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갤러리 에세이] 로맨티시스트 '인간 뷔페'에 매료되다
[갤러리 에세이] 로맨티시스트 '인간 뷔페'에 매료되다
  • 설재원(에디터)
  • 승인 2019.09.01 02: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프랑스 파리에서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베르나르 뷔페전을 관람했다. 파리에서도 전시를 많이 다녔지만 파리에서는 프랑스 파리 출신 뷔페의 그림을 볼 수 없었다. 최근 들어 뷔페가 다시 회자되면서 뷔페라는 인물을 재평가하고 회고전을 열고 있지만 여전히 작가에 대한 인식이 그리 높지 않아 그 흔한 박물관조차 없다. 그의 서거 20주년을 맞아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에서 열린 이번 뷔페전은 굉장히 어렵게 성사된 전시라고 한다. 2년 전 전시는 판화가 대다수였는데 이번 단독전은 뷔페의 팬인 전시기획자분이 오래 준비하여 기획한 전시로, 프랑스에서 뷔페박물관이 지어지는 사이를 틈타 전부 유화로 들여왔기 때문이다.

파리시립근대미술관, 에르미타주박물관, 푸시킨박물관 등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 이어 한국에서 열리는 이 회고전에는 3m가 넘는 대형 작품을 포함해 프랑스 구상 회화의 마지막 거장 뷔페를 대스타로 만든 1940년대 작품부터, 전쟁을 겪은 뒤 1950년대의 작품과 1990년대 말까지 뷔페가 전생에 걸쳐 다룬 다양한 주 제와 변화된 스타일의 오리지널 유화 작품 92점을 만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이번 전시는 우리나라에서는 다시 접하기 힘든, 무조건 꼭 봐야만 하는 전시이다. 전시는 기대 이상이었다. 하지만 한 줄의 리뷰도 쓰지 못했다. 그러다 지난 8월 17일 본지 편집인을 비롯한 에디터 두 명과 함께 다시 전시장을 찾았다. 나는 그들에게 절대 후회하지 않을 전시라고 강권했기에 오디오 가이드 대신 내가 그들의 일일 큐레이터가 돼야 했다. 작품에 대한 설명은 오디오 가이드를 찾아보면 쉽게 알 수 있지만 뷔페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모른다면 그림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다. 나는 지난번 전시 때 정우철 도슨트의 설명으로 인간적인 뷔페의 모습을 잘 새겨들을 수 있었다. 그는 “뷔페는 끝까지 화가로 살다 간 로맨티시스트”였으며, “그 사랑 때문에 저도 매번 울컥”한다고 했다.

 

뷔페는 누구인가

나는 2시간 이상 소요될 전시 관람이 지루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 어설픈 도슨트 흉내를 내었다. 먼저 세 사람에게 뷔페란 화가를 이전부터 알고 있었는지 물었다. 그러자 편집인 빼고 모두 몰랐다고 한다. 문화잡지 에디터로서 스스로가 부끄럽다고 자책했지만 난 그들에게 ‘NO’라고 말했다. 뷔페는 우리나라에서는 그리 대중적이지 않은 화가로 최근까지 그의 개인 서적이 아예 존재하지 않을 만큼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의 도록이 한국에서 선보이는 유일한 작가의 책이다. 베르나르 뷔페는 추상표현주의가 장악하던 1950~60년대, 이를 탈피하려는 프랑스의 ‘신사실주의(Nouveau Réalisme)’ 운동에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당시 미술계의 흐름을 거스르는 구상(figurative) 회화에 평생을 전념하며 8000여 점 이상의 회화 작품을 남겼다. 뷔페는 시대의 흐름에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유지한 것이다. 앤디 워홀은 “내가 인정하는 프랑스 회화의 마지막 거장은 베르나르 뷔페다.”라고 말했다. 이외에도 베르나르 뷔페를 성찬하는 말은 많다. 이브 생 로랑, 프랑수아즈 사강 등과 함께 ‘프랑스의 가장 뛰어난 젊은 재능 5인’으로 선정되었고, 생애 두 번이나 프랑스 문화 훈장인 레지옹 도뇌르를 수상했으며, 30대에 당대 거장 피카소의 ‘대항마’로 꼽히기도 했다.

