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의 Theme] 조용필, 영원한 예술의 파문
[8월의 Theme] 조용필, 영원한 예술의 파문
  • 유성호(본지 주간, 한양대 국문과 교수)
  • 승인 2019.08.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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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한 해 동안 ‘문학으로 읽는 조용필’을 연재했다. 그의 삶과 노래를 통시적으로 엮어가는 흐름보다는 그때그때의 키워드나 테마를 충족하는 노래들을 묶어 조용필의 주류 미학을 탐색하는 방법을 택해보았다. 한 곡 한 곡의 결을 짚어가면서, 처음 짐작했던 것보다 그의 노래가 주는 파문이 훨씬 크고 다양한 문양으로 그려져 갔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많은 작품을 인용하였고, 그 노랫말이 주는 의미들을 조용필 개인사 문맥은 물론 시대적 맥락에 비추어 분석도 해보았다. ‘가왕’이라고 그를 불러온 것이 꼭 그의 가창력이나 오랜 생명력 그리고 그것을 감싸고 있던 대중적 인기 같은 것에서만 연유하는 것이 아니었음도 분명하게 확인하였다. 그는 대중예술의 일상성과 평균성에서만 보자면 너무도 위대한 ‘시대의 노래꾼’이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대중예술이 기울어가기 쉬운 통속성이나 하향평 준화의 가능성을 자신과 철저하게 분리하면서, 노래가 가닿을 수 있는 존재론적, 의미론적 권역을 정점에서 이룩해낸 ‘가왕’이었다. 앞으로 이 연재분들을 고치고 다듬고 또 거기에 새로운 논의들을 여럿 보태 조용필 노래가 주는 영원한 예술의 파문을 미학적으로 구체화해보고자 다짐해본다.

 

  돌아와요 부산항에 - 조용필 노래의 시원始原

  조용필을 대중들 뇌리에 선명하게 각인한 첫 출발은 그 유명한 <돌아와요 부산항에>였다. 이 노래는 황선우가 작사하고 작곡하여 1972년에 발표되었 다. 가사 속에 나오는 “그리운 내 형제”는 당시 고국을 그리워했던 재일동포를 가리키는 것이며, 그때 이 노래는 동포애를 강조한 맥락으로 크게 반향을 얻기도 했다는 점은 이미 많은 연구자들이 밝혀놓은 바 있다. 노래의 원곡은 1970년 통영 출신 가수 김해일이 취입한 <돌아와요 충무항에>였다고 하는 데, 황선우가 지금의 모습대로 개사를 하였고, 1976년 서라벌레코드에서 이 노래를 넣어 조용필 비정규 앨범으로 발매하였다. 그러다가 조용필이 이 곡 을 다시 조금 더 빠르고 경쾌한 분위기로 편곡하여 1980년 정규 1집에 수록하였는데,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바로 이 1980 버전이다.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형제 떠난 부산항에 갈매기만 슬피 우네
오륙도 돌아가는 연락선마다
목메어 불러봐도 대답 없는 내 형제여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가고파 목이 메어 부르던 이 거리는
그리워서 헤매이던 긴긴 날의 꿈이었지
언제나 말이 없는 저 물결들도
부딪쳐 슬퍼하며 가는 길을 막았었지
돌아왔다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

ⓒYPC프로덕션

  노래가 불리고 유통된 여러 주변적 맥락을 배제하고 보아도, 이 노래는 호소력 있는 조용필의 목소리를 극점에서 빛나게 한 명곡이 아닐 수 없다. ‘동백섬’이나 ‘오륙도’로 ‘부산항’의 공간적 구체성을 도드라지게 표현한 것은, 마치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에서 ‘삼학도’, ‘노적봉’, ‘유달산’ 등을 목포 주위 배경으로 배치하는 방법을 빼닮았다. 그러고 보니 어떤 지역을 다루는 노래는 그 구체적 지명을 적극 소환하여 호환할 수 없는 경험적 기억을 각인하게 마련이었을 것이다. 현인의 <서울 야곡>에서도 ‘충무로’, ‘보신각’ 등 서울 밤거리를 쏘다닌 이들의 기억을 자극하는 장소들이 나오고, 나훈아의 <대동강 편지>에서도 대동강을 익숙하게 환기하는 ‘을밀대’, ‘부벽루’ 등이 반드시 호명되고 있지 않은가. 이제 우리는 ‘부산항’을 그렇게 동백섬의 봄과 함께 떠올린다.

