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돈균의 인문학으로 세상읽기 3] 패턴화된 일상, 반복 불가능한 사건으로서의 사랑·시
[함돈균의 인문학으로 세상읽기 3] 패턴화된 일상, 반복 불가능한 사건으로서의 사랑·시
  • 함돈균(문학평론가)
  • 승인 2019.11.01 0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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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패터슨'에 부쳐

버스운전사의 삶은 시계의 움직임과 같다. 그는 늘 같은 시각에 일어나 출근하며, 그의 버스는 일정한 시간을 주기로 일정한 속도로 일정한 간격의 정류장에 멈추었다가 다음 동네로 이동한다. 마치 시계의 초침, 분침, 시침이 그렇게 각 구간을 일정한 규칙성을 가지고 통과하듯이. 일정한 규칙성이 반복될 때 그것은 하나의 리듬이 되는데, 이 리듬이야말로 우리가 ‘일상’이라고 부르는 그것이 아닐까.

 주인공 패터슨은 자신이 살고 있는 도시 패터슨과 동일한 이름을 지닌 버스운전사다. 그는 아침마다 그를 깨우는 시계처럼 단조로운 일상의 규칙성에 속박된 생활인인 동시에 그 일상의 경계에서 관찰자로 존재한다. 생활인인 동시에 생활의 관찰자로서 그의 이중정체성은 영화 내내 패터슨의 위치를 모호하게 한다. ‘시인’의 대리표상인 주인공의 이름과 동네 이름이 같다는 것은 오늘날 일상과 예술이 지닌 일체성에 대한 노골적 암시다. 즉, 이론적으로 일상의 모든 풍경은 시가 될 수 있으며 예술의 재료가 될 수 있다. 신선과 용과 비극적 영웅을 그리는 게 아니라, 나날의 노동과 하잘 것 없는 생활의 단조로움이나 유치한 연애 스캔들을 묘사하는 형이하학이 시와 예술의 조건이 된 세계, 이것이 바로 이 시대의 이름인 ‘현대’인 것이다.

ⓒ그린나래미디어

그러나 주인공 패터슨은 모든 등장인물과 일정한 심리적 간극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그는 전적으로 일상에 녹아들 수도 없는 부유형 인물이다. 이러한 패터슨의 모호한 정체성은 현대시의 창시자인 보들레르가 이미 오래전 간파한 현대예술가의 정체성에 대한 관점에 감독 짐 자무시가 수긍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감독은 시인을 ‘천재’로 이해하던 낭만주의적 문학관에 동의하지 않는다. 시인은 일상인이며, 그러므로 그가 쓴 시도 일상 체험에 근거한 것이다. 버스정류장을 지나는 버스의 움직임, 요일별 에피소드가 그가 쓴 시의 리듬의 근간을 이루며, 버스 안 사람들의 이야기들이 이미지의 중핵을 이룬다. 그러나 이 재료들이 그 자체로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패터슨은 버스운전사고 아직 정식 출판을 한 일도 없는 ‘잠재적 시인’이지만, 자신의 시가 아내의 컵케익이나 기타연주·노래 같은 ‘아마추어리즘’일 수는 없다는 자의식을 분명히 지니고 있지 않은가. 누구나 시 쓰기를 시도할 수는 있지만 아무나 시인이 될 수는 없다. 

ⓒ그린나래미디어

패터슨의 시 노트가 애완견에 의해 다 찢겨졌을 때 보인 아내와 패터슨의 인식 차는 이런 점에서 시사적이다. ‘패턴’ 무늬에 집착하는 성향을 지닌 그의 아내는 찢어진 노트를 붙여 그의 시가 ‘다시’ 컴퓨터로 옮겨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패터슨은 패턴화된(반복되는) 일상을 재료로 삼은 시라 하더라도, ‘작가’에 의해 시로 전환된 예술적 가공은 동일한 형태로 반복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시 노트 사건 이후 연인과 결별한 이웃과 패터슨이 마주치는 장면은, 패터슨-짐자무시가 사랑의 유일무이성과 시의 반복불가능성을 같은 성격의 것으로 이해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한 명의 사랑의 대상은 그 자체로 유일무이하며, 설령 이후에 그가 세상에서 또 다른 사랑의 ‘재료’로서 한 사람을 만나 기쁨을 느끼는 행운을 누린다 하더라도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다. 실연에 깊은 상처 속에 빠져 있던 한 인간은 그때 ‘다시’ 사랑할 수 있는 회복력을 갖게 된 것이 아