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Theme] 출판 2.0 - 한국에서의 프랑스 문학과 영화: 아르망 가티의 경우
[11월 Theme] 출판 2.0 - 한국에서의 프랑스 문학과 영화: 아르망 가티의 경우
  • 앙투완 코폴라(프랑스 영화비평가, 성균관대 교수)·번역_송기정(이화여대 불문과 교수)
  • 승인 2019.11.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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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6월, 시인, 극작가이자 유명한 기자인 아르망 가티는 북한 평양에서 영화 <모란봉>의 시나리오를 작성한다. 그 다음 달에 클로드-장 보나르도가 영화의 감독을 맡는다. 프랑스의 20세기 랭보라고 불리는 아르망 가티와 한국 영화계의 만남이 어떻게 이루어질 수 있었을까? 그것이 우리가 이 글에서 다룰 내용이다.

 

아르망 가티: 저항에서 글쓰기로

가티는 1924년 모나코에서 태어났다. 이탈리아 아나키스트인 그의 아버지는 청소부였고 1942년 파업 중에 죽임을 당했다. 아버지의 시신, 그의 깨진 두개골 앞에서 가티는 “아버지, 아버지가 제게 들려주신 이야기들은 모두 죽지 않았습니다. 제가 언젠가 이야기를 전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야기꾼과 신화학자로서의 그의 운명에는 이미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세계 제2차 대전 동안 그는 나치 집권 하 독일의 함부르크 공장에서 강제로 일했다. 그는 그곳에서 벗어나 유럽을 걸어서 횡단했고(시인 횔덜린이 이야기했듯이) 네덜란드 전투에 낙하산 부대 대원으로 참전하기 위해 레지스탕스에 합류하였다.

<리베라시옹Libération>에서 가티는 초현실주의자이자 영화 비평가인 필립 수포를 만난다. 수포는 가티를 앙리 미쇼, 미셸 투르니에, 질 들뢰즈, 카텝 야신이 왕래하던 문학계에 소개한다. 가티는 <르 파리지앙 리베레Le Parisien Libéré>의 편집위원이 된다. 그의 기사는 모든 형태로 만연해 있는 불의와 싸운다. 동시에 그는 시를 쓰고 (피에르 불레즈의 실험음악을 위한 <망각 혹평 받은 신호Oubli signal lapidé>) 그리고 희곡을 썼다(<검은 물고기>). 1954년에 그는 리포르타주 <맹수 우리의 특파원 Envoyé spécial dans la cage aux fauves>로 알베르 롱드르 상을 받고 취재를 위해 남아프리카로 떠난다.

과테말라에서 쿠데타가 일어나는 동안 그는 아직은 젊은 아르헨티나인 의사였던 체게바라를 만난다. 1955년 그는 쇠이유Seuil 출판사 ‘플라넷Planète’총서의 감독과 사진가 크리스 마커 그리고 다른 이들과 함께 러시아, 시베리아, 몽골, 그리고 중국으로 떠난다. 그는 관한경(關漢卿)의 중국 극을 발견하고 북경 오페라의 유명한 배우이자 세르게이 에이젠슈테인의 친구인 메이란팡(梅蘭芳)을 만난다. 그는 마오쩌둥도 만난다.

1956년에 그는 식민지 지배자의 언어인 스페인어와 과테말라 인디언의 언어를 등장시킨 <케찰 Le Quetzal>을 쓴다. 케찰은 국가 지폐에 새겨짐으로써 ‘반어적으로’ 자유를 빼앗겨 죽는 새를 상징한다. 1957년에 그는 중국 극작법에 대한 자신의 분석에서 영감을 얻어 <검은 물고기>를 집필한다. 작품은 미래를 건설하기 위해 과거를 지우고, 영원한 삶을 가져다주었을 검은 물고기를 죽임으로써 죽음을 맞이하는 진시황제의 전설을 이야기한다. 1958년에 가티는 감독이자 작가가 된 크리스 마커, 근대철학자이자 사르트르의 조수인 클로드 란츠만, 가수 르마르크, 그리고 영화감독 보나르도가 떠나는 북한으로의 단체여행에 합류한다. 평화공존의 시기에 평양의 지도자들은 프랑스 지식인과 예술가를 초청하고 싶어했다.