  ‘동백섬’에 꽃이 피고 봄이 왔다. 생명력으로 가득한 시절이지만, 바다 위를 날아다니는 갈매기들은 “형제 떠난 부산항”에서 슬피 울고 있을 뿐이다. 여기서 ‘부산항’은 연락선을 타고 떠나 이제는 목메어 불러보아도 대답 없는 ‘형제’를 환기하는 부재의 장소이다. 그렇게 떠난 곳으로 다시 귀환해달라는 호소인 “돌아와요 부산항에 그리운 내 형제여”는 이 노래의 결구結句이자, 부재를 극복하는 방식으로 ‘그리움’을 택함으로써 이 노래를 보편적인 연가戀歌로 그 소통의 범주를 확장시킨 명구名句이기도 하다. 2절로 건너가면 “그리워서 헤매이던 긴긴 날의 꿈”을 간직한 이의 마음을 “언제나 말이 없는 저 물결들” 이 화답하고 있다. “돌아와요”를 “돌아왔다”로 바꿈으로써 원망願望이 불완전성으로 귀환의 완결형으로 노래하고 있는데, 이는 부산항을 떠나 돌아오지 않던 형제를 그리다가 결국 그들이 돌아왔다는 귀환 서사를 배치하는 과정으로 이어진다. 그래서 이 노래는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모든 이들의 마음을 위안해준 시대의 노래가 된 것이다. 어림잡아 셈해보면 이미 반세기 전에 만들어져 조용필 노래의 시원始原이 되어준 <돌아와요 부산항에>는, 파란 많았던 한국 근대사의 한 대목을 절절하게 반영하면서도, 조용필 허스키 보이스의 정점을 예술적으로 각인했던 일대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운스 – 조용필 노래의 심장

  2013년은 조용필의 ‘위대한 탄생’이 한 번 더 이루어진 기념비적인 해다. 그해 4월 조용필은 18집 앨범 《OVER THE RAINBOW》(2003) 이후 꼭 10년 만에 정규 19집 앨범 《HELLO》를 발표하였다. 여기 실린 <BOUNCE>는 세대를 넘어 크나큰 반향 과 기록들을 조용필로 하여금 남기게끔 해주었는 데, 어느새 예순에 접어든 가왕이 부른 이 노래로 하여 우리 모두의 심장은 새롭게 뛰고 또 설레기까지 했다.

그대가 돌아서면 두 눈이 마주칠까
심장이 Bounce Bounce
두근대 들릴까봐 겁나
한참을 망설이다 용기를 내
밤새워 준비한 순애보 고백해도 될까
처음 본 순간부터 네 모습이
내 가슴 울렁이게 만들었어
Baby You're my trampoline
You make me Bounce Bounce

수많은 인연과 바꾼 너인 걸
사랑이 남긴 상처들도 감싸줄게
어쩌면 우린 벌써 알고 있어
그토록 찾아 헤맨 사랑의 꿈
외롭게만 하는 걸
You make me Bounce
You make me Bounce

Bounce Bounce
망설여져 나 혼자만의 감정일까
내가 잘못 생각한 거라면 어떡하지 눈물이 나
별처럼 반짝이는 눈망울도
수줍어 달콤하던 네 입술도
내겐 꿈만 같은 걸
You make me Bounce

