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Theme] 가왕 조용필
[8월 Theme] 가왕 조용필
  • 임진모(대중음악평론가·방송인)
  • 승인 2019.08.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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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 그를 가왕이라고 하는 걸까. 본인은 그토록 부담스럽다고 손사래를 치는데 누구나 조용필하면 바로 가왕이라고 일컫는다. 그 호칭의 세월도 길다. 나이 들어서 그렇게 부르는 게 아니라 한창 때인 1980년대 중반에 벌써 어느 매체에서인가 가왕이 라는 수식을 들먹였다. 왕王은 서열과 등급에서 최고인 동시에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존재라는 점을 전제하면 조용필을 왕으로 특대特待하는 이유는 명백하다.

   국내 대중음악 분야에서 가장 위, 꼭짓점에 위치한 인물이기 때문이다. 이전과 이후에 그보다 역사적 위상을 위로 가져갈 수 있는 인물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굳이 예를 들자면 나훈아와 서태지) 세대관통력이나 인기지속성, 폭넓은 평판 등을 고려하면 조용필보다 객관적 우위를 점하는 가수는 없다.

  대중연예인의 인기를 논할 때 활동의 전성기 기간은 매우 중요하다. 단지 ‘인기가 식지 않았다’거나 ‘그를 기억하는 사람은 많다’가 아니라 ‘현장에서 뛰면서 진짜 대중적 인기가 펄펄 숨 쉰 기간’과 ‘그것을 입증할 음원판매량이나 차트기록의 보유’에 있어서 비교불가, 압도적 선두여야 한다.

  그를 누구나 아는 이름(household name)으로 만들어준 1975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에서 사실상 마지막 히트송이라 할 1991년의 <꿈>까지 중간에 조금도 슬럼프가 없는 그야말로 ‘진정한 전성기’가 자그마치 16년이다.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롱런이다. 물론 이후에도 그의 존재감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2013년 <바운스>의 히트까지 포함해서 그의 전성기를 올해 지금까지 쳐서 44년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다)

  인기만 있다고 가왕으로 숭앙되는 게 아니다. 그간 해온 예술적 완성도와 파장 즉 역사적 영향력을 살펴야 한다. 조용필은 LP 시절 밴드 위대한 탄생과 함께 발표한 앨범 하나하나마다 예술의 혁신을 불어넣으면서 ‘앨범예술’의 미학을 확립했다. 예를 들어 3집은 세대포괄, 4집은 자기표현력, 7집은 장르다양성 등의 키워드를 실험한 앨범이다. 우리가 서구 팝을 넘어서 (과거에는 무시하던) 가요의 앨범을 구매하게 된 결정적 계기의 인물이 조용필임에 이의를 제기하기는 어렵다. 아마도 그를 가왕으로 간주하는 데는 이러한 ‘실험주의’도 작용한다고 생각된다. 조용필은 연예인 이전에 ‘음악가’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가수의 기본이라는 가창력 측면에서도 그는 단연 1등이다. 가왕 등극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다. 그는 중저음과 높이 측면에서, 두성 흉성 가성의 구사를 보더라도, 음의 유지 굴곡 떨림과 관련해서도 가장 깊고, 듣기 좋고, 드라마를 연상시키는 소리를 낸다. 지난해 활동 50주년 기념 공연을 관람한 사람들이 일제히 털어놓는 소감이 ‘아직도 소리가 전성기 때와 같다’는 것이다.

ⓒYPC 프로덕션

  여기에는 무서운 자기 단련과 관리의 고통이 개입한다. 소리가 타고났다고 하기보다는 열심히 훈련해서 소리를 획득했다는 묘사가 적절하다. 그래서 조용필은 스스로 천재가 아니라 노력의 산물이라고 강조한다. 힘이 떨어지지 않아야 나오는 중저음 유지를 위해 나이 70살인 지금도 땀을 흘리는 것을 보면 그 태도(attitude) 때문에도 그는 마땅히 가왕이다.

  예술적으로 뛰어나도 그에게 참고할 게, 얻을 게, 배울 게 하나도 없다면 존경을 받기는 어렵다. 가왕은 존칭이다. 음악가에게 가장 중요한 이 태도 측면을 잠깐 말하자면 그는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성공한 뒤 대마초 이력에 연루되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은퇴’를 택했다. 그리고 훗날을 기약한 채 부족 했던 소리를 연마하기 위해 판소리의 명인을 찾아 2년 반의 혹독한 훈련에 매진했다.

  이런 혁신을 실천하는 가수는 거의 없다. 이건 음악에 투신했을 때만이 가능한 것 아닐까. 스타가 되려는 욕망만으로 가왕을 넘볼 수는 없다. 딴 가수들이 ‘잊히지 않으려는 안간힘’으로 TV 예능프로에 나와 키득키득 거릴 때 그는 오로지 공연에서 노래 부르거나 노래에 대한 고민으로 일관했다. 그가 가왕으로 존경받는 것에는 이러한 ‘가수로서의 천착’, 그 기본 숭배도 큰 몫을 한다.

