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산책] 음악의 역사이자 음악 자체였던 베토벤
[클래식 산책] 음악의 역사이자 음악 자체였던 베토벤
  • 한정원(클래식 칼럼니스트)
  • 승인 2019.08.0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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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 발라드 계를 평정했던 신승훈의 <보이지 않는 사랑>이라는 노래가 있다. 이 노래는 1991년에 발매된 신승훈 2집 정규 앨범에 수록되었는데, 도입부에 베토벤의 예술가곡 <Ich Liebe Dich(그대를 사랑해)>를 삽입하여 곡의 완성도를 극대화한 바 있다. 우리 나라 최초로 가요와 클래식의 접목을 통해 대중가요의 새 장을 열었고, 신승훈 특유의 애잔하고 호소력 있는 목소리로 큰 인기를 얻었다. SBS 인기가요 차트 14주 연속 1위, 앨범 154만 장이라는 기록적 판매고를 올리며 기네스북에 등재되기도 하였다. 특별히 노래 맨 앞에 ‘이히 리베 디히’로 시작하는 독일어 가사를 그대로 옮겨온 점은 당시로서는 퍽 신선하고 파격적인 행보였다. 첫 네 소절만 들려주었는데도 이 독일 가곡은 아주 오래 전부터 알아온 노래처럼 사람들에게 편안한 친근감을 주었다.

  1795년 스물다섯 살 젊은 베토벤이 작곡한 <부드러운 사랑Zärtliche Liebe, WoO 123>은 성악과 피아노를 위한 곡으로 8년 후인 1803년 가곡 <La partenza WoO 124>와 함께 빈에서 출판되었다. 베를린에서 태어나 개혁신학자이자 종교시인으로 활동하던 칼 프리드리히 헤로세가 쓴 서정적 사랑의 시를 가사로 옮겼는데, 작곡가는 그 작품 가운데 세 개의 연을 발췌하여 곡을 만들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듯이 나도 언제나 그대를 사랑해Ich liebe dich so wie du mich”로 시작하는 노랫말은 원작 2절에 나오는 첫 시구로서 많은 애호가들 사이에서 회자되었고 지금은 노래 제목으로 쓰이고 있다.

 

  노래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

  클래식과 비교적 무관한 사람이라도 베토벤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밤밤밤 바암”으로 시작되는 <운명> 교향곡쯤은 쉽게 떠올릴 것이다. 베토벤은 1770년 12월 16일 본에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는 카펠마이스터를 지낸 명망가였다. 어린 베토벤은 평생 할아버지의 초상화를 귀하게 간직하며 늘 그 뒤를 잇는 음악가를 꿈꾸었다. 어린 천재 피아니스트는 영특하게도 피아노뿐만 아니라 여러 악기를 능숙하게 다룰 줄 알았다. 특히 바이올린과 비올라 연주 솜씨는 훌륭했는데, 그가 남긴 10곡의 바이올린 소나타와 유일한 바이올린협주곡 op.61이 모두 뛰어난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베토벤은 성악 분야에서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100편이 훌쩍 넘는 가곡과 40여 편의 카논, 칸타타, 미사곡, 수많은 합창곡과 각국 민요를 편곡한 노래 모음집, 이외에도 오라토리오와 오페라, 극음악 등 그는 셀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작품을 만들었다. 그러나 교향곡과 실내악, 피아노 소나타 등 기악 음악에 대한 찬사는 꾸준히 이어진 반면, 성악 작품들은 전문가 그룹에게만 알려져 있을 뿐 그 인지도가 낮았다. 그는 작곡에 앞서 늘 가사 선정에 신중하였다. 먼저 고려한 점은 시의 품격과 표현이었다. 그리고는 가사의 운율과 음악적 리듬을 조화롭게 구성하는 데 온 힘을 기울였다. 철저하게 가사의 묘미를 살릴 수 있는 음악을 원했던 것이다.

  수많은 베토벤 성악곡 중에서 지금까지 끊임없는 사랑을 받는 노래는 단연 <아델라이데Adelaide op.46>이다. 프리드리히 폰 마티손의 시에 곡을 붙였고, 작곡은 1794년에 시작했지만 출판은 1797년 2월에 이루어졌다. 베토벤 초기작인 이 노래는 스승 살리에리의 영향을 받아 이탈리아 벨칸토 스타일로 쓰였다. 이 노래의 파격은, 당시 독일에서 유행하던 작곡 기법인 단순한 유절 형식(2절 이상의 가사가 있는 경우 1절 멜로디를 2절에도 동일하게 적용하는 형식)을 따르지 않고 긴 통절 형식(몇 절로 된 가사와 상관 없이 곡 전체를 다른 멜로디로 노래하는 형식)을 취했다는 점이다. 독창 칸타타의 긴 형식을 띤 <아델라이데>는 가곡이 아닌 칸타타로 출판되었고, 베토벤 생전에도 많은 사랑을 받아 여러 번 단독 악보로 출판되기도 했다. 이는 아주 드문 경우로서, 노래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영예였다고 할 수 있다. 그때까지는 주로 오페라 아리아나 시극 중에 나오는 노래가 무대에 올려졌는데, <아델라이데>는 공개적 음악회에서 불리는 최초의 노래가 된 것이다. 이후 이를 비슷하게 모방한 연가곡 형식의 노래들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절제와 균형의 거장

  마흔다섯이 되던 1815년, 베토벤은 빈 궁전에서 열린 러시아 황후 엘리자베타의 생일 축하연에 참석했다. 이 자리에서는 테너 프란츠 빌트가 <아델라이데>를 노래하였으며, 피아노는 작곡자 베토벤이 직접 연주하였다. 빌트의 노래에 크게 감명을 받은 베토벤은 이후 이 노래를 기악곡으로 편곡할 계획을 가졌으나 실행에 옮겨지지는 않았다. 이 날은 그가 ‘피아니스트 베토벤’으로서 무대에 섰던 마지막 날이었다.

  낭만시대를 꽃피웠던 프란츠 리스트는 놀라울 정도로 다작의 작곡가였다. 그는 자신의 창작품뿐만 아니라 다른 작곡가의 작품도 편곡하여 직접 연주하곤 했다. 리스트는 누구보다도 존경하던 베토벤의 이 노래를 피아노 독주용으로 편곡하였고, 순수하리만큼 진지하고 품위 있는 거장의 음악에 낭만의 향기를 담아 더욱 사랑스럽 고 로맨틱한 피아노곡으로 완전하게 변신시켰다. 이러한 음악가들의 재창조 작업은 재능있는 작곡가들 사이에서 흔히 있었던 일로, 리스트의 유일한 경쟁자였던 탈베르그가 편곡한 곡도 남아있다. 두 곡 모두 유튜브에서 들어볼 수 있다.

  베토벤은 음악에서의 절제와 그것을 통괄하고 아우르는 균형을 동시에 보여주었다. 음악을 통해 자신이 가진 무한한 가능성을 실험하고 실행에 옮겼던 용기 있는 인물, 변화를 두려워하지 않는 대담한 모험심을 지녔던 인물, 음악의 역사이자 음악 자체였던 인물, 그가 베토벤이다. 어느 음악회장에서 노래를 들은 <아델라이데>의 원작자 마티손은 베토벤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여러 작곡가가 이 작은 서정적 판타지에 음악의 혼을 불어넣었지만, 천재적인 베토벤만이 가사 깊숙이 파고들만한 선율을 만들어냈다.”라고.

 

 

* 《쿨투라》 2019년 8월호(통권 6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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