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Theme] 출판 2.0 - 『독서주방』을 펴낸 ‘파불루머’ 유재덕
[11월 Theme] 출판 2.0 - 『독서주방』을 펴낸 ‘파불루머’ 유재덕
  • 손희(본지 편집장)
  • 승인 2019.1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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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목요일 저녁, 서울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 저층 로비에 있는 이탈리안 오스테리아 ‘루브리카 (Rubrica)’에서 그를 만났다. 그를 처음 본 순간 순식간에 긴장감은 사라졌다. 멋진 셰프 복장이 그에게 잘 어울렸지만, 그의 따뜻한 미소는 스크린에서 막 튀어나온 신인배우처럼 주위를 환하게 만들었다. 매혹적이었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자 약간은 겸연쩍은 듯 수줍어하는 그 모습마저도.

유재덕 셰프는 대학에서 식품공학을 전공했다. 조선호텔에는 사무직 일반 직원으로 취업했지만 식자재 구입을 담당하면서 드나들어야 했던 호텔의 주방에서 그는 요리의 아름다움에 매혹되었다. 요리사가 되기로 작정한 그는 자신의 보직을 주방 으로 바꿔달라고 요청한다. 그의 직업은 합법적인 칼잡이, 즉 요리사가 되었다.

105년 역사의 웨스틴조선호텔서울에서 30여 년 동안 일했으며, 오랫동안 메뉴개발을 담당하다가 올해 조리팀장, 즉 호텔 주방의 총책임자가 되었다. 요리사가 되고 25년쯤 지나자 저자는 스스로 매너리즘에 빠진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자신에게 던졌던 ‘나는 좋은 요리사인가?’라는 그 질문에 답을 구하기 위해 칼을 내려놓을 때마다 책을 펼쳐들었다. 그 결과물이 『독서주방』으 로 탄생했다. 27년차 셰프가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긴 책의 맛은 어떨까? 그의 특별 디너를 음미하며 음식이 하나씩 나올 때마다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Q. ‘파불루머’ 유재덕이라고 소개했다. ‘셰프’라는 호칭보다 ‘음식가’, ‘파불루머’라는 말을 더 선호하는 이유는?

평생 호텔 주방에서 일을 하면서 ‘최고의 요리사’가 되기 위해 노력했다. 20년쯤 지났을 때 문득 “‘최고의 요리’란 대체 뭐지?”하는 생각이 들었다. 꽤 깊게 그 생각에 매달렸던 것 같다. 그러다 ‘요리’와 구별되는 ‘음식’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요리는 맛을 추구하는 것이지만, 음식은 생존을 추구하는 것이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언젠가 이 화려한 요리의 세계에서 은퇴를 하게 되면, 음식을 연구하고 싶었다. 친구(김성신)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줬더니, 라틴어에서 ‘pabulum’이라는 단어가 바로 ‘음식’이라면서 여기에 영어식으로 ‘-er’을 붙여 파불루머라는 말을 만들어 줬다. 그 단어가 마음에 들어서 칼럼 쓸 때 붙여서 썼다. 내가 생각하기에,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정성을 다해 매일 먹을 것을 만드는 주부들’이야말로 파불루머이며, ‘진정한 최고의 요리사’라는 생각이 든다.

Q. 책의 기획을 친구이자 출판평론가인 김성신 평론가가 했다고 들었다. 처음 책을 기획하던 때의 이야기를 들려 달라.

초등학교 때의 친구를 36년 만에 동창회에서 다시 만났다. 서로 살아온 이야기를 오래 나누다가 그 친구가 내 생각을 글로 적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펄쩍 뛰었다. 평생 글이라곤 보고서 밖에 쓴 적이 없는데 어떻게 글을 쓰냐고 했다. 그런데 김 평론가는 끈질겼다. ‘너처럼 건강한 생각을 하는 중년의 남자를 본적이 없다’면서 자신만 믿으라고 했다. 그리곤 며칠 후에 책을 잔뜩 가지고 와서 무조건 읽기만 하라고 했다. 나는 그저 친구의 말을 따랐다. 그가 권해준 책들은 내가 보지 못했던 책이었다.

