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형욱 작가의 와인 인문학] 보르도(Bordeaux)
[고형욱 작가의 와인 인문학] 보르도(Bordeaux)
  • 고형욱(작가, 와인평론가)
  • 승인 2018.10.01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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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도는 와인의 수도(capital)다. 보르도 전역에 10,000개가 넘는 샤토들이 산재해 있다. 연간 10억 병이 넘는 와인이 생산된다. 양적으로만 엄청난 게 아니다. 샤토 마고, 라투르, 라피트처럼 세계 최고의 명성을 다투는 와인들이 이곳에서 나온다. 최고급 와인의 전통을 확고히 하고 있다. 그래서 보르도는 와인 마니아들에게 언제나 이상향과 같은 곳이다. 캘리포니아와 칠레 등 전 세계 수많은 와인메이커들은 보르도 와인을 모범으로 삼아 보르도와 같은 와인을 만들고자 노력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로마시대부터 보르도에 포도나무를 심고 와인을 생산했다. 당시에는 보르도 지방을 ‘물의 나라(Aquitania)’라고 불렀다. 이탈리아 반도를 떠나 지상의 끝이나 다름없는 곳에서 로마인들이 드넓은 대서양과 마주했을 때의 감동은 엄청났을 것이다. 지중해 문명 시대에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를 접한다는 것은. 대서양뿐만이 아니었다. 거대한 지롱드(Gironde) 강이 내륙을 가로지르고 있다. 보르도는 물의 나라라는 이름에 걸맞게 물이 넘치는 곳이었다. 그래서 보르도라는 지명은 보르 도(bord d’eau)라고 읽으면 ‘물 가’라는 의미가 되기도 한다.

지롱드 강을 중심으로 동쪽은 우안, 서쪽은 좌안으로 부른다. 우안에는 생테밀리옹(Saint-Émilion), 좌안에는 메독이 있다. 와인 애호가들에게는 성지나 다름없는 곳이다. 전 세계 와인 마니아들이 와인의 원류를 알기 위해, 전통을 느끼기 위해 이곳으로 찾아온다.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생테밀리옹 마을은 중세에도 피레네 산맥을 넘은 후 카미노 길을 걸어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향하던 길목이었다. 8세기경 수도승 에밀리옹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빵을 숨겨 가다가 검문을 받게 된다. 군인들의 질문에 에밀리옹은 장작이라고 대답했다. 군인들이 확인해 보니 빵은 장작으로 변해 있었다고 한다. 이후 에밀리옹은 바위에 굴을 파서 은거했고, 마을 이름도 생테밀리옹이 되었다. 지금은 그 자리에 하나의 암석으로 만들어진 교회가 우뚝 서 있다. 포도나무로 둘러싸인 마을, 멀리 지평선까지 모두가 포도밭이다. 교회 종탑에 올라가서 사방을 둘러보면 포도나무가지들이 나를 휘감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탁 트인 경관이 마치 다른 세상에 와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만든다.

트램을 타고 지롱드 강을 건넌다. 2003년 개통된 트램은 20세기와 21세기를 이어주는 듯하다. 보르도 시내는 중후한 분위기다. 생트카트린(Sainte-Catherine) 거리는 고풍스럽다. 거리를 빠져나가면 대극장이 보인다. 프랑스 대혁명 직전에 건축된 대극장은 파리 오페라 극장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지금도 오페라와 발레 공연이 지속적으로 열린다. 흔히 보르도의 ‘3M’이라고 불리는 인물이 있다. <수상록>의 저자 몽테뉴, <법의 정신>을 쓴 몽테스키외,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수아 모리악이 그들이다. 화가 로트렉도 말년에는 어머니가 거주하고 있던 보르도의 샤토에서 휴가를 보내곤 했다. 강둑을 따라 걷고 있으면 강바람과 함께 문화 예술의 향기들이 스친다.
지롱드 강을 따라 북으로 올라가면 와인 명산지 메독(Médoc)으로 이어진다. 메독은 ‘가운데 위치한 땅’이라는 의미다. 지중해와 지롱드 강, 두 개의 큰 물 사이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이 온도의 급격한 변화를 막아주면서 포도나무가 자라는 데 이상적인 환경을 제공한다. 루이 15세는 보르도의 지방장관을 역임하고 온 리슐리외 공을 만나서 물었다. “어찌 공은 보르도로 가기 전보다 25세나 젊어 보이는 것이오?” 리슐리외는 대답했다. “폐하, 제가 젊음의 샘이라고 찾았겠습니까? 제가 찾은 건 샤토 라피트 와인인데, 올림푸스의 신주神酒와 비견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전설처럼 메독 와인들은 프랑스 왕가와 귀족들이 가장 좋아하는 와인으로 자리매김했다. 우아함의 대명사인 샤토 마고, 강건함의 상징인 샤토 라투르, 매년 유명화가의 그림으로 라벨을 디자인하는 샤토 무통 로칠드와 같은 쟁쟁한 이름들. 이 와인들이 보르도 와인의 명성을 공고히 한다.

 

 

* 《쿨투라》 2018년 10월호(통권 5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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