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돈균의 인문학으로 세상읽기 1] 자, 척도를 갖는다는 것
[함돈균의 인문학으로 세상읽기 1] 자, 척도를 갖는다는 것
  • 함돈균(문학평론가)
  • 승인 2019.09.0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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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 보면 안다’는 말이 있다. 여기서 ‘척’은 도량형의 단위로서 본래 ‘자尺’라는 말의 한자를 일컫는 것이다. 낚시꾼들이 큰 고기를 낚았을 때 ‘월척’했다는 말을 쓰는데, ‘한 자 넘는’ 고기를 잡았다는 뜻이다. ‘자’를 뜻하는 ‘척尺’은 상형문자다. 손바닥을 펴서 무언가를 재고 있는 엄지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을 표현한 ‘그림’이다. 무언가를 재는 기준으로 쓰는 도구를 ‘자’라고 부르는 데에는 ‘자’처럼 각종 도량형의 측정이 원래는 ‘한 뼘’같은 신체 비례를 기준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이리라. 오늘날에는 과학기술이 고도로 발달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 소립자의 세계를 재는 아주 작은 자나, 상상하기 어려운 광대무변의 우주공간을 잴 수 있 는 엄청난 규모의 자들까지 나왔다. 이런 자의 발명을 통해 사람 시야 너머에 사람의 시야와 기준이 포괄하지도 못하고 추측하지도 못하는 규모의 존재의 세계가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사물의 길이와 부피와 무게를 재는 ‘자’는 사람에게 공간 감각의 통일성을 확보하게 하고, 개인 간 물건 교환을 가능하게 하며, 측정을 통한 각종 기술의 발달, 세금의 수취 등 문명의 전진 과정에 있어 전방위적 필수물이다. 자는 기준 없는 세계에 기준을 부여하여 개별적이고 파편적인 세계 감각에 계산·계측에 관한 통일적인 원근감과 보편적인 합의 의 기준을 부여한다. 법의 정신을 상징하는 정의의 여신이 한 손에 천칭을 들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인 ‘각자에게 각자의 몫을 준다’는 말은 정의가 ‘몫’을 정확히 잴 수 있는 정확한 자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함의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순수한 자연의 물리량을 계측하는 세계와는 달리 사회라는 인간계에서 누구나 합의할 수 있는 보편적 기준, 통일적인 척도를 만드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관점과 가치와 개인들이 처한 사회적 위치와 문화적 차이와 역사적 단계에 따라 기준은 유동적이다. 인류라는 보편성을 이야기하지만, 차이는 보편성을 무색하게 할 정도로 크다. 무엇이 옳은가, 무엇이 그른가, 아름다움과 추함의 기준, 적절함과 부적절함, 정당함과 정당하지 않음의 기준은 각자 다르고 그래서 극히 불안정하다. 법과 도덕적 기율이 사회마다 시대마다 조금씩 다르게 존재하고, 경우에 따라서 그 내용이 매우 상이하기도 하다는 사실이 이를 쉽게 증명하기도 하지만, 실은 사회에 인간 행위에 대한 공준의 척도로서 강력한 터부와 법이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가 역설적으로 ‘자’의 불완전성을 증명한다.

인간의 역동 안에는 정해놓은 ‘자’를 인정하기 어렵고, 설령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 ‘자’ 자체가 생명을 제어하는 억압기제라는 인식을 통해 그에 저항하는 생명의 움직임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분별도 하지 말고, 기준도 만들지 말라는 노자나 장자의 말도 결국 인공의 자를 만드는 일 자체가, 또 그 자를 정교화하면 할수록 인간이 자연의 생기로부터 멀어진다는 얘기를 하는 거다. 그들이 반감을 보던 문명화는 결국 ‘자’를 정교화하는 문명화다.

