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티스트 신중현 3] 김추자, 신중현의 다른 ‘나’
[아티스트 신중현 3] 김추자, 신중현의 다른 ‘나’
  • 장석원(시인·광운대 교수)
  • 승인 2019.11.0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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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1971년 곡 <소문났네>를 듣는다. 노래가 끝난 후 떠오른 작품. 2011년, 장기하와 얼굴들의 <우리 지금 만나>였다. 무엇 때문에 40년 간극 속에서 비슷함을 발견한 것일까. 장기하를 먼저 알고 있었다. 가까운 과거가 더 먼 과거를 발굴하게 한 셈이다. 알지 못했던, 경험하지 못했던 것들이 새롭게 육박하는 것. 그 후에 더 먼 과거에서 근과거의 유사한 점을 추출하면, 그것이 전통에 귀속되는 장면을 체험하는 것. 그리하여 음악을 청취한 주체가 역사의 현장을 통과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과정.

장기하와 신중현의 우열을 말하자는 뜻이 아니다. 영향관계가 있었다면, 영민한 장기하는 신중현을 오마주(hommage)했을 것이고, 신중현은 자신의 특성을 재현해내는 아들 같은 아티스트가 뿌듯했을 것이다. 50여 년 전에, 음악의 기원으로서, 거장 (virtuoso)이, 그곳에 존재했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다시 만나지도 않으려고 약속하지도 않으면 / 또 다시 보고파서 나도 몰래 찾아 가보네 / 소문이 나게도 생겼지 / 아무리 서로가 토라져도 또 다시 만나 / 또 다시 만나 소문이 났네”와 “우리 지금 만나 당장 만나”(<우리 지금 만나>)에서 보듯 ‘우리 지금 만나’자, ‘당장 만나’자, 아름답고 소중한 우리의 음악을.

학생들에게 김추자를 소개하기 위해 ‘보여주기’를 선택한다. 유튜브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동영상. 학생들은 그녀의 목소리와 노래를 즐기지 못한다. 압도하는 시각적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 본 적 없는 율동을 보면서 쩔쩔맨다. 그들에게 김추자의 동작은 ‘막춤’에 불과할 것이니까. 그녀는 노래를 부르면서 자신의 감정에 몸을 맡기고 있을 뿐. 기계체조의 마루운동에 가까운, 맹연습하여 획득하게 된 기예 같은 춤이 아니다. 학생들의 감상평은 대부분 ‘쎄다’로 집중된다. 대중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태도, 그것이 대중인 대학생들을 불편하게 하는 듯하다.

두 번째는 순수한 청취의 시간. 프로젝터를 끄고, 학생들에게서 시각을 빼앗고, 청각의 시간을 열어놓는다. 눈 둘 곳을 잃은 학생들이 좌불안석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김추자가 부르는 <봄비>. 이 아름다운 명곡을 아는 학생 이 드물지만, 시각 이미지를 봉쇄당한 그들은 노래의, 음악의, 소리의 어떤 마력에 휘감기는 것 같다. 한 번 더 듣는다. 이번에는 다시 프로젝터 스위치를 누른다. 그녀가 살아 있다. 그녀의 라이브. 영상 속 김추자는 가사의 내용과 상관없이 격렬하게 움직인다.

춤이 아니다. 그녀는 음악과 하나가 되어 온몸으로 ‘봄비처럼’ 흐느낀다. 과장된 팬터마임 같은 몸짓을 보면서 이별한 사람의 절절한 고통을 느꼈다면, 찢어져 내던져진 ‘나’의 몰골을 바라보게 되었다면, 내가 이상한 것일까. 학생들이 감동한다. 아무런 설명이 없어도 “봄비 나를 울려주는 봄비 언제까지 나리려나 마음마저 울려주네 봄비”가 품고 있는 감정의 강렬함에 전염되는 중이다. 김추자의 마성이다.