음식에 관한 인문학서나 요리를 모티브로 한 에세이, 식제료를 다룬 사회학서 등등 다양했는데… 요리나 음식에 관한 책이 그렇게 많다는 것이 우선 놀라웠고, 모든 책이 흥미진진했다. 한마디로 내 머리에서 신세계가 열렸다. 그렇게 꼬박 1년을 책만 읽었다. 그리고 1년 쯤 지났을 때, 김 평론가가 <스포츠경향> 문화부에서 지면을 내주기로 했다면서 칼럼을 써야 한다고 말했다. 겁이 났지만 친구는 충분히 쓸 수 있고, 자신이 도움도 주겠다고 했다. 내가 글을 써서 김 평론가에게 보여주면, 그것을 가지고 논술수업 하듯이 한 문장 한 문장 첨삭하며 가르쳐 주었다. 점점 글을 쓰는 것이 재미있어졌다. 김 평론가는 지금도 매번 내 칼럼에 대해 조언해준다. 그렇게 지난 4년 동안 칼럼을 썼고 그것을 모아 책으로 낸 것이다.

Q. 읽고, 쓰는 생활을 뒤늦게 하면서 가장 크게 바뀐 것은?

책을 통해 지금껏 알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 훨씬 크고 멋진 세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것을 보고 나니 중년이지만, 나는 새로운 꿈을 꿀 수 있었다. 다시 꿈꾸는 사람이 된 것이 가장 크게 바뀐 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신이 가진 전문성을 바탕으로 세상을 위해 의미있는 일을 하는, 그런 훌륭한 사람들이 책에는 수많이 등장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 ‘나는 오직 나만을 내 가족만을 위해 살았구나’ 하는 반성을 하게 되었다. 이런 내 생각과 세계관의 변화… 그게 가장 크게 바뀐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변한 것이 하나도 없다. 

Q. 일상의 많은 순간 책이 늘 등장한다. 어머니를 추억하거나 가족과 식사를 할 때 등… 책은 자신에게 어떤 존재인가?

사람이 자기 욕망에만 충실한 것은, 식재료가 요리되지 않고 있는 것과 같다. 고인 물처럼 썩는다. 인간이 그렇게 하면 부도덕한 거다. 그래서 자신이 서 있는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더 좋은 전문가, 더 훌륭한 인간이 되고자 꿈꾸고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했다. 독서는 이렇게 중년의 요리사인 나를 변화시켰다. 독서는 정말이지 인간의 행위 중에 가장 놀라운 위력을 가진 행위인 것 같다.

Q. 책 속에는 마음의 양식인 음식을 만드는 ‘음식가’로서 갖고 있는 요리에 대한 철학이 곳곳에 녹아 있다. “요리사는 타인을 즐겁고 행복하게 만드는 가장 도덕적인 직업”(207쪽)이라고도 했다.

요리사라는 직업의 속성 자체가 그러하지 않은가? 타인이 먹을 음식을 만드는 일이다. 당연히 24시간 타인을 생각하고 연구해야 한다. 음식을 만든다는 것은, 1차원적으로는 맛이라는 감각을 추구하는 것이지만, 그 다음 차원에서는 타인의 건강과 생명에도 관여한다. 그리고 최종적 차원에서는 누군가의 마음, 누군가의 영혼에도 영향을 미친다.