 

가티와 프랑스인들의 한국 도착 배경

여행을 떠난 프랑스인 대부분과 가티는 반스탈린주의자였고, 오직 가수 르마르크만이 프랑스 공산당의 스탈린주의자였다. 르마르크를 제외한 이들은 다른 문명을 경험하는 것을 통해 혁명을 위한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자 하였다. 그들은 김일성이라는 인물과 한국의 상황을 잘 알지 못했다. 란츠만은 숙청과 독재정권의 존재를 알게 되어, 김일성과 그 주제에 관해 이야기를 나눌 기회를 얻으려 했다.

영화를 찍기 위해 장비를 갖추고 온 가티와 보나르도는 조선 필름Choson Film이 북한에서 장편영화를 만들도록 그들을 초대했다는 것을 듣는다. 보나르도는 35㎜ 카메라와 필름을 가져왔다. 평양 스튜디오의 지도자들은 그들에게 영화를 만드는 데에 필요한 모든 기술적인 수단을 제공했는데, 초반에는 자유롭게 영화를 촬영할 수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당국은 ‘평화주의’와 ‘재건설’이라는 구호를 장려하고자 했다. 그 시기에 북한의 재건설이 구체화되었다(나라의 대부분이 전쟁 동안 미국의 폭격으로 파괴되었다). 그들은 김일성을 만난다. 란츠만이 그와 대화하였으나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분명 그들은 실망했을 것이다. 그리하여 그와 크리스 마커는 벌써 중국으로의 여행을 준비하였는데, 그들은 백화(白花)라고 불리는 지방에서 살았던 마오의 지도자들에게 영화에 대한 계획을 소개해야 했다. 처음에 지도자들은 표현의 자유와 비판 정신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프랑스인들은 호기심을 가졌다. 한편 북한 지도자들은 프랑스인들에게 이후 관광지가 될 일상공간을 관람시켜 주었다. 크리스 마커는 이후 유명한 책인 <한국인들>에 실리게 될 사진을 찍었는데, 당시 그 사진들은 가티가 이미 쓰기 시작했던 미래의 영화를 위한 사전 물색 작업 같아 보였다.

가티의 기획과 시나리오

가티가 평양에서 글을 쓰던 시기의 우편엽서가 남아있다. 서정이 넘치는 문체의 편지는 파리에 있는 그의 부인에게 쓰인 것이다. 그는 다음과 같이 쓴다.

“놀라운 영화가 될 거야. 십만 명의 엑스트라와 배우들이 필요할 거야. 나는 작품성 있는 시나리오를 구상하기 위해 카페에서 밤낮으로 작업했어. 파리와 평양은 조금도 다르지 않아. 진심을 담아 당신에게.”

집필 초반에 가티는 완전히 자유롭다고 믿고, 조선 필름이 이후 촬영 동안 보나르도에게 가할 압력에 대해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던 듯하다. 그의 아이디어는 중국 극작법에서 터득한 것을 활용하여 <검은 물고기>를 쓰는 것과 한국 전통 판소리 <춘향전>을 한국전쟁 시기로 위치시키는 것이었다. 가티는 영화의 시놉시스에서 이렇게 설명한다.

“이 옛이야기는 연인들을 사로잡을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연인들의 모험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나타날 것이고, 이야기와 함께 제국의 시대와 현시대 사이에 존재하는 간격이 조정될 것이다.”

시대와 이야기를 서로 겹치고, 복잡한 진실을 파악하기 위해 관점을 다양화하는 것이 가티가 ‘중국의 셰익스피어’라 불리던 관한경의 작품에서 도출한 서사 기법이다. 그는 ‘셀메르selmaire’(즉흥연기에 알맞은 상징적인 장면)라는 개념과 ‘병행 관계 parallélisme’(스스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이야기)라는 개념에 대해 말한다.

가티는 모더니스트와 비슷한데, 모더니스트는 이후 마그리트 뒤라스, 그리고 마치 시간을 초월한 듯 말하는 그녀의 몽유병적이고 유령 같은 인물들(<모데라토 칸타빌레>와 특히 1959년의 <히로시마 내 사랑>)과 같은 시기에 나타날 것이다. 가티가 브레히트식으로 대중과 활발하게 소통하려 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그의 극작법은 거리를 두고 의식하게 하는 방식에 가깝다. 하지만 그것은 로고스와 공연가능성을 넘어서야 한다.

