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월평] 낯익은 이야기들의 귀환
[문학월평] 낯익은 이야기들의 귀환
  • 전철희(문학평론가)
  • 승인 2019.08.0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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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인터넷 서점 ‘알라딘’이 각각의 연령대에서 어떤 책을 제일 많이 사는지를 공개했다. 확인해보니 필자가 속한 “30대 남성” 그룹에서 가장 많이 구매하는 것은 라이트노벨이라고 한다. 요즘은 오프라인 서점에서도 웬만한 ‘순수문학’이나 사회과학 서적 같은 것보다는 라이트노벨이 중요한 자리에 비치되어 있으니까, 과연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이트노벨은 말 그대로 가벼운light 소설novel을 뜻 한다. 라이트노벨은 보통 미소녀의 삽화가 들어가 있고 내용도 애니메이션이나 만화처럼 단순해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것이 장점이다. 일본에서는 1990년대 정도부터 이 장르가 인기를 끌었고, 한국에는 약 10년 전부터 수입되고 매니아들이 생겼다. 라이트노벨은 대개가 판타지 세계를 배경으로 한다. 판타지라고 해서 톨킨이나 젤라즈니 같은 작가의 웅장한 대서사시 같은 것을 기대해선 안 된다. 라이트노벨은 흥미로운 설정을 차용하 고 그 속에서 매력 있는 캐릭터들이 아웅다웅 노는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만 집중할 때가 많다.

  몇 년 전부터는 등장인물이 연애 게임이나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으로 환생한다는 내용의 라이트노벨이 종종 나오고 꽤나 큰 화제가 되었다. 일본에서는 『여성향 게임의 파멸 플래그밖에 없는 악역 영애로 환생해버렸다』라는 긴 제목의 책이 그런 흐름을 선도한 책이었다. 이 책은 일본에서 엄청난 판매량을 올렸고 그래서 서브 컬쳐 평론가들에의해서도 꽤나 여러 차례 분석이 수행되기도 했다.

  한국에도 이와 꽤나 유사한 설정의 책이 발간되었는 데, 플루토스의 『어느 날 공주가 되어버렸다』(이하 『공주』)가 그것이다. 『공주』는 이후에 웹툰으로도 연재되었는데 역시 큰 인기를 얻었다. 8월에는 웹툰이 책으로도 출간될 예정이다. 이 서평을 쓰고 있는 7월의 시점에서 『공주』 만화판의 예약판매량은 최상위권이다.(인터넷 서점 사이트에 따라서 『공주』는 전체 서적 중 판매량 1~5위 사이를 오간다.) 필자는 이 만화가 아직 출간되지 않아서 인터넷으로만 본 상태이다. 내용을 정리해보겠다.

  『공주』의 주인공 “나”는 어느 날 눈을 떠보니 자신이 봤던 로맨스 소설의 등장인물 아타나시아로 환생한 상태였다. 그 로맨스 소설에서 아타나시아는 아버지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나”는 그 소설을 읽었기에 주변 인물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으며 이후에 어떤 일을 겪게 될지 등등을 알고 있다. 그 정보를 바탕으로 “나”는 소설과 같은 비극적 결말을 피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벌인다. 그런 모습을 유머러스하고도 가볍게 그려낸다는 점이 『공주』 의 매력 포인트다.

  『공주』는, 1990년대의 순정만화를 본 사람들에게 익숙할 만한 클리셰(어떤 왕이 오해 때문에 딸 중 하나를 죽이고 다른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는 이야기)를 비틀고 있다. 만화의 그림체도 그 시절 순정만화만큼이나 화려하게 예쁜 스타일이다.(요즘 만화는 이렇게 화려하기보다 는 비교적 자연스러운 그림체인 것이 많다.) 이렇듯 전형적인 이야기를 살짝 변주하고 과거의 양식 자체를 메타적으로 차용한 작품들은, 지난 몇 년 동안 대중문화 시장에서 가장 인기를 끈 양식 중 하나였다. 내용부터가 1980~1990년대의 청춘만화를 비튼 드라마 <응답하라> 시리즈라든가, 게임/웹툰 등에 들어간 인물의 이야기를 다룬 드라마 등이 대표적인 예시가 된다. 이 작품들은 얼마간 식상하지만, 어쨌든 익숙한 형식이라 편하게 즐길 수 있고 꽤 재미있었다.