어떤 사회가 강력한 통일적 척도로서 ‘하나’의 자를 갖게 될 때, 그 사회는 완전하고 더 효율적인 사회가 될까. 모두가 비슷한 생각을 하고, 명령과 지시와 수행이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지는 사회가 보다 진화한 세계일까. 최근 일본과 벌어진 역사전쟁 속에서 한국사회를 움직이는 역동을 보며 어쩌면 우리 사회는 ‘하나의 상상의 자’를 내부에 가진 사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사회와 개인, 국민과 시민, 과거와 현재, 개인의 역사적 경험, 개인의 계급적·계층적 위치 차이에서 발생하는 분열과 날카로운 시차를 무화시키고 ‘통일’시키려는 ‘민족’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자’가 그것이다. ‘민족’이라는 ‘ 자’를 그들 정도로 충분히 인정하지는 않는 이에게, 이 자를 들이대며 그 기준의 생각과 실천에 동일한 방식으로 참여하라고 윽박지르는 현상은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내로남불’이라는 용어는 이율배반에 관한 말로 21세기 한국사회에 무척이나 친숙하게 유통되고 있는 사회적 용어다. ‘내로남불’은 내가 지닌 ‘자’가 자기 자신에게도 제대로 적용되지 않는 자기분열 양상을 지시하는 동시에, 내 자를 기준으로 타인을 계측하고 억압하는 양상을 드러내는 증상적 용어다. 어떤 ‘자’는 내가 그것을 지니고 있다고 해도 안으로만 가지고 드러내지 않는 게 낫다. 사람살이를 하다 보면 ‘정교한 계산 능력’으로 생활의 ‘자’를 늘 들고 다니며 그것을 너무도 잘 사용하는 ‘현명한 생활인’들을 만나고 보게도 된다. 더치 페이도 명확하고, 절세의 지혜도 탁월하며, 투재 대비 가성비를 기막히게 잘 재서 물건을 사는 방식을 보면 감탄을 하게 한다. 무심한 일상인들은 잘 모르는 어떤 기회에 응모하여 깜짝상품이나 지원을 받았다고 자랑하는 지인의 모습을 본 적도 있다. 사회적 척도에 따라 인생스케줄을 장기적으로 잘 재고 기획하여 현재 시간을 규율하며 달리면서 사는 삶의 풍경은 우리네 일상적 풍경이기도 하다. 이 풍경 속에서 현재라는 시간은 아직 일어나지도 않았고, 어쩌면 앞으로 일어나지도 않을 머릿속 미래시 간표의 일부로 항상 존재한다. 사회에서 소위 ‘잘산다’ ‘성공했다’고 평가받는 이들 중 상당수는 이 ‘재는’ 능력이 발달했으며, 그런 이들은 출세와 성공의 타이밍과 방법을 기막히게 잘 잰다.

시인 김수영은 “무엇이든지/재볼 수 있는 마음은/아무것도 재지 못할 마음”이라며, “삶에 지친 자여/자를 보라/너의 무게를 알 것이다”(「자(針尺)」)는 시를 쓴 적이 있다.

사람살이에는 잴 수 없는 것, 맹목의 진심만이 도달할 수 있는 세계가 있다. 사람과 사람이 깊이 닿는 마음의 세계에서, 무언가 신비한 존재 사건이 발생하고 유지되는 일은 물리적 생활세계 속 생활인의 감각이 들고 재는 ‘자’ ‘너머’에서 일어난다. 머리가 재기 전에 마음과 마음이 서로 먼저 가닿아 대화하고 움직이는 진심의 세계가 있다. 거기서는 ‘자’가 무용지물이다. 마음의 주체가 일상의 자를 쓰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잴 수 있는 내 마음의 상태·운동을 실은 나도 모르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마음의 사건에도 헤아림이 아예 작동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신비한 마음의 율동에서는 생활인의 척도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헤아림이 작용한다.

함돈균

문학평론가. 고려대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를 지냈다. 인문정신의 공공성 실현을 위해 ‘실천적 생각발명그룹 시민행성’을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으며, ‘공존-세계시민-생명’ 가치에 기반한 창조적 사회디자이너 양성을 목표로 지구적 네트워크에 기반한 사회디자인대학 ‘미지행’을 설립 중이다. 고려대학교, 한국예술종합학교 등 많은 대학에서 문학, 철학, 인문고전 등을 강의해 왔다. 문체부, 교육부, 삼성리움미술관, 삼성전자 R&D센터 등 여러 정부부처와 공공기관, 기업 등에서 인문예술 교육프로그램을 기획ㆍ자문ㆍ심의ㆍ강의해 왔다. 인문철학에세이집 『코끼리를 삼킨 사물들』 『사물의 철학』, 교육대담집 『교육의 미래 티칭이 아니라 코칭이다』, 문학평론집 『사랑은 잠들지 못한다』 『예외들』 『얼굴 없는 노래』, 문학연구서 『시는 아무것도 모른다』 등의 책을 출간했다.

 

 

* 《쿨투라》 2019년 9월호(통권 6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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