망해하며)
....남편이 제일 좋아하는 그림이거든요.

38. 몽구와 수영의 집 바로 앞 오솔길

어느새 비가 내린다. 시무룩한 표정으로 비를 맞으며 걸어오는 몽구의 눈에 문 앞에서 이훈을 배웅하는 수영의 모습이 보인다. 이훈이 벤틀리 자동차를 타는데 비 맞지 않도록 우산을 받쳐주는 수영. 이훈이 타자 자동차가 곧바로 출발한다. 수영, 멀어지는 자동차를 바라본다. 집안으로 사라지는 수영.
잠시 후 –
스쳐 지나가는 자동차를 바라보는 몽구.

39. 호숫가

사람들이 불꽃놀이를 즐긴다. 하늘로 치솟아 터지는 폭죽들. 벤치에 앉아 물끄러미 불꽃놀이를 지켜보는 몽구, 침통한 표정으로 소주병을 들이킨다.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한다.

40. 몽구와 수영의 집

창 너머로 달빛이 흘러들어 온다. 수영, 휴대폰으로 통화중이다.

수영
...여보세요?

41. 호숫가

몽구가 주저앉는다. 하늘 위에서 터지는 폭죽을 바라보는 몽구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린다.

세민
(목소리만)
...몽구가 많이 괴로울 거예요. 많이 위로해줘요.
미안해요.

42. 몽구와 수영의 집

어둡다. 한 쪽 구석 벽에 기댄 채 우두커니 앉아있는 수영, 매우 걱정스러운 표정이다. 인기척이 들리자 쳐다보는 수영, 환하게 웃으며 일어난다. 문을 열고 들어온 몽구, 수영을 보더니 씩 웃다가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진다.
시간 경과 -
창 너머로 달빛이 스며든다. 매트리스 위에서 깨어나는 몽구, 탁자에 턱을 괸 채 잠든 수영을 바라본다.
사견 경과 -
몽구가 어느새 피아노 앞에 앉아있다. 천천히 덮개를 여는 몽구, 흑백 건반들을 쓰다듬다가 갑자기 원망스러운 표정으로 벽에 걸린 뗄로녀스 몽크의 사진을 올려다본다.

몽구
(울상이 되어)
...아무리 힘들었어도 당신은 최고의 피아니스트였잖아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나는 정말 이렇게 눈물 나게 노력하는데, 왜 안 되는 겁니까?
왜 나는 이렇게 울고 있는데, 계속 웃고 계세요?
너무 불공평하잖아요!

넋두리를 늘어놓는 몽구, 매우 괴로워한다. 자고 있는 줄 알았던 수영, 어느새 깨어나 등을 돌린 채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듣고 있다. 창 너머로 서서히 날이 밝아온다.
시간 경과 -
아침 해가 떴다. 탁자위에 아침밥상이 마련돼 있다. 수영이 매트리스 위에서 자고 있는 몽구를 흔들어 깨운다.

수영
(흔들어 깨우며)
...야아, 일어나! 일어나!
(힘겹게 눈을 뜨는 몽구를 향해)
해장해야지!

시간 경과 -
수영이 밥을 먹고 있다. 숟가락을 들던 몽구, 문득 수영의 누드화가 사라진 걸 발견한다.

수영
(혼자 먹는데 열중하며 몽구에게)
실망하지 마!
언젠가 그놈들 후회하게 만들어줘야지!

몽구
(고개를 갸우뚱하며)
근데, 너 뻘거벗은 그림 어딨니?

수영
(약간 미안한 표정으로)
...팔았는데!
(환하게 웃으며)
걱정 마, 다시 그려줄게.

몽구
어제 외제차타고 온 놈이야?

수영
봤어?
...왜, 지난 번 전시회에서 팔린 그림 두 점 있잖아!
그 사람이 샀대.

몽구
...뭐? 샀다고?

잠시 골똘히 생각하던 몽구, 서둘러 다시 옷을 입고 나간다.

수영
(뒤에서)
어디 가?

43. 카페 리버사이드

수영의 그림들이 걸렸던 벽에, 여성 세미누드사진이 실린 포스터 두 장이 걸려있다. 씩씩거리며 들어오는 몽구, 카운터로 향한다. 수영 전시회에서 그림을 산 가짜손님인 주인이 몽구를 맞는다.

몽구 친구인 주인
(카운터에서 나오며 반갑게)
어이... 뗄로녀스 몽크, 오랜만이다!

몽구
(흥분해서)
내가 돈 줘서 산 그림들 어딨어?

주인
(애써 태연한 척하며)
달라는 사람이 있어서 줬다. 이 카페 분위기하고도 안 맞고...

몽구가 한 방 날리는데 주인이 재빨리 피한다. 휘청거리는 몽구.