  다른 한편 근래의 서점가에서는 테드 창Ted Chiang 의 『숨』도 꽤나 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테드 창은 전작 「네 인생의 이야기」가 영화(<컨택트>, 드니 뵐뇌브, 2017)로 만들어지면서 특히 많은 대중들에게 유명해졌다. 다만 <컨택트>는 테드 창의 원작소설과 꽤나 이질적인 작품이었다. 테드 창의 소설은 과학과 철학에 대한 깊은 사유로 정평이 나 있고, 특히 「네 인생의 이야기」는 미래를 투시한다는 것에 대한 깊이 있는 수학/과학/철학적 성찰을 담고 있었다. 그에 반해 <컨택트>는, 이 소설의 감성적인 부분을 부각시키고 군데군데 플래시백 형식으로 (과거가 아닌) 미래의 삽화들을 넣은 편집 등이 인상 깊은 작품이었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테드 창의 소설은 영화에 비해 훨씬 사색적이었다.

  「네 인생의 이야기」에서 핵심적인 문제는, 미래를 아는 사람이 어떻게 행동해야 하냐는 것이었다. 소설 속에서는 이런 논리가 나온다. 만약 누군가가 자신의 미래를 알게 되었다면, 그 사람은 자신이 알게 된 미래가 오게끔 행동해야 할 것이다. 만약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미래를 알고 있었던 것이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이 논리는 얼마간 동어반복에 기반을 둔 궤변 같아 보인다. 그러나 현실에 대입해보면 아예 억견인 것은 아니다. 만약 한 여성이 있었는데, 자신이 미래에 딸을 낳게 될 것이고 그 딸이 어린 나이에 죽게 될 것임을 알게 되었다고 가정해보라. 그 여성은 굳이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해서 딸을 낳아야 하는가? 「네 인생의 이야기」는, 기꺼이 그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출산을 하면 자신이 딸을 잃고 슬퍼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딸이 죽을 때까지 그녀는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며, 딸이 죽고 난 이후에 그녀가 감당해야 할 슬픔까지도 삶의 일부분이다. 미래에 올 불행 때문에 삶 전체를 회피해선 안 된다. 우리는 주어진 삶을 언제나 열심히 영위해야 한다… 이런 주제의식을 표현할 때 테드 창의 소설은, SF소설만의 방식으로 다른 어떤 장르의 문학에서도 보기 힘든 주제를 절절하게 담아낸 것으로 읽혔다.

  이번에 발매된 『숨』에는 9개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 표제작 「숨」은 구체적인 서사보다는 심도 있는 사색을 강조한 것이다.(현대과학과 철학적 성찰을 결합시킨 작품으로는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도 압권이다.) 따라서 <컨택트>(「네 인생의 이야기」) 같은 굵직한 서사를 기대했던 독자에게는 다소 실망스러울지도 모르겠다. 반면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과 「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는 각각 타임슬립/인공지능로봇을 소재로 삼은 이야기를 통해,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리고 타자와의 관계를 어떻게 맺어야 하는지 등등의 문제를 감성적으로 다룬 것이다. 그래서 과학적/철학적 문제에 대한 성찰을 원하는 독자라면 『숨』은 테드 창의 전작 소 설집 『당신 인생의 이야기』 못지않은 재미를 느낄 수 있을 듯하다.

  이번 월평에서 다룬 두 권의 책(『공주』, 『숨』)은 너무나 이질적이다. 그러나 둘 다 “비현실적”인 설정을 통해 근래의 ‘정통적’인 문화/예술이 다루지 못한 문제들을 다룬다는 점에 있어서만큼은 공통점이 있다. 오늘날의 문학은 아무래도 이전보다 사소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 과거의 서사시가 신의 문제를 다뤘다면 근대 초기의 계몽주 의자들은 문학을 통해 인간의 문제를 다뤘고 요즘의 작가들은 그보다도 더 내밀하고 섬세한 문제들을 다루려고 한다. 그만큼 요즘 문학은 세밀하고, 관심 없는 사람들에게는 흥미가 생기지 않을 수도 있다. 그에 반해 『공주』는 과감하게 과거의 서브컬쳐를 변주하여 반복하고, 『숨』은 근대 초기의 소설들이 던졌던 묵직한 문제를 되묻는다. 이런 작품들이 서점가에서 인기를 끈다는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관한 논의가 학문/언론/평단 중 어느 쪽에서든 시작되었으면 좋겠다.

 

 

* 《쿨투라》 2019년 8월호(통권 6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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