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월평] 찰랑거리는, 나의 뿔 속에 부유물
[문학 월평] 찰랑거리는, 나의 뿔 속에 부유물
  • 이진경(문학평론가)
  • 승인 2019.07.01 06: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날씨가 흐리다. 흐린 날은 내가 볼 수 있는 어떤 날의, 가장 밝은 모습이기도 하다. 때로는 어둡고 불편한 지점에 매달리는 것이 또 다른 가능성으로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거기에서 나는 몇 번이고 나를 고쳐 쓰며 세계에 무관심한 자신을 모른 척하거나 흐릿하게 지워간다. 무른 나의 단단한 행복과는 달리 유계영의 새 시집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에서는 또 다른 차원의 견고함을 발견하게 된다. 뜨거운 “뿔”을 달고 그 속에서 “부유물” 과 함께 떠도는, 마치 밤의 부드러움 같은, 그 단단한 “ 찰랑거림”을 말이다.

 정신과 의사이자 철학자이기도 한 이언 맥길크리스트 는 삶의 모든 입자가 시에 들어 있어, 고대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인식과 정서적 의미의 자리였던 대뇌변 연계 깊숙한 곳에서부터 존재에게 맹렬하게 공격을 퍼붓는다고 말했다. 그의 말대로 ‘시’는 누구나 한번 쯤은 경험하는, 피할 수 없는 어떤 강렬한 타격 혹은 대면일 지도 모른다. 유계영의 시에서 이것은 존재가 필연적으로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와 마주하는 것으로 형상화된다. 「시」라는 제목의 시에서 시인은 (시적) 공격을 바라 보는 존재의 텅 빈 눈동자를 재현하며 ‘시’라는 ‘불안’에 대해 이야기한다. 잠시 시를 살펴보자.

 “약속을 정한 순간부터 나는 늦고 있”으며 “빈손을 덜렁덜렁 흔들고 있”다. “미래”는 “시”를 애태우며 “나는 이미 엉엉 울고 있다”. 그 울음 위에 시인은 자신을 침범한 ‘시’를 쓴다. 내적 성찰에 다름 아닌 ‘시’는 자신으로부터 비롯해 “구멍 속에서 구멍을 지우더라도” 같을 수 없는 “훔쳐보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는 시”와 “아무것도 훔쳐보고 싶지 않은 사람”에 대한 구분으로 나아간다. 평범한 나는 ‘시인’으로, 평범한 시는 나의 ‘시’가 되어 “절망을 정말로 오기誤記하고 믿고 망가져버리”는 수준으로 내려간다. “어깨 위가 사라지는 꿈속”에서 그는 “국물 속에 있다”가 나온 “붉게 물들어 있”는 “나무젓가락”, 어디에서 발생했는지 모를 “소리” 대신 대상과 접촉-충돌 후 태어난 “맛”을 존재의 증거로 선택한다.

 여기서 시인은 여기저기에 “머리”를 들이밀며 오로지 윤리적인 차원에서만 다루어져야 할 존재 인식을 위한 접촉-충돌을 궁리한다. “천사의 고리”, “땅굴”, “정오의 커튼”으로 이어지는 이미지와 초월적이거나 바닥 저 아래의 심연이거나 혹은 빛을 한껏 움켜쥔 커튼, “어느 구멍을 골라들어야 할”지에 대한 고민은 시인의 질문이 뻗 어나간 축약된 세계로 그려진다. 결국 아무도 요청하지 않았지만 시인이 스스로에게 내민 물음은, 내가 규정하 지만 나라고 단정할 수 없는 ‘존재’를 더듬어가는 과정이다. 시인이 흘린 정신의 핏빛 발자국을 더듬어나가는 경로인 것이다. 또한 이 길은 “몇 개의 얼굴을 돌려쓰며 찾아온” “절망”의 “단일한 얼굴”을 볼 수 있는 정직한 노정이기도 하다.