가티의 실험적인 창조성은 1958년에 이미 들끓고 있었으며 이후 더 발전한다. 영화배우와 기술자를 위해 한국어로 번역된 첫 번째 시나리오에는 비판적인 내용이 있었을 것이고, 당시 북한 영화에서 이루어지던 것과 뚜렷하게 구분되었을 것이다. 북한의 사회주의 리얼리즘은 이후 ‘주체’ 사상이 될 이념의 색채를 띠고 있었 다. 그들은 계속해서 동일한 모럴리스트 역사, 그리고 북군이나 지도자들의 위업을 여러 번 되새기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가티의 초고는 보나르도에 의해 그대로 구현되지 않았다. 가티는 이후 프랑스로 돌아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나는 그에게 일종의 괴물 같은 시나리오를 주었다. 그런데 그는 그 시나리오를 크레이프처럼 평평하게 고쳐야만 했다. (…) 그는 영화를 잘 마무리 짓기 위해 사자처럼 싸웠다. (…) 그리고 프랑스로 돌아와서는 검열과 싸워야 했다".

괴물과 크레이프의 은유는 가티가 예찬한 시대에 유행하던 포개기 superposition 기법과 대중을 놀라게 하고 도발하려는 그의 실험적 탐구를 떠오르게 한다. (포개기 기법은 이후 고다르의 <즐거운 지식>, 로지에의 <조르주 누구George qui?> 혹은 가렐의 <평범한 연인들>에서 보게 될 것이다), 영화의 검열은 4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공식적으로는 유엔군을 부정적인 방식으로 보여주었기 때문이지만, 사실은 비공식적으로 드골 정부의 검열은 반공산주의 노선을 따랐기 때문이다.

 

 상호문화적이고 혼종적인 영화 이야기

북한을 영화적 글쓰기의 장소로 삼는 것은 그 자체로 정치·미학적으로 실험적인 선택이다. 프랑스 예술가들에게 1958년의 한국은 현장에서 만들어지고 있는 인류의 생생한 역사였다. 그리고 그들은 예술과 예술가의 자리가 바로 그곳이라 생각했다. 이후 작품들에서 여러 번 반복된 가티의 아이디어는 과거의 모든 문화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적인 문화를 창조하는 것이다. 이 문화는 수동적으로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모두에 의해 동시에 생산된다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영화 <모란봉>(시립극장의 이름으로 수정된 제목)의 내용에서 전쟁 시기로 옮겨진, 춘향의 판소리가 ‘표방하는’ 로맨스(가티가 말하듯)는 중요하지 않다. 한국의 역사와 (그 영화를 지배하는) 프랑스 철학 사이에서 길잡이 역할을 하는 것은 ‘통일’이라는 이름의 목수라고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그는 북군을 따라가고 싶다고 말하지만 절대로 무기를 들지 않는다. 서울에 수용된 그는 평양에 있는 연인에게로 돌아가고 싶다고 하면서도, 자신이 처한, 자신을 방황으로 몰고가는 운명 앞에서 내적이고 실존적인 마비상태에 사로잡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영화의 영상을 보면 조선 필름이 보나르도에게 그네 위의 소녀나 판소리꾼과 같은, 전통적인 장면, 그리고 공사 중인 건물, 다리나 도로 그리고 특히 평양의 웅장한 새 극장과 같은 재건설의 주제와 관련된 이미지들을 포함하도록 요구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건물들은 원경에서 미미하게 보이는 데에 그친다. 프랑스인 기자 역할도 모습을 뚜렷하게 보이지 않는다.

감독인 보나르도가 기자 역을 맡았는데, 시놉시스에서 중요한 인물로 설정되고 있는 것에 반해 그는 별다른 일을 하지 않으며 때로는 거의 메타서술적métadiégétique이다. 이야기는 전쟁의 폭격과 수많은 죽음을 상기시킨다. 그런데 프랑스인이 연설하는 한 장면이 조선 필름 지도자들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자는 자신의 한국인 번역가이자 교수인 안내자에게 정치적 분쟁을 전쟁으로 해결하는 것에 대해 비난한다. 그리고 그의 안내자는 그에게 미래의 치명적이고 불가피한 보복의 필요성으로밖에 답할 수 없다. 또한 목수는 어떠한 정치적 발언도 하지 않는데, 그는 남한을 비판하지도 북한을 찬양하지도 않는다. 그는 정립된 이론적 이념을 넘어 행동을 통해 자신의 고유한 가치를 창조함으로써 카뮈의 뫼르소와 함께 프랑스의 실존주의적 주인공 계보에 속하게 된다.

