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문학] 망각된 것을 복원하는 문학적 방법들
[10월 문학] 망각된 것을 복원하는 문학적 방법들
  • 전철희(문학평론가)
  • 승인 2018.10.01 02:4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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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간 일은 정말 지나가 버린다. 그래서 시간이 흐르면 과거의 모든 기억은 희미해진다. 그러나 한번 경험했던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감각은 인간의 마음과 신체 속에 각인되어 오랫동안 남아 있다. 우리가 종종 예상치 못한 순간에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문학의 역할 중 하나는 독자가 무심코 지나갈 수 있었던 체험을 풍부하게 복원하는 것v이다. 그래서 좋은 작품을 읽을 때 우리는 유년기의 추억이나 특정한 감정 혹은 사랑의 감각 같은 것을 반추하게 된다. 이번 글에서는 두 권의 책을 읽으면서 망각된 공통적 기억을 복원하려는 문학적 시도를 찾아보고자 한다.

제목에서부터 암시되듯 차성환의 첫 시집 『오늘은 오른손을 잃었다』는 결여에 관한 책이다. 시집의 수록작품들에서 세상의 모든 것들은 얼마간 불완전한 상태로 존재한다. 가령 “등에 꽃이 피었다 손이 닿지 않는 곳에 꽃이 피어 꽃은 안전하다 나는 불안전하다”(「꽃」)라는, 초현실적인 분위기의 문장들을 엮어놓을 때, 시인은 ‘꽃’이라는 대상이 ‘나’와 연루된 상태로 위태롭게 존재하는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 물론 이런 식으로 특정한 사물이 제대로 존재하고 있는지의 여부를 문제 삼았던 시는 이전에도 없지 않았다. 이상이나 김춘수의 ‘꽃’ 관련 시편이 그런 경우였다. 주지하듯 이 시인들은 언어와 존재에 관한 형이상학적인 탐구에 정진했다. 그에 반해 차성환은 앞의 인용구에서 보이듯, ‘꽃’이라는 사물을 ‘나’와 연루된 대상으로 상정한다. 그런 인식을 바탕으로 삼아 이 시인은, ‘나’에게 각인된 외부의 대상에 관한 사유로 나아간다.

차성환 시인
차성환

물론 ‘나’와 외부의 대상이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계기가 필요하다. 차성환의 작품은 존재가 새로운 양태로 변이하고 남과 관계를 맺게 되는 순간에 주목한다. 그는 “내 아버지는 아버지가 되기 전 아무것도 아닌 거시기였는데 나를 낳으면서 어떤 선택의 여지도 없이 아버지가 되었”다는 통찰을 개진한 시편에 「멜랑콜리」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는 실로 적절한 명명으로 보인다. 멜랑콜리(melancholy)란 세상의 모든 것들에 대해 의심하는 태도를 일컫는 말이다. 인용한 구절에서 시인은 ‘아버지’로 표상된 생물학적 기원조차 우발적으로 생성된 것에 불과하다는 통찰을 내비치고 있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자신의 ‘멜랑콜리’를 심리적인 불안으로 남겨두지 않고 존재론적 회의의 영역으로 승화시키려는 시인의 고투를 읽게 된다.

그러나 어쨌든 현실에서 아버지는 우리에게 시원적 존재이자 가장 중요한 타인 중 한 명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 작품은 또한 인생의 어느 부분을 공유하며 살아왔던 존재를 향한 연가 내지는 만가輓歌이기도 하다. 반면 시집에 수록된 「의자」 연작은, 항상 우리의 주변에 놓여 있는 일상적 사물에 착목함으로써 자아와 세계(타자)의 관계를 새로이 인식할 수 있게끔 독자를 유도한다. 이 시편들에서 드러난 존재와 무, 그리고 자아와 타자에 관한 사유는 우리가 잊고 왔던 것들을 환기시키는 역할을 능히 해낼 만하다.