 존재를 인식-구축하는 과정으로서의 “절망”을 들고 있는 시인의 “어깨 위”는 물음표가 계속 자라는 문장과도 같다. 시인이 ‘시’와 충돌하고 나서야 비로소 떨어져 나올 수 있었던 ‘시’는 그의 현재와 과거, 미래를 오가며 끝나지 않는 물음의 연쇄로 그려진다. 즉 「시」에서 그는 시인이 어떤 존재이기에 ‘시인’이 된 것인지 알 수 없는 지점을 남긴다. 그러나 끝없는 질문의 여정 끝에 그가 비롯한 곳에 대한 실마리는 시집 마지막에 실린 시 「웃는 돌」 에서 발견된다. 여기서 시인은 프랑스의 시인 외젠 기유빅Eugene Guillevic의 시 「만약 언젠가」를 서두에 인용하고 있는데, “만약 언젠가/돌 하나가 너에게 미소 짓는 것을 본다면,//그것을 알리러 가겠니?” 라는 기유빅의 날카로운 질문은 유계영의 뿔 속의 찰랑거리는 ‘감각’을 투과하며 오랜 시간 이어져 온 질문에 대한 응답을 갈음하는 듯하다.

 시인의 말을 쓰다가 완성해버렸다는 시 「웃는 돌」에서 화자는 인간이 시-문학과 만나 시인이 되어버리는, 어쩌면 최초의 질문일지도 모를 의문 앞에서 (돌을) “먹는 내가 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사람들”과 “또 다른 사람들”은 “나”에게 “찬사를 퍼붓”거나 “심드렁해”하면서 시인을 오해한다.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사물이자 서로에게 도무지 도달할 수 없는 시선들의 교차 속에서 “ 나”는 그런 “사람들”에게 바쳐진 제물인 “뿔” 달린 자신 을 인식하는 것이다. 그 안의 많은 “부유물”들은 “빌려” 주길, “잡아”주길 원한 “그런 이야기들”에 가깝다. 그에 대해 “두 번씩 우는” “나”는 “격려”받지만 “한번 더 묻” 는 “나”는 “말귀도 어두운 멍청이”가 되어 “걷어차”이고, “부끄러워”한다. “어쩌다 부끄러운 습관밖에 남지 않”은 “나”는 (돌을) “먹는 나”이고 “커다란 바위 하나는 다 먹 을” “생각을 멈추지 않”는 나로 그려진다. 그는 시인이어서 혹은 시인이기 때문에, 쏟아지는 “오래된 돌의 기억” 을 “투명”한 “부유물”로 부르며 “해변에 남”는다.

 “혼자 열심히 쪼개지면서” “다른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그 자리를 지키려는 태도는 어쩌면 ‘미소 짓는 돌을 본 자’와 같은 열列에 서서 세계를 바라보아야만 하는 시인의 숙명이 아닐까. 이것은 같은 열에 설 누군가를 기다려온 그의 ‘과거-진행’이 무연한 진리를 품은 바다로 뛰어들기를 거부하는 행위이자 자신을 부수고, 갈고, 닦는 시인의 그치지 않는 물음이 도달한 윤리적 차원 그 즈음에서 재현되는 것이기도 하다. 시인이 자신을 증거로 내놓으며 창작되는 것이 ‘시’라면 말이다.

 하이데거는 사물이 놓여 있는 장소에서 일을 하는 일반적인 방식에 따라 실존을 찾을 수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이때 실존은 구체적인 세계 속에서만 존재하며, 더 나아가 우리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을 때에만 성립한다는 것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유계영의 시집 『이런 얘기가 좀 어지러운가』는 자신의 발끝부터 머리 꼭대기까지를 홀로 오가며 실존을 찾는 시인의 내력來歷,耐力이다. 그의 또 다른 시 「신은 웃었다」의 마지막 구절처럼, 그는 “손바닥 위에서 빛나는” “몰락”이 되어 “얼굴을 묻”으며 과거의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환기하고 있으니 말이다. 세계와 관계하고 있는 ‘나’의 언행을 책임지려 하는 시인의 “부끄러운 습관”이야말로 지금-여기에서 우리가 한번쯤은 생각해보아야 할 제언은 아닐는지. 그래서 나는 “혼자서 두 번씩 첨벙첨벙”하며 만든 ‘질긴 그물’ 같은 이 시집에 또 다른 누가 걸려들어 어떤 어지러움을 ‘대답’으로 내놓을 것인지 기다려진다.

 

 

* 《쿨투라》 2019년 7월호(통권 61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