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Theme] 한 소녀에게서 다른 소녀에게로, 세대를 잇는 가왕
[8월 Theme] 한 소녀에게서 다른 소녀에게로, 세대를 잇는 가왕
  • 김미향(에세이스트, 출판평론가)
  • 승인 2019.08.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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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상하게도 어릴 때부터 나는 옛날 노래들을 흥얼거리곤 했다. 그렇다고 또래들이 좋아하던 H.O.T나 핑클 등으로 대표되는 아이돌을 좋아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신화 팬클럽 ‘신화창조’의 일원으로서 주황색 비옷을 입은 채 신화를 따라 전국 각지를 돌며 “신화 산”을 외치곤 했으니까. 결국 아이돌 음악과는 별개로 7080 음악도 좋아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물론 흘러간 노래들을 좋아하는 것은 친구들은 모르는 나만의 비밀이었다. 친구들 중 옛 노래에 관심 있는 아이들은 아무도 없었기에 집에서 엄마 손을 잡고 노래를 부르곤 했다. 당시 지역방송에선 7080 음악의 뮤직비디오를 배경으로 흡사 노래방 처럼 가사가 자막으로 나오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또렷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한 시간이면 한 시간, 두 시간이면 두 시간씩 여러 노래들이 저마다 다른 뮤직비디오를 배경으로 흘러나오곤 했다. 그러면 나는 TV 앞에 앉아 그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흘러간 노래들을 불러댔다. 그중엔 아는 노래도 있었고 모르는 노래도 있어서 처음 듣는 노래면 그 자리에서 흥얼거리며 멜로디를 익혀 나갔다. 조용필의 노래들도 그때부터 내게 익숙해졌는데, “창가에 서면 눈물처럼 떠오르는 그대의 흰 손”으로 시작되는 <창밖의 여자>를 이때 알게 됐다. 음정과 박자가 엉망인 나의 노래를 BGM 삼아 엄마는 잘도 맛난 음식들을 만들곤 했다. 보글보글 찌개 끓는 소리가 가왕의 노래와 어우러져 추억되는, 유년기의 한 페이지다.

  또래와는 달리 7080 음악들을 잘 알게 된 계기는 또 있다. 어린 나를 위해 아빠가 사 온 게임기 덕분이다. 아빠의 친구가 당시 유명했던 대우전자의 지점을 차렸는데, 개업식에 간 아빠가 게임기를 사 온 것이다. 그 게임기에는 패미콤 게임을 즐길 수 있도록 만들어진 패밀리카드가 있었는데 거기에 별도로 판매되는 노래방 팩을 꽂으면 홈노래방이 완성 됐다. 노래방 팩은 만화 주제가와 동요들이 담겨 있는 아동용 팩 하나, 7080 노래들이 담겨 있는 성인 용 팩 하나로 구성돼 있었다(어쩌면 아빠가 많은 팩 들 중 이 두 팩만 사 왔을 수도 있다). 이 게임기를 가지고 있는 다른 사촌들은 이 노래방 팩이 재미없다고 전혀 쓰질 않는다던데 나는 홈 노래방이 그렇게 재미날 수가 없었다. 사운드는 그리 좋지 않았지만 별도의 구멍에 마이크를 연결하면 진짜 노래방 느낌이 팍팍 났다. 아파트에 살던 때라 큰소리로 노래를 부를 수 없어 점수는 그리 높게 나오지 않았다. 아마 90점을 넘겨야 축하 팡파르를 들을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노래방 팩을 통해 나는 숱한 7080 노래들을 접하고 익힐 수 있었고 조용필의 노래 역시 곧잘 따라 부르게 됐다. 특히 이 팩에선 <모나리자>를 좋아해 엄마가 사 준 선글라스를 끼고 춤까지 추며 신나게 노래를 불러댔다. “미소가 없는 그대는”, “눈물이 없는 그대는” 까지 부르고는 파를 총총 썰고 있는 엄마를 쳐다보며 마이크를 넘긴다. 그러면 엄마가 웃으며 “모나리자!” 하고 외쳤다.

  이렇게 가왕 조용필의 노래는 내게 엄마와의 기억, 유년의 추억으로 기억된다. 이제는 엄마가 납골당에 계셔 함께 “모나리자”를 부를 수 없기에, 가왕의 노래가 배경처럼 흐르던 1990년대의 어느 시간들이 때론 아프고 때론 그저 흐뭇하다.

  나의 가왕이 50주년 콘서트를 연 게 지난해다. 이 때 나는 시어머니의 손을 잡고 콘서트장으로 향했다. 어린 날 엄마의 손을 잡고 조용필의 노래를 흥얼거리던 소녀가 ‘세월’이라는 나이를 먹고, 또 다른 엄마인 ‘시엄마’의 손을 잡은 채 가왕의 노래를 부르러 간 것이다. 우리가 콘서트를 보러 간 날은 비가 참 많이도 퍼부었는데 어머니와 나는 노란 비옷을 입은 채 내리는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목청껏 “오빠”를 외쳤다. “오빠” 하고 부르면 “왜 부르고 그래” 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응수하는 가왕 덕에 어머니와 나는 서로를 바라보며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큰 경기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빗속에서도 떠날 줄을 몰랐다.

  폭우 속에서 가왕 조용필이 선택한 오프닝곡은 <땡스 투 유>(Thanks to you). 콘서트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곡 같았는데 듣자마자 전율이 일었다.

  Oh Thanks to you
  네가 있었기에
  잊혀지지 않는
  모든 기억들이
  내겐 그대였지
  해주고 싶었던
  전하고 싶었던 그 말
  Thanks to you

  무빙 스테이지 위에서 가왕은 50년간의 준 사랑에 고맙다고 화답하고 있었다.

  콘서트가 끝난 뒤, 어머니는 당신이 소리를 너무 많이 질러 미안하다고 말씀하셨다. “이 나이에 내가 너무 주책맞지?” 당시 예순여섯의 어머니가 부끄러움을 숨기지 못한 채 한 말씀이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가 전혀 부끄럽지 않았다. 오히려 어머니 안에 존재하는 “그 소녀”를 본 것 같아 기뻤다. 가왕 앞에 선 예순여섯의 시어머니도, 서른두 살의 며느리도 모두 ‘소녀’였다.

  조용필은 LP로 노래를 듣던 시절 데뷔했다. 그는 내가 카세트테이프를 들을 때도, CD로 노래를 들을 때도, MP3로 노래를 들을 때도 언제나 가왕歌王이었다. 그가 <바운스>라는 노래로 디지털 음원으로 노래를 듣는 젊은 층까지 사로잡았을 때, 나는 알게 모르게 나만의 그를 빼앗긴 느낌이 들었더랬다. ‘이제 나뿐만 아니라 나의 또래들까지도 전부 조용필의 음악을 좋아하게 되겠구나.’ 그 감정은 분하다거나 질투심이라기보다는 나만이 가지고 있던 추억이 풀어져 다른 사람들에게로 널리 퍼져 나가는 광경을 보는 어떤 아련함 같은 것이었다.

  한 소녀에게서 다른 소녀에게로, 가왕 조용필의 음악은 그렇게 퍼져 나간다. 시간이 흘러 소녀가 여자가 되고 여자가 엄마가 되고 엄마가 시어머니가 되더라도 그의 음악은 전 세대를 잇고 모든 소녀들 을 이어 결국엔 만나게 한다. 그래, 조용필도, 그의 소녀들도 모두 위대하다.

 

 

* 《쿨투라》 2019년 8월호(통권 6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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