뷔페의 작품들

뷔페는 1928년 거울 공장에서 일했던 아버지와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가정에 무관심했기 때문에 뷔페에게 행복한 순간은 전부 어머니고 뷔페에게 있어 사랑은 어머니다. 어린 뷔페의 재능을 알아본 어머니는 주말마다 아들을 루브르박물관에 데리고 가서 그림을 보여주었다. 어머니의 관심 속에서 재능을 꽃피운 뷔페는 에콜 데 보자르에 조기 입학할 정도로 일찍부터 천재성을 보인다. 어린 시절, 뷔페는 주로 정물화를 많이 그렸는데 그에 걸맞게 첫 공간엔 과일, 유리병, 유리잔 등이 많이 보였다. 과일들을 주로 말라비틀어져 있었고 유리병이나 와인 잔은 비어있는데 이는 빈곤을 상징하고 있다고 한다. 생기 없는 모습 그리고 2차 대전을 겪어 메마르고 황폐한 현실을 정물로 표현한 것이다. 또한 테이블이 원근법을 어기고 있는데 유독 테이블만 어긴 것은 뷔페 그림의 특징이다. 뷔페가 “테이블을 어긴 작품은 바로 나의 작품이다.”라고 말했다 하니 ‘뷔페 그림이구나’ 하는 걸 단번에 알아 차리도록 놓은 구성이다.

또한 그는 물감을 칠하고 다시 칠한 부분을 다 긁어놓았다. 그 이유는 뷔페는 당시 너무나 가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정물의 재료들은 얻어서 쓴 것이고, 물감을 얇게 칠한 뒤 그걸 긁어냄으로써 물감을 아끼는 것과 동시에 내면의 아픈 상처를 표현했다. 이 상처는 자신의 뮤즈, 아나벨을 만나 치유하게 된다. 뷔페의 초창기 인물화도 정물화와 비슷하다. 세로로 길게 그려진 말라비틀어진 사람들. 생기가 없이 표현이 되었기 때문에 처음 뷔페의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그로테스크하고 무섭다는 느낌이 든다. 하지만 당시 뷔페의 인물화를 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다 자신의 모습을 그린 것 같다고 한다. 세계대전이라는 끔찍한 전쟁을 겪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모습은 〈장례식〉 등의 작품에서 잘 드러난다. 그의 그림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굶주리고 무표정하다. 자 코메티의 작품처럼 뻣뻣하고 예리하게 채워진 검은 윤곽, 금욕적인 구도로 고통스러운 인간의 삶을 주제로 하는 그림은 전쟁 후 고통 받던 동시대인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뷔페에게 “20세기의 증인”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그의 작품은 지극히 리얼한 당시 모습의 재현이었던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을 겪으면서도 “모든 것이 파괴되고 공포 속에 살았다. 그 시절에는 먹을 것과 그릴 것만 찾아 다녀야 했다.” 라며 작업에 대한 열정을 멈추지 않았고 구할 수 있는 재료와 소재로 작품 활동에 몰두했다.

세계 대전이 끝나고 모두가 전쟁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때, 뷔페는 최악의 고독을 느끼게 된다. 뷔페의 엄마가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는 어머니 생각을 지우기 위해, 사회 와 단절된 채 방에서 일 년 동안 그림만 그렸다고 한다. 그리고 18세가 되었을 때 세상에 나온 뷔페는 19세의 나이에 비평가상을 수상하며 일약 대스타로 떠오른다. 그때부터 뷔페는 프랑스 예술의 판도를 뒤바꾸기 시작한다. 뷔페는 피카소랑 견줄 만큼 굉장한 인기를 얻으며 “피카소는 구식이고 프랑스의 예술은 뷔페다.”라고 할 정도로 뷔페의 세상이 펼쳐지게 된다. 실제로 22세에 백만장자가 되었다고 하니 프랑스에서 가장 뛰어난 젊은이 5명 중 하나가 뷔페였다고 한다. 그가 전시회만 열었다 하면 ‘폭동’처럼 많은 인파들이 붐볐고, 그림도 피카소보다 더 비싸게 판매되었다. 당시 최고의 화가던 피카소도 젊은 뷔페의 그림을 보러 왔고, 그가 주목했던 <닭을 들고 있는 여인>은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뷔페는 말한다. “피카소? 그가 아무리 위대한 화가라도 나한테는 아무 의미 없다. 마티스는 그저 장식가일 뿐”이라고.
 

 뷔페의 영원한 뮤즈 아나벨

1958년 전속 사진작가 루코넬이 앉아있는 할머니를 찍고 싶어, 연출을 위해 자신이 아는 두 사람, 아나벨과 뷔페를 불렀다. 순간 둘은 첫눈에 반하게 된다. 그녀는 뷔페의 동네에서 가장 예쁘고 인기 있던 모델 겸 가수다. 뷔페와 아나벨은 100㎞ 떨어진 거리에 살았는데, 하루도 빠지지 않고 뷔페가 아나벨을 보러 갔다고 한다. 얼마나 로맨틱한가? 뷔페는 그림을 그렸고 아나벨은 글을 썼다.  예술가였던 둘은 서로의 뮤즈고 혼의 동반자였다. 아나벨은 뷔페의 가장 오랜 여자모델로 그의 화면에 빠짐없이 등장한다. <이브닝드레스를 입은 아나벨>과 <칸느 영화제의 아나벨>의 아름답고 우아한 인물이 바로 그의 부인의 초상이다. 아나벨을 끔찍이 사랑한 뷔페는 자신이 죽으면 모든 것을 아나벨에게 주라는 유언장을 그림으로 남기기도 했다. 유언장이 공증이 안 될까봐 자신의 손으로 물감을 묻혀 그림 이곳저곳에 찍어 자신의 지문을 표시했으니 아나벨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지극했는지 새삼 느낄 수 있다.

