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월평] 가볍고 재밌는 소설들에 대하여
[문학 월평] 가볍고 재밌는 소설들에 대하여
  • 전철희(문학평론가)
  • 승인 2019.09.01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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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서점가에서 주목받는 한국소설들은 “가볍다”는 느낌이 드는 게 많다. 이번 월평에서는 비교적 부담 없이 읽히는 3권의 소설집을 겹쳐서 읽고 문학이 “가볍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를 간략히 다뤄보려 한다. 

 첫 번째 책은 김초엽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하 『빛』)이다. 김초엽 은 2017년에 한국과학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등단했다. 그녀는 한국의 SF작가로서는 드물게 문단에서도 주목을 받았고 『현대문학』과 『문학 3』을 비롯한 문예지에 작품을 발표했던 적이 있다. 이번에 출간된 『빛』은 그녀가 쓴 단편 7개를 모아놓은 것이다. SF문학은 서브컬쳐나 대중문학으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문턱이 높은 장르이다. 독자의 수준 높은 과학적 지식이나 심도 있는 철학적 사유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지난 월평에서 다룬 『숨』(테드 창)이 그랬고, 비교적 유명한 국내작가인 배명훈과 김보영의 작품 또한 엄숙하거나 심오하게 느껴질 때가 없지 않다. 그에 반해 김초엽의 소설은 무겁고 진지한 문학작품에 거부감을 느끼는 독자들에게도 가볍게 다가갈 수 있을 것 같다. 복잡한 철학적 사유나 과학적 성찰 등등을 풀어내는 대신, 섬세한 문체로 감성적인 문제를 다루기 때문이다. 가령 김초엽의 등단작인 「관내분실」은 딸이 죽은 어머니의 삶을 이해해가는 과정을 다룬 것이다. 그리고 이번 작품집의 표제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어떤 상황이 되어도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들(가족)을 만 나기 위해 ‘순교’하는 인간의 이야기이다. 이 작품들은 과학적 고증이나 철학적 사유에 있어 크게 미진한 것은 아니지만, 그런 요소들을 강조하기보다는 등장인물들의 심리에 독자들이 정서적으로 공감하게끔 유도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따뜻한 감성을 표현한다는 점에서 보면, 『빛』은 과학적인 문제보다 인간의 정서를 집요하게 모사했던 <그래비티>(알폰소 쿠아론) 같은 영화를 떠올리게 할 만도 하다.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는 이 작가의 특성을 가장 집약하여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작품 속에서 각종 편견에 의거한 차별이 행해지는 “지구”와 모든 사람이 조화롭게 살아가는 “행성”은 대립된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당연히 “행성”이 “지구”보다 좋은 곳일 것 같으나, 반목과 갈등이 없는 세상에서는 뜨거운 사랑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러니까 지구인들은 “행성”의 거주자들에 비해 “억압적”인 세계에 살고 있지만, 그 대가로 더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도 얻게 된 셈이다. 갈등이 있어야 사랑도 있다는 것. 이것은 꽤나 심오한 철학적 문제일 수 있는데, 김초엽은 이와 관련하여 사변적인 고찰을 늘어놓는 대신, 등장인물이 느끼는 감정을 통해 독자로 공감하고 스스로 사유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준다.