우린 벌써 알고 있어
그토록 찾아 헤맨 사랑의 꿈
외롭게만 하는 걸
어쩌면 우린 벌써
You make me Oh You make me

ⓒYPC프로덕션

  이 노래는 조용필을 거의 처음 대하는 이들에게까지도 폭넓게 퍼져갔다. 사랑하는 이를 생각하면서 심장이 튀어오르는 듯한 소리를 듣고 있는 이 목소리는, 나이를 무색하게 만드는 원형적 ‘바운스’의 음악을 우리에게 선명하게 들려준다. 음악적으로는 일렉트릭 기타와 신시사이저를 앞세우고 드럼으로 받치는 록 형식을 택한 이 노래는, 노랫말에 영어가 섞여 있지만 일찍이 조용필이 <서울 서울 서울>에서 영어 가사를 부분적으로 도입한 사례가 있으니 꼭 생소한 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대’라는 2인칭은 돌아서면 곧 두 눈이 마주칠 만한 지근의 거리에 있지만, 마치 김소월의 「산유화」에 나오는 “저만치”의 거리처럼,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일 뿐이다. 그러니 “심장이 Bounce Bounce”하고 두근대는 것이 들릴까봐 겁이 나지 않겠는가. 한참을 망설이다 용기를 내서 “밤새워 준비한 순애보”를 고백하려는 ‘나’의 모습은 그 자체로 애틋하고 또 아름답다. “처음 본 순간부터 네 모습이/내 가슴 울렁이게” 했다는 고백을 통해 ‘나’는 비로소 ‘너’야말로 자신의 트램펄린이고 끝없이 심장을 튀어오르게 했노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수많은 인연”을 물리치고 “사랑이 남긴 상처들”마저 감싸줄 수 있을 것 같아 선택한 ‘너’는 “그토록 찾아 헤맨 사랑의 꿈”을 완성시켜준 둘도 없는 존재이다. 비록 “나 혼자만의 감정”일지도 모르지만 “별처럼 반짝이는 눈망울도/수줍어 달콤하던 네 입술도/내겐 꿈만” 같이 다가오는 순간만은 ‘나’와 ‘너’가 하나가 되는 지극함을 선사해준다. 그러니 튀어오를 것 같은 심장의 운동이 바로 이 노래의 리듬이 되어주고, 사라져갈 것 같은 불안도 사랑으로 승화되는 순간을 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 이 노래는 조용필 최고의 러브송 가운데 하나로 남게 될 것 이다. 조용필 노래가 오래도록 들려주었던 심장의 떨림과 울림이 이 노래로 하여 폭발적으로 다가온 셈이니까 말이다. 그가 노래를 시작할 무렵 어디론가 떠났던 그리운 사람은 이렇게 그의 심장 깊은 곳으로 돌아온 것이다.

 

  위안의 미학과 그 ‘너머’

  다시 그의 노래가 가지는 위대함으로 돌아가 보자. 조용필의 이 항구적 흡인력은 어디에서 오는가. 재차 강조하지만 그것은 그의 가창력, 무대 매너, 정확한 가사 전달력, 다양한 장르 수용 능력, 노래마다 달라지는 해석력, 발전적 지속성 등에서 온다. 그런데 조용필의 노래를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1970~80년대 대중의 인기를 얻은 가수들의 노래에서 간혹 발견되는 특별한 정치적, 상황적 메시지가 그의 노래에는 없다는 점이다. 그는 신중현, 김민기, 송창식, 한대수, 정태춘, 하덕규 등이 들려주었던 시대적 질고에 대한 메시지를 뚜렷하게 들려주지 않았다. 하지만 우리는 이들의 노래를 다 합쳐도 없는 그 ‘무엇’이 조용필 노래에만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그는 <한 오백년>이나 <강원도 아리랑>처럼 고전적으로, <고추잠자리>나 <못찾겠다 꾀꼬리>처럼 회상적으로, <친구여>처럼 원형적으로, <킬리만자로의 표범>처럼 인생론적으로, <꿈>처럼 공감적으로 우리 시대를 다양하게 그려낸 탁월한 예술가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행을 떠나요>처럼 신나는 노래나 <미워 미워 미워>나 <그 겨울의 찻집> 같은 사랑 노래가 조용필 인기 비밀의 근원적 저류底流를 형성하고 있다는 점은 말할 것도 없으리라. 나는 이 모든 것을 ‘위안의 미학’이라고 명명하였다. 그의 노래를 통해 우리는 희열이나 분노 대신 슬픔을 통한 위안을 끝없이 얻어왔다. 또 하나, 바로 전시대의 인기가수였던 남진이나 나훈아와 비교해볼 때, 조용필은 외관에서 그들보다 훨씬 왜소하거나 화려하지 않다는 점을 이야기할 수 있다. 당시는 전두환이라는 비정통적 빅브라더가 초국가적 지배를 하고 있을 때인지라, 사람들은 오히려 그 역상逆像으로서 자신들처럼 작고 평범하고 친근한 가수들을 좋아했다. 1980년대 내내 전영록, 이용, 구창모, 이명훈, 박남정, 변진섭, 신승훈, 김건모 등으로 인기가수의 계보가 이어진 측면도 이를 뒷받침한다. 그 점에서 조용필은 모두에게 ‘오빠’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친근한 ‘오빠’가 들려준 ‘위안의 미학’이 50년을 흘러 여기까지 와 있다. 하지만 우리의 이야기를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조용필은 위안의 미학과 그 ‘너머(beyond)’를 상상하고 실천해온 우리 시대의 가왕이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 시대가 마주한 여러 역사적 사건들 앞에 누구보다도 상징적인 노래들을 배치함으로써, 자신의 생애가 시대의 거인으로서의 풍모를 드러낼 수 있도록 스스로를 배려하고 또 이끌어갔다. 이는 우리가 끝내 보듬어야 할 조용필의 참된 의미일 것이다. 그리고 그 영원한 예술의 파문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 《쿨투라》 2019년 8월호(통권 6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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