가령 『우동 한 그릇』과 같은 책은 음식 이 사람의 마음과 영혼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가르쳐주는 이야기이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요리사가 반드시 갖추어야할 것이 바로 도덕성이라고 생각한다. 사람 너머에 있는 돈이나 명예, 성공 따위를 탐하는 사람은 요리사가 되면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런 사람이 요리사가 되면 번드르르한 가짜 실력으로 사람과 세상을 크게 해칠 수도 있다. 히틀러도 굉장히 성실한 독서가였다고 한다. 도덕성은 대지고, 실력은 그 위에 짓는 집이다. 도덕적 감수성은 내가 초보 요리사들을 가르칠 때 제일 중점적으로 보는 부분이기도 하다. 

Q. 30년 가까이 가족과 추석을 함께 하지 못하는 등 요리사의 삶에는 남다른 희열도, 남다른 힘듦도 존재할 것 같다. 가장 기쁠 때, 가장 힘들 때의 이야기 를 듣고 싶다.

손님이 내가 만든 음식을 드시며 행복한 ‘표정’을 지을 때 나는 가장 기쁘다. ‘칭찬의 말’보다는 나는 손님의 ‘표정’을 좋아한다. 비언어커뮤니케이션이 말보다 훨씬 정확하게 사람의 마음을 전달한다.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일이라서 요리사란 직업이 나는 참 좋다. 초보 요리사 시절엔 모든 것이 힘들었지만, 30년이 가까워지는 이제는 힘들 때가 별로 없다. 글 쓸 때 가장 힘들다. 아무래도 글쟁이가 아니다보니 세상에 내 글을 내놓는 것이 늘 부끄럽기도 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글을 쓰는 것은, 그것이 반성과 성찰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Q. ‘요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지금도 종종 던지며 살고 있는 이유는?

세상에 가장 좋은 소설, 가장 좋은 그림… 그런 것은 존재하지 않듯이, 요리도 그렇다. 답이 없는 질문을 끝없이 던져야 하는 일이라서 어렵다. 힘들다고 질문을 멈추는 순간 나의 직업적 정체성도 끝난다고 생각한다. 질문을 멈추면, 요리는 단지 돈을 버는 도구가 되거나, 단순노동이 되어버린다. 그렇게 살고 싶지가 않아서 나는 계속 질문을 던진다.

Q. 요리를 시작했을 때는 ‘초심’을 깊이 생각한다고 했다. 초심을 재차 떠올리는 이유는?

악당이 되고 싶지 않아서다! 누구라도 그렇다. 자신의 직업 의식(직업적 소명)에 대해 스스로에게 계속 질문하는 사람은 악당이 될 수가 없다. 초심이란 ‘순수한 열정’을 뜻하는 말이다. 그것을 자주 떠올리고 생각하라는 것은 도덕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 초심’이라는 말을, 사람들이 단순히 겸손을 가장하는 데에 남용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초심을 지킨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결심이기도 하다. 그 무게감을 온전히 느껴야만 ‘초심을 지키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Q. 독서와 요리의 닮은 점이 있다면?

독서와 요리, 오히려 닮지 않은 점을 찾기가 어렵다. 둘은 거의 같은 행위다. 좋은 책은 또 다른 책을 읽고 싶도록 만들 듯이, 좋은 요리도 그렇다. 또 먹고 싶게 만든다는 것도 닮았다. 사람의 마음과 진정성이 가장 정확하게 전달되는 매체라는 측면에서도 독서와 요리는 닮았다.

 

불과 칼 사이에서 따뜻한 책읽기를 실천한 그의 『독서주방』은 독서야말로 우리 인생에서 얼마나 멋진 일들을 꿈꿀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최초의 아이스크림’, ‘최초의 댄스파티’ 등 한국 서구 문화의 근원뿐 아니라 일제시대부터 근대, 현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 온 웨스틴조선호텔에서 그의 칼이 닿은 디저트를 먹는다. 이탈리아 스타일의 티라미슈, 크림 향을 진하게 느낄 수 있는 얼리지 않은 디저트가 혀 끝에서 살살 녹는다. 그의 문장처럼.

 

 

* 《쿨투라》 2019년 11월호(통권 6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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