50년 전에 김추자가 있었다. 학생들은 그때 그런 가수가 있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는 모양이다. 과거의 찬란함에 눈을 떠보자고 말한다. 그것이 공부이고, 그것이 지식이다. 그 역행의 항로가 새로움을 향해 나아가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고 말한다. ‘뉴트로(new-tro)’을 넘어서서, ‘레트로(retro)’를 관통하여, ‘역사’ 학습이 되는 순간이다. ‘재현 (representation)’이 아니라, 지금, ‘다시-나타나서 (re-present)’ 새로운 창조의 동력이 되는 그 시대의 김추자. 과거의 귀환을 기뻐하면서 우리 함께 춤추자.

김추자의 노래를 ‘접종’하다가 눈시울이 시큰해진다. 재니스 조플린(Janis Joplin)이 어른거린다. 1970년 라이브에서 재니스 조플린은 몸을 흔들면서 <Move Over>을 열창한다. 그녀는 그 해 맞이하게 될 죽음을 알고 있었을까. 한없이 청자를 아프게 하는 탁성이 가스등처럼 명멸한다. 기타와 올갠이 주고받는 연주 위에서 독무하는 가수. 김추자가 한국의 재니스 조플린이라는 말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김추자와 재니스 조플린은 동시에 발생했다. 도플갱어이다. 이 말은 신중현과 재니스 조플린이 동시대에, 그때까지 이 세상에 없었던 것을, 서로 다른 곳에서 창조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순수한 슬픔으로 사람을 정화시키는, 울어야 할 사람과 울 수밖에 없는 사람 앞에서, 황봉구 시인의 말 대로, “대신 울어주는 힘”을 지닌, <Summertime> 라이브가 열린다. 그녀가, 음악이 사람을 으깬다. 눈을 감는다. 4분 후에 나는 김추자를 만날 것이다. <나뭇잎이 떨어져서> 가을이 찾아온 것일까. 불꽃 위에 올라선 듯한 느낌. 김추자의 고음은 동사 ‘뚫는다’를 실행한다. 듣는 사람은 뚫린다. 그녀는 ‘뚫릴 것이다’를 내장한 채 다가온다. 가수의 목소리를 위해 연주가 배면에서 숨을 죽인다.

가을바람이 불면 아름다운 추억을 망실하게 되나요? 내가 묻자 김추자는 ‘라 라 라 라’ 허밍하면서 도망가 버린다. <알 수 없네>가 쫓아왔다. 나는 지금 50년 전, 1969년을 2019년에 펼쳐놓았다. 단순하지만, 단순한 만큼 경쾌하고, 또 그만큼 새로운, 소중한 음악의 발견. 신중현의 기타 후주는 이전에 없던 것이고, 내가 아직까지 들어본 적 없는 새로운 소리이다. 김추자는 조심스럽게 전진한다.

-신중현은 김추자가 되어, 여성의 목소리로, 표현할 수 없었던 열락을 실현하는 것 같다. 목소리와 연주는 신중현이라는 주체의 몸, 그 한계 안에 갇힐 수밖에 없다. 다른 주체인 여성을 선택하여 ‘ 나’가 가질 수 없었던 것까지 창조하는 기쁨. 시인이 무수한 화자로 변신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닌 것과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 물론 시인은 다른 화자가 된다 해도 결국 ‘나’의 목소리 하나만을 가질 수 있지만. 육성이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김추자를 ‘통해’ 발현한 신중현.

-<거짓말이야>가 나의 뒤통수를 때린다. 정신 차리시지요. 거짓말하지 말라고, 뻥치지 말라고 씨익 웃는 것 같다. 간주에서 나는 복부 한 쪽이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공복감. 음식은 필요 없다. 음악을 몸에 넣는다. 부풀어 오르는 풍선이 된다. 빵빵해진 배, 둥둥 떠다니는 나……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야 사랑도 거짓말 웃음도 거짓말 거짓말이야.” 정말일까. 사랑은 거짓말일까. 사랑이라는 거짓말에 빠져 나는 나를 잊은 것인가. “그대 나를 만나고 나를 버렸지 거짓말이야.” 이별이 거짓말이라는 것인가. 가사의 맥락을 끊어버린다. 나는 오독하기로 작정한다. 사랑이 거짓말이 아니라 ‘나 를 버렸다’는 사실이 거짓말이라고 믿어버린다. 그래야 덜 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가 나를 속인 것 보다 더 많이 나는 나를 속여야 한다. ‘사랑해, 당신을 사랑해, 영원히 사랑해.’ 내가 들었던 그 모든 말이 거짓말이라고 해도, 나는 “또다시 보고파서 나도 몰래 찾아가”(<소문났네>)서, 그 사람, 숨어 바라본다. 이 환상도 ‘거짓말’이라고 김추자가 쌩긋 웃으면서 노래 불러준다.