박서련의 소설 『체공녀 강주룡』은 공식적인 역사에서 잘 언급되지 않았던 인물의 생애를 복원한다. 강주룡은 평양에서 파업을 조직하다가 상황이 나빠지자 을밀대에 올라 고공농성을 벌였던 일제강점기의 실존인물이라고 한다. 작가가 이런 인물을 소설에 등장시킨 것은 여성주의의 부상과 유관할 듯하다. ‘페미니즘 리부트’가 벌어진 이후, 사회에 만연한 차별을 바로잡기 위해 많은 여성들이 직접 행동에 나섰다. 그런 상황에 발맞춰 몇몇 작가는 과거의 역사로부터 진취적인 여성상을 발굴해내는 작업에 골몰했다. 문학연구자들은 나혜석과 전혜린 같은 작가들의 업적이 부당하게 폄하되어 왔음을 밝혔고, 조선희 같은 작가는 식민지시기의 진보적 정치운동에 몸담았던 여성들의 이야기를 엮었다. 이런 작업들은, 여성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남성 못지않게 전투적으로 사회에 맞설 수 있다는, 어찌 보면 당연하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잊히고 있던 사실을 입증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질 만했다.

『체공녀 강주룡』도 그런 역할을 수행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는 있다. 한데 이 작품의 ‘문학적’인 변별성을 짚으려면 좀 더 세부적인 분석이 필요하다. 소설은 강주룡의 생애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 서술한다. 앞부분은 그녀가 정의로운 남편을 따라 독립군에 합류한 후 사별할 때까지의 이야기이다. 뒷부분에는 그녀가 노동을 시작하고 적색노조와 함께 파업을 조직한 후 사정이 여의치 않자 고공농성에 나서기까지의 과정이 담겨 있다.

소설의 서사가 진행됨에 따라 강주룡은 점점 투사로 거듭난다. 그녀는 특히 남편과 동료 노동자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자극을 받고 사회적으로 의미가 있는 일을 하리라고 결의한 것이었다. 물론 그녀는 주관 없이 타인들의 영향에 의해서만 변화하는 수동적인 인물이 아니다. 다만 그녀는 주변 사람들을 향한 연민과 공감을 숨기지 않을 만큼 의연하고 솔직했을 뿐이다. ‘간나’들은 숨죽이고 살 수밖에 없던 시대였음에도 그녀는 시종일관 당당했다.

가령 소설 속에서 그녀는 독립군에 합류한 후 성적인 희롱을 당한다. 그때 남편은 독립군의 단합을 위해 참으라고 만류하지만 강주룡은 자신의 불쾌한 심정을 숨기지 않았다. 이 삽화는 당당하고 솔직한 여성이 어정쩡하게 대의 같은 들먹이는 사람(남성)보다 훨씬 주체적인 행동에 나설 수 있음을 암시한다.

박서련

『체공녀 강주룡』은 한겨레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다. 이 문학상을 받은 작품 중에서는 사회적 현안을 직접적으로 다룬 것이 많았다. 가령 전년도의 수상작 『다른 사람』(강화길)은 현대사회에서 여성들이 겪는 허다한 억압과 차별들을 집약하여 보여준다. 사회적으로 핍박 받는 여성의 처지를 대변한다는 점에서 보면 『체공녀 강주룡』도 유사한 문제의식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작품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강화길이 지금-여기에서 벌어지는 여성혐오들을 핍진하게 고발한다면, 박서련의 소설은 과거에도 당당하게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여성이 존재했음을 보여주려고 한다. 둘 다 나름의 가치를 지닌 작품이겠지만 『체공녀 강주룡』 쪽이 더 희소한 방식을 택했다고는 할 수 있다. 여성혐오의 양상을 직·간접적으로 재현한 소설은 간간히 발표되어 왔기 때문이다. 반면 주체적인 수준을 넘어 투쟁적인 여성을 서사의 중심에 배치한 작품은 극히 드물었다.

『체공녀 강주룡』은 강주룡이 투사로 거듭나는 과정을 다소 상투적으로 묘사하는 경향이 있다. 이 점은 한계라기보다는, 역사에서 누락되었던 인물의 모습을 우리에게 익숙한 방식으로 현현하기 위한 장치로 봐야할 것이다. 그런 면모까지도 이 작품이 ‘현재적’인 시각을 투철하게 견지하고 있음을 증명한다. 박서련의 소설은 결국 망각된 존재를 기리는 애가이자 송가이다. 그런데 그 속에는 현재의 사회에 대한 비판적 의식이 선연하게 드러나 있다. 이 작품에 주목해야하는 이유이다.

 

 

* 《쿨투라》 2018년 10월호(통권 52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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