몽구
(씩씩거리며)
나쁜 놈, 친구가 선물한 그림을 팔아먹어?

주인
(뻔뻔하게)
이 새끼, 이거 왜 흥분하고 지랄이야!
(카운터에서 돈을 꺼내 건네며)
그 동안 걸어줬으니까 오십 프로는 내 거야!

돈을 낚아채는 몽구, 나가다가 돌아선다.

몽구
(선언하듯)
너 같은 저질들 땜에, 예술가들 인생이 서글픈 거야!

몽구, 그대로 나가버린다.

44. 고급 중식레스토랑
몽구와 수영, 팔짱을 끼고 화려한 레스토랑 홀을 통과한다. 여러 좌석을 가득 매운 부유층 손님들. 몽구, 호화스러운 분위기에 조금 위축된 얼굴이다. 방으로 향하는 몽구와 수영.


45. 중식레스토랑 단독 룸
매우 넓은 장소. 고층 건물 창밖으로 화려한 서울의 야경이 보인다. 위축된 표정의 몽구가 수영과 함께 들어선다. 앉아있는 이훈의 뒤로 벽에 걸린 수영의 세미누드화를 바라보는 몽구, 매우 언짢은 표정이다. 이훈이 일어나며 둘을 반갑게 맞는다.

수영
(환하게 웃으며)
대표님!

이훈
(몽구에게 다가서며)
안녕하세요!

몽구
(얼떨결에 고개 숙이며)
...안녕하세요!

이훈
수영씨가 하도 자랑을 해서 기대했었는데...
진짜 멋지시네요!

몽구의 눈에 여전히 수영의 세미누드화가 신경 쓰인다.
시간 경과 -
셋이 마주앉아 있다. 몽구와 이훈은 어색한데, 수영만이 신나게 애피타이저를 먹고 있다.
잠시 후 –
여자종업원이 들어와, 각자 앞에 놓인 접시에 음식을 덜어준다.

여자종업원
(사무적으로)
...게살이 들어간 샥스핀 수프입니다.

수영, 흘러내리는 긴 머리를 손으로 쓸어 올리나 잘 되지 않는다. 수영, 갑자기 긴 나무젓가락을 집더니 자신의 긴 머리를 고정시킨다. 흥미로운 듯 수영을 지켜보는 이훈.
잠시 후-
긴 머리를 고정시킨 수영, 맛있게 먹고 있다. 식욕이 안 생기는지 몽구는 시큰둥하다. 이훈도 별로 먹지 않는다. 여자종업원이 다시 들어온다.

여자종업원
(각자 앞에 놓인 접시에 음식을 덜어주며)
다진 돼지고기를 해삼으로 싼 금사오룡입니다.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무는 이훈을 보며 놀라는 몽구.

몽구
실내에서 담배 피우시면 어떡해요?

이훈
(빙그레 웃으며 농담조로)
여기 흡연건물입니다.
제 건물이라 제 맘이거든요. 농담이고요...
...가난한 사람들 뜯어먹으려고 자꾸 담배 값 올리는 거,
이 정부 이거... 진짜 나쁜 놈들입니다.

몽구가 반갑다는 듯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낸다.

몽구
(담배를 물며)
그럼 저도 한 대!

몽구가 꼬깃꼬깃한 담뱃갑에서 하나를 꺼내 불을 붙인다.

이훈
(갑자기 몽구를 보며 큰 소리로)
...담배, 거꾸로에요.

몽구, 담배를 거꾸로 문 걸 깨닫고 담뱃갑에서 새 담배를 꺼내려하나 없자 필터가 탄 담배를 그냥 피우려 한다.

이훈
(담배 한 개비를 건네며, 빙그레 미소 지으며)
...이거 피우세요.

잠시 후-
이훈과 몽구가 다 담배를 피운다. 방은 완전히 너구리소굴이다. 수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게걸스럽게 먹는다. 이훈은 여유로워 보이는데 반해 몽구의 표정은 여전히 불안하다.

이훈
(연기를 내뿜고 나서)
...그림 그리는 여자랑 사는 거, 어떠세요?
전 피곤하더라고요.

몽구
(역시 연기를 내뿜으며)
...부인이 화가신가 부죠?

수영
(이훈을 대신해)
응, 박강자 화백이라고 무지하게 유명한 분이야!
뭐 당신이야, 그림에 문외한이니까 잘 모르겠지만...

몽구
(수영을 흘겨보며)
...야, 너는 재즈 모르잖아!

대답 없이 미소를 짓는 이훈. 여자종업원이 들어와 이훈에게 계산서를 들이민다.