-행진곡이 시작된다. ‘작은북’ 소리 울려 퍼진다. “월남에서 돌아온 새카만 김상사 너무나 기다렸”는데, 이제야 돌아와서 하얗게 웃고 있는 김상사. 베트남 전쟁의 역사적 의의, 참전국 대한민국의 역할과 책임과 반성 같은 것을 말하는 자리는 따로 있어야 하는 것. 김추자의 노래에서 우리가 참관(參觀)하는 광경은 이러하다.

굳게 닫힌 그 입술 무거운 그 철모 / 웃으며 돌아 왔네 / 어린 동생 반기며 그 품에 안겼네 / 모두 다 안겼네 / 말썽 많은 김총각 모두 말을 했지만 / 의젓하게 훈장 달고 돌아온 김상사 / 동네 사람 모여서 얼굴을 보려고 / 모두다 기웃기웃 / 우리 아들 왔다고 춤추는 어머니 / 온 동네 잔치하네 / 폼을 내는 김상사 돌아온 김상사 / 내 맘에 들었어요 / 믿음직한 김상사 돌아온 김상사 / 내 맘에 들었어요 ― <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 부분

그을려서 더욱 건장해진 몸으로, 멋진 군복을 입고 철모까지 갖춰 쓰고 김상사가 돌아왔다. 그는 활짝 웃으며 보무당당 마을로 걸어 들어온다. 동네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 나간다. 죽지 않고, 살아서, 마침내, 번쩍거리는 계급장을 달고 돌아온 김상사는 자랑스럽다. 기다리던 동생을 안아주는 김상사. 가슴에는 훈장이 달려 있다. 돌아온 사실이 실감나지 않는다. 돌아오지 못한 용사들이 얼마나 많은가. (월남참전 전우회가 생각난다. 군복을 입은 그들을 광화문 일대에서 본 적 많다. 우리 동네 먼 친척 ‘김상사’도 그 인파 속에 있을지 모르지만, 노래 속의 김상사를 그곳에서 목격한 적은 없다.)

금의환향이다. 동네 사람들이 집안을 기웃거린다. 어머니를 주목한다. “우리 아들 왔다고 춤추는 어머니”의 웃음을 마음에 새긴다. 어머니가 염원하던 무사 생환이라는 기적 앞에서 “온 동네 잔치”는 당연한 축제. 떠들썩한 기쁨과 뜨거운 행복의 정경이 눈에 선하다. 맘껏 먹고 마시고 춤춰도 되는 날이다. 김상사가 돌아왔기 때문이다.

마을 사람 뒤에서 이 노래를 부르는, 이 노래가 품고 있는 서사를 보고하는, ‘나’의 수줍은 표정이 노래 맨 뒤에서 드러난다. ‘나’는 씩씩하고 믿음직하고 남성적 매력이 분꽃 씨앗처럼 새까맣게 뭉친 ‘ 김상사’가 맘에 든다. 사랑에 눈뜬 아가씨의 설렘으로 노래의 초점이 이동하는 순간이다. 한 편의 연애시가 시작되려고 한다. 하지만 이 노래는 연애시가 되기를 멈춘다. 딱, 거기까지! 김상사를 ‘맘에 들어할 뿐’이다.