상호문화적이고 혼종적인 영화 형식

영화의 연출 양식 또한 상호문화적이다. 가티와 보나르도가 판소리와 전통 회화로부터 영감을 받아 두 장르를 어떤 식으로든 영화에 통합하려 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당시 주목을 받았던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양식(예를 들어 로셀리니의 <독일 영년>과 비스콘티의 <흔들리는 대지>)에 빚을 지기는 했지만, 사람을 중심으로 하지 않는 넓은 공간에서의 이미지 구성은 특히 그 통합을 느끼게 한다.

음악과 때로는 무용같은 표현주의적인 배우의 연기 간의 섬세한 수직적 몽타주 기법은 다분히 의도적인 것으로 보인다. (이때 음악은 평양 국립관현악단에 의해 전통적인 궁중 음악의 계보 안에서 창작된 음악이다. 연기의 경우 때로는 무용처럼 보이기도 하고 표현주의적이다.)공사 중인 건물, 다리나 도로 그리고 특히 평양의 웅장한 새 극장과 같은 재건설의 주제와 관련된 이미지들을 동시에 특히 프랑스인 인물의 묘사를 통해 메타서술 실험에 대한 모더니스트적 탐구를 느낄 수 있는데, 예를 들어 그가 대중에게로 카메라를 돌리거나, 마을의 가짜 폐허가 불타는 것을 즐기는 것처럼 보일 때, 혹은 몇몇 장면에서 카메라의 그림자가 나타날 때나 인물의 말과 억양이 허구적 환영의 진지함을 깨뜨릴 때 그는 자발적으로 메타서술적이다.

즉, 그는 갑자기 “좋아, 안녕! 다음에 봐!”라고 외치는 것이다. 같은 모더니스트 핏줄을 가진 한국인 목수는 때때로 뒤라스의 몽유병적인 배우들과 비슷하다. 화면 배경으로 깔린 대교에서 연인들이 재회 하는 결말은 이러한 관점의 예시가 될 수 있다. 감정이 절정에 다다를 때 그들은 서로를 거의 보지 않은 채 바라본다. 그들은 조각이 되어버린 눈먼 자처럼 행동한다.

마지막으로, 영화는 은유를 통해 한국적 문맥을 넘어설 수 있는 상징적인 장면을 탐구한다. 예를 들어 목수가 광산, 철조망과 교도관을 피하고자 눈 속을 더듬거리며 기어갈 때 그의 신체는 문득 끝없는 눈의 하얀 영원성 안에서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인다. 이때 흰색은 또한 신체의 움직임이 곧바로 기록되는, 백지와도 같은 빈 화면의 색이다.

가티가 전위 예술가라는 점을 고려할 때, 그의 거리 두기 미학은 그리 놀랍지 않다. 그러나 영화 촬영이 계획했던 것과 다르게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은 중요하다. 보나르도는 당국이 촬영 지원을 조금씩 축소했을 때 조건이 얼마나 어려워졌는지 말한다. 실제로 작품의 후반부는 미완성인 것처럼 보이는데, 군데군데가 영화를 진실로 구현해 내기보다는 요약하는, 설득력 없는 짧은 시퀀스의 연속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화는 알제리 전쟁의 여론이 거세게 일 때 개봉 하여 곧 금지되었고, 1964년의 재개봉은 가티와 마커의 영향을 받은 지식인과 비평가들에게만 알려진 채 이루어졌다. 한국과 중국에서 돌아오자마자 가티는 카프카의 <성>을 각색한 글을 썼다. 그는 아마도 한국에서의 경험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이 글을 썼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카프카의 <성>을 촬영하려는 관찰자적인 외국인 영화감독을 또 인물로 등장시키기 때문이다. 이는 원작의 ‘미자나빔’일 뿐만 아니라 가티의 상황, 그리고 특히 <모란봉>을 촬영할 당시 보나르도의 상황의 미자나빔이기도 하다. 1959년 마침내 가티는 남아메리카 가상의 독재에 관한 희곡 <황소개구리>로 명성을 얻게 된다. 구체적인 결과가 어찌 되었든 문학과 영화 사이, 프랑스인과 한국인 사이의 이 경험은 오늘날 그 횡문화적인 면과 전위 예술가의 열정을 통해 지적으로 수준 높은 진가를 발휘한다.

 

 

* 《쿨투라》 2019년 11월호(통권 6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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