몽구
(여자종업원을 향해 호기롭게)
일루 주세요.
(놀라 바라보는 이훈과 수영의 반응을 무시한 채 종업원을 보며)
아니... 뭐하세요, 계산서 달라니까?

이훈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이 선생님!
 
몽구
(말을 자르며)
이 사람한테 잘 해주셔서 제가 대접하고 싶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여자종업원으로부터 계산서를 낚아채며)
주세요.

수영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여보!

몽구
(주머니에서 지폐들을 막 꺼내다가, 계산서를 보고는 수영에게)
...여보, 너도 좀 내야겠다.

수영
(창피하다는 듯)
내가 돈이 어딨어?

이훈
(몽구의 행동을 보다 못해)
이 선생님, 오늘은 제가 초대한 겁니다. 그러니까...

몽구
(말을 끊으며)
아니, 이 선생님이 그림도 사주셨는데, 밥까지 얻어먹으면 안 되죠.

이훈
(난감한 표정으로)
...이 선생님, 제 말 좀 들어보세요. 여긴 제가...

몽구
(더 강하게 이훈을 만류하며)
이 선생님, 오늘 만큼은 절대 안 됩니다.
담에 사주세요.

이훈
(손바닥을 내밀어 보이며 단호하게 큰 소리로)
잠깐만요!
(주춤하는 몽구와 수영을 번갈아 보다, 다시 몽구를 보며)
...이 중국집도 제 가게거든요!

이훈의 말에 풀이 죽는 몽구.

46. 수영의 차 안

굳은 표정으로 운전하는 수영. 몽구가 옆에 앉아있다. 수영의 시야로 보이는 야경, 어지러운 더블비전으로 보인다. 미간을 찌푸리는 수영.

몽구
(갑자기 이훈의 말투를 흉내 내며)
...그림 그리는 여자랑 사는 거, 어떠세요? 전 피곤하더라고요.

수영
(화난 얼굴로)
너, 오늘 뭐야?

몽구
(능청맞게)
내가 뭘?

수영
자격지심이야, 뭐야?

몽구
(천연덕스럽게)
...아니, 그림도 사줬고, 니 재능도 인정해주고, 고맙잖아?
그래서 난 한 턱 내려고 그런 거지...
(비아냥거리며)
아니, 그런데 지가 운영하는 가게래메, 돈은 왜 내니?
돈 좀 있다고 재는 거야?
에이... 재수 없어!

수영
(말을 자르며)
억지 부리지 마!
 세상에 부자도 있고, 우리 같은 사람도 있는 거지...
쪽 팔리게 그런 걸로 질투하구 그래?

몽구
(갑자기)
야, 설교하지 말고... 너 벌거벗은 그림이나 다시 찾아와!
그거 내가 얼마나 아끼는 건지 몰라?

수영
(불쾌감이 가득한 표정으로)
...그것 때문이야?

몽구
...그것 때문에 기분 나쁘다면, 내가 이상한 거야?

수영
(몽구를 노려보다가)
난, 니가 이 정도로 한심한 인간인 줄은 정말 몰랐다.
(조금 생각하다가 냉소적으로)
그럼... 니가 오백만 원 돌려주고 그 그림 찾아올래?


몽구
미안하다.

수영
(누그러지며)
...됐어.

몽구
(자기 말을 이어)
너무 가난해서!

수영
(다시 발끈하며)
뭐?

몽구
(자기 말을 이어)
...너무 가난해서 자기 마누라 벌거벗은 그림 되찾아올 돈도 없고!

수영
(분노로 끓어올라)
...병신, 육갑 떠네!
너는 피아노 못 치는 게 아니라, 인간자체가 저질인 게 문제야!

몽구
(한숨을 길게 내쉬며)
...미안하다! 저질이라서!

잠시 후-
급정거하는 수영의 자동차, 몽구를 내려놓고 바로 출발한다. 홀로 남은 몽구의 망연자실한 표정.

47. 몽구와 수영의 집

침실. 밝은 달이 내부를 비춘다. 화장대 앞에 앉아 있는 수영, 화장을 다 지운 얼굴이다. 콘택트렌즈를 빼려는 수영, 너무 고통스러워한다. 렌즈를 뺀 후 거울을 보는 수영의 충혈 된 눈, 참담하다. 페이드아웃.

48. PC방

사람들이 게임을 하고 있다. 마우스를 움직이는 손, 카메라가 따라 올라가면 몽구가 인터넷으로 안질환인 ‘원추각막’에 관해 검색 중이다. 원추각막 환자는 수년 내로 시력을 잃는다는 내용이 담긴 모니터를 한참 보다가 이내 굵은 눈물을 흘리는 몽구, 흐느껴 운다.


(다음호에 계속)

 

 

* 《쿨투라》 2018년 10월호(통권 5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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