사랑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결혼이 실현될 가능성을 추측해볼 수도 없다. ‘나’와 김상사의 사랑과 결혼은 70년대 이후의 역사와 연결될 것이다. 그들의 사랑과 이별 또는 결혼과 이혼은 결정되지 않았다. 역사가 개인의 삶을 어떻게 관여할 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1970년 대가 이 둘의 수줍은 연애 이후의 삶으로 기록될 것이다. 둘이 낳은 아이들이 벌써 나이 50이 되었다. 오늘 이전 한국 현대사의 50년이 김추자의 달뜬 목소리에 녹아들어 있다. 행진곡 리듬은 1969년 이후 현대사의 진행 속도 같은 느낌이다. 베트남에서 죽어간 자들, 그 나라의 역사는 그곳에서, 대한민국의 참전용사가 살아낸 삶, 우리 시민들의 역사는 이 곳에서, 맥동했다. 김상사는 그날 밤, ‘나’를 찾아 와 으스러지게 안아줬을 것이다. 진한 입맞춤도 있었을 것이다. 밝은 달 아래의 연인들에게는 어둠마저 포근했을 것이다. 두 사람 앞에 1970년대가 열리고 있었다.

신중현의 『헌정 기타 기념 앨범』의 6번 트랙, <바다>에는 “하얀 파도”와 “하얀 모래”가 “거침 없”이 펼 쳐져 있다. 활활판(滑滑板)을 타고 달리는 것 같다. 활력 넘치는 락앤롤이다. 레드 제플린(Led Zeppelin) 의 <Rock and Roll>처럼 몸을 움직이게 만든다. 아 열대의 바다. ‘코발트 블루’의 바다. 트로피카나 베이. 사랑하는 사람과 손잡고 걸어가고 싶은 바다. 바람에 날리는 린넨 셔츠. 검은 선글라스 표면을 미끄러지는 흰 구름. 신중현의 노래는 터지지 않는다. 움켜쥐고 놓지 않는다. 기타를 위해 성대를 아낀다. 건반 밑에서 나오지 않는다. 키보드 사운드의 전면화. 해변 도로를 달리는 차에서 만끽하는 바람의 질감. 드라이브하는 중인데, 음악은 드라이하다. 드라이 아이스 연기가 피어오른다. 서늘한 날카로움이다. 뜨거운 삼킴이다. 노래가 끝나고 신중현의 기타 연주가 활주하기 시작한다. 착륙이 아니라 이륙. 비상. 날개를 펼친다. 날개 아래 거대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새처럼 신중현은 날아가버린다. 기타를 위해 다른 것들이 발맞춰 달려온 셈이다.

어두워지면서(fade out) 신중현의 기타는 석양의 마지막 불꽃처럼 날름거린다. 자신의 뜨거운 감정을 거친 락 음악으로 표현하고 싶었던, 그가 지녔던 생의 열망을, 가감 없이 전달받는다. 벌컥거리는 심장. “사랑 희망 가득 넘”친다. 그가 음악으로 그려낸 바다에는 동심이 가득(“문어가 나와 있네 춤을 추네, 거북이도 나와 있네 옷 말리네, 고래가 물을 품네 샤워하 네”)하다. 사랑의 포말 부서지는(“하얀 돛단배 멀리 간다네 하얀 구름을 따라 간다네”)밝고 투명한 오전 11시의 바다. 신중현의 <바다>는 김기림과 정지용의 그 ‘바다’를 연상하게 한다.

 

푸른 바다의 침상(寢牀)에서
흰 물결의 이불을 차 던지고
내리쏘는 태양(太陽)의 금(金)빛 화살에 얼굴을 얻어맞으며,
남해(南海)의 늦잠재기 적도(赤道)의 심술쟁이 태풍(颱風)이 눈을 떴다.

―김기림, <기상도(氣象圖)> 부분

 

바다는 뿔뿔이
달아나려고 했다.

푸른 도마뱀 떼같이
재재발렀다.

꼬리가 이루
잡히지 않았다.

―정지용, <바다 9> 부분

 

 

* 《쿨투라》 2019년 11월호(통권 6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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