뷔페는 아나벨과 여행을 떠나면서 도시의 랜드마크들을 그림으로 남긴다. 그러면서 풍경 작업을 시작하는데, 이때(60년대)부터 그의 명성이 추락하기 시작한다. 뷔페의 작품성을 보는 것보다는 얼마에 그림을 팔렸는지, 무엇을 샀는지 등의 가십이 더 떠올랐고, 예술계의 평론가들 역시 아무도 뷔페의 전시를 찾지 않는 등 철저하게 그를 왕따시켰다. 젊은 나이에 잘생겼으며, 부와 아름다운 아내까지 얻은 타고난 천재 뷔페를 사람들이 시기하고 질투하지 않을 수 있으랴. 더불어 예술의 중심지가 프랑스에서 뉴욕으로 옮아가면서 프랑스 예술을 부흥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구상미술을 누르고 추상 미술을 홍보하고, 뷔페의 이름은 점차 사라져갔다. 시대의 흐름이나 상황이 복합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뷔페는 “나를 향한 비난은 나를 훌륭한 예술가로 성장시켰다.”라고 말한다.

 

뷔페의 최후와 그리고 평가, ‘천재화가’보다는 ‘인간 뷔페’에 매료

뷔페는 1990년대 후반에 파킨슨병 진단을 받았고 병으로 인해 넘어지면서 손까지 다치게 된다. 뷔페에게 그림은 자신의 생명과도 같았기에 “21세기엔 그림 없이 내가 살아갈 수 있을까?”라며 공포를 느끼게 된다. 아픈 몸으로도 그는 <브르타뉴의 폭풍>이라는 작품을 남기게 되는데, 뷔페에게 브류타뉴는 어머니와 함께 여행하며 행복한 시간을 보낸 추억의 장소이다. 이 작품을 본 아나벨은 뷔페가 곧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두려움에 날카로운 모든 것들을 집에서 치웠다고 한다. 뷔페는 죽음을 주제로 하는 시리즈 24점을 6개월 동안 그리는데 24점 모두 해골이 등장하고 그 안에 생명의 징조인 장기들을 하나씩 그려놓았다. 그리고 다시는 붓을 잡지 못하게 된다. 평화로운 어느 날, 그는 아나벨과 어느 때와 똑같이 식사를 하고 산책을 갔다가 돌아온다. 여느 때처럼  뷔페는 작업실로 들어갔지만 늦게까지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뷔페를 기다리다 작업실로 간 아나벨이 죽은 뷔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1999년 10월 5일, 당시 베르나르 뷔페의 나이는 71세다. 그날 유일하게 다른 점이라고 한다면 작업실 근처에 있던 마리아 상에게 장미 한 송이를 올려놓았다고 한다. 뷔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림을 그렸고, ‘죽음’ 시리즈를 마무리하고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1963년 4월 15일
이것은 나의 유언장이다.
나는 모든 것을
나의 부인 아나벨 뷔페에게 남긴다.
- 남편 베르나르 뷔페로부터 -

전시장을 나서며 그의 생이 수록된 도록을 구입했다. “나는 감을 믿지 않는다. 단지 그릴 뿐”이며, “작품이 모든 것을 설명해 줄 필요는 없다. 과학이 발전해서 달 나라 여행이 가능해지고, 추상미술이 도래하더라도 내가 ‘페인팅’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결코 변하지 않을 것” 이라는 그의 말들이 오랫동안 우리를 뒤따랐다. 우리가 전시회에서 본 것은 아티스트 이전 한 인간의 삶이었다. ‘광대’, ‘천재’를 보여주겠다며 동료 에디터들을 데려갔지만 그들은 ‘천재화가 뷔페’보다는 ‘인간 뷔페’에 매료되었다. 삶, 그 자체가 작품이 되는 아티스트, 뷔페라는 한 인간의 처절한 삶과 작품의 내면을 호흡할 수 있는 뭉클한 전시였다.

사진 출처: 베르나르 뷔페전 공식 홈페이지

 

 

* 《쿨투라》 2019년 9월호(통권 63호) *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