두 번째로 다룰 책은 장강명의 『산 자들』 이다. 이 책의 단편들은 노동문제와 재건축 등 긴요한 사회적 현안들을 주로 다루고 있다. 출판사는 홍보자료에서 “한국의 비인간적인 경제 시스템이 만들어 내는 비극의 구조를 절묘하게 포착하는 이 작품은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원미동 사람들』 등 한 시대 서민들 이 살아가는 풍경을 다룬 연작소설의 전통을 잇는다”고 썼다. 개인적으로는 세 권의 책에서 공통점보다 차이점이 많은 것 같다는 느낌이긴 하지만, 어쨌든 기왕에 말이 나왔으니 『난쟁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나 『원미동 사람들』과 같은 “전통적”인 소설을 『산 자들』와 비교해 봐도 좋겠다. 앞서 언급한 “전통적”인 소설들은, 범박하게 요약하면 사회로부터 소외 받는 사람들이 나름의 방식으로 사랑을 추구하며 아등바등 살아가는 모습을 그려낸 것들이다. 그런데 장강명은 사회의 최하층에서 고통 받는 이들의 이야기만을 들려주진 않는다. 가령 그는 비정규직 문제를 다룰 때, 청년 세대의 비정규직이 아닌 중간관리자의 입장을 보여준다.(「알바생 자르기」) 반면 한편 「공장 밖에서」는 해고노동자들이, 자본가가 아닌 노동자(해고자 명단에 오르지 않고 퇴직하지 않은 노동자)들과 대립 하는 모습을 그려낸 작품이다. 이것은 사회적 약자의 입장을 지지하면서 기득권층을 비판하는 입장에 섰던 “전통적”인 소설과 구별되는 특성이다. 장강명이 “을”들의 대결을 다룬 것은, 사회의 피억압자들이 불쌍하고 억압자들은 나쁘다는 식의 대립구도로 현대사회를 충분히 풍요롭게 설명할 수 없다는 문제 의식의 소산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전통적”인 소설에 비하면 『산 자들』는, 사회적 구조 때문에 반목하게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내밀하게 파고드는 대신 다소 무던하 게 관찰하는 입장을 고수한다. 이 또한 현대사회의 복잡한 갈등양상을 보여주려는 작가의 문제의식으로부터 비롯되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소설집은 박상영의 『대도시의 사랑법』이다. 나는 지난 서평에서 이 책의 수록작품 중 하나인 「우럭 한점 우주의 맛」을 다룬 바 있다. 그때 나는 이 작가가 “퀴어문학”이라는 범주를 대표하는 신성 중 한 명이라고만 소개했는데, 『대도시의 사랑법』의 판매량이나 독자들의 반응 등을 볼 때 이제 박상영은 한국에서 가장 주목받는 작가 중 한 명이 된 것 같다. 박상영의 소설은 무엇보다도 유쾌하다. 그 유쾌함은 흡사 SNS에서 재기발랄한 통찰이나 허세 넘치는 자조 글을 볼 때 느껴지는 감각과 비슷한 것이다. 그런데 박상영은 오히려 기존의 “진중”해보이던 소설이 할 수 없는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게 된 것이 그런 재기발랄함과 허세 때문이라면 어떨까. 이번 작품집은 그가, 가령 동성애자들의 찌질한 연애담을 통해 386세대의 정서를 가지고 있는 운동권 출신과 오늘날의 “탈정치화”된 젊은 세대 사이의 갈등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작가이고, 에이즈(AIDS)라는 단어를 쓰지 않고 HIV 바이러스의 증세를 소상하게 소개할 수 있는 작가임을 알려준다. 만약 오늘날의 젊은 세대들이 처한 처지를 한탄하거나, HIV 바이러스에 시달리는 동성애자들에 대한 동정을 강요하는 소설이 있다고 가정해보라. 솔직히 별로 재미있는 작품이 되진 않을 것 같다. 그런데도 박상영의 소설은 잘 읽히고 시종 유쾌한 태도로 일관하다. 어쩌면 그런 태도 때문에 오히려 진중한 이야기를 부담 없이 할 수 있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돌이켜보면 1990년대의 김영하(혹은 윤대녕이나 김경욱)와 2000년대의 박민규 등등은 본래 재기발랄한 “신세대” 작가로 등장했다. 그런데 그들이 가벼운 문체를 애용한 것은, 진중한 문제로부터 회피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엄숙한 태도로는 포착할 수 없는 삶과 세상의 진실을 표현하기 위해서였다. 박상영의 소설은 이런 작가들이 당대에 해냈던 작업들을 계승해서 이어 가고 있다. 반면 김초엽과 장강명은 문단 시스템에 밀착한 작가는 아니지만, 적어도 기존의 문학이 말하지 못했던 문제들을 다루고자 한다는 점에 있어서만큼은 크게 다르지 않다. 어쨌든 이번 월평에서 소개한 작품들은, 평상시에 (한국)문학을 읽지 않은 독자들에게도 추천할 수 있을 만큼 가볍고 (즉물적으로도) 재미있으면서 묵직한 문제의식을 담고 있다. 모쪼록 천고마비의 계절이 시작되니, 아직 안 읽은 분들은 꼭 일독해보시길!
 

 

* 《쿨투라》 2019년 9월호(통권 63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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