  가수로서 가창력과 더불어 음악적인 면을 놓칠 수 없다. 1990년대 이전까지 그의 음악을 들어보면 그때까지 존재했던 모든 한국 대중음악이 그에 와서 정리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팝, 록, 블루스, 소울, 컨트리, 재즈, 댄스, 아이돌 팝 그리고 트로트, 국악, 민요, 동요 등등… 장르의 패러다임과 관련해 이렇게 지평이 광대한 가수는 없었다. 어쩌면 조용필 음악은 ‘한국 대중가요의 완결’일지 모른다.

  더 중요한 것은 이 모든 스타일이 조용필의 목을 통해 ‘그만의 소리’로 통합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조용필은 결국 조용필이라는 장르를 했다!”는 평가를 얻는 것이다. 흑백을 목소리로 통합했다는 엘비스 프레슬리와 크게 다를 게 없다. 이를테면 여러 장르를 잡다하게 늘어놓은 게 아니라 잘 섞고 솎아내 그만의 개성으로 빚어냈다는 의미. 여기서 또 다른 수식, ‘한국 대중음악의 용광로(melting pot)’가 잉태한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 새 음악이 부지기수로 쏟아졌다. 이 대목이 중요하다. 그의 음악이 이 ‘새것들’과 관련을 맺지 못하면 그는 ‘1980년대의 가왕’으로 시대적 제한에 묶이게 될 것이었다. 조용필의 진정한 위대함은 나이가 들어감에도 최신의 트렌드를 기민하게 또 지속적으로 예의주시한다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YPC 프로덕션

  지난 2013년 <바운스> 열풍이 남달랐던 것은 최고참의 아티스트가 가장 영young한 앨범을 가지고 돌아왔기 때문이었다. 그는 실제로 EDM, 브릿팝, 힙합 등의 핫한 트렌드를 교배한 젊은 사운드를 통해 중2, 중3학생들과 (감수성의) 접점을 마련하고자 했다. 당시 기자회견에서 젊은 음악을 만든 배경에 대한 질문에 “새로운 나, 또 다른 나를 찾고자 했다” 는 답은 메아리를 울렸다.

  만약 <바운스>와 <헬로>를 기존방식으로 곡을 수집하고 노래를 불렀다면 결코 청소년과 20대가 반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중학생이 듣기에 마치 아이돌 음악을 듣는 것 같은 ‘동시대성’과 ‘업데이트’를 구현했기에 그들 사이에 스트리밍 폭발이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사운드가 푸르디푸르고 젊디 젊었다.

  당시 우리 나이로 예순 넷이었던 그가 10대들과 소통했다는 것은 국내 대중음악 역사의 기념비적 모멘트로 남아있다. 음악이야말로 세대분리를 넘어 세대동행으로 향하게 하는 최적화된 접근법이라는 깨침을 실천한 셈이다. 이때 그는 1980년대의 가왕이 아니라 시대불변의 ‘영원한 가왕’으로 방점을 찍었다.

  모든 게 음악이다. 조용필은 음악 듣기를 통해서 가수로서 가장 중요한 젊은 감각을 유지하려고 한다. 그래서 매일매일 음악을 듣는다. 더 스크립트, 시아, 알란 워커 등 괜찮다 싶은 해외 가수의 앨범은 모조리 찾아서 ‘열청’하고 국내 젊은 가수의 음원 청취도 거르지 않는다. 방탄소년단이 세계적으로 선풍을 일으키는 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다며 그들의 글로벌 성공을 찬탄했다.

  가왕이란 표현은 대중의 그에 대한 가혹한 요구라고도 할 수 있다. 잠시도 쉬어서는 안 된다. 그는 지난해 활동 50주년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이런 말을 했다. “나이 먹으면 제일 안 되는 게 목소리죠. 내가 소리에서 어느 부분이 가장 취약한가, 나빠졌느냐는 것은 연습을 하다 보면 나옵니다. 나이가 들면 중저음이 떨어집니다. 그래서 사무실 위에 스튜디오가 있는데 스튜디오에서 중저음 곡만 골라서 집중적으로 중저음 연습을 합니다.”

  나이 칠십에도 연습을 들먹인다. 결국은 기본과의 밀착이다. 가왕은 ‘진정한 음악가’의 다른 말이다. 엄청난 부담이 스민 이 말을 조용필이 어찌 편하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되는 날까지, 허락하는 날까지는 (노래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가왕은 분명 축복이지만 동시에 시련의 언어다.

 

 

* 《쿨투라》 2019년 8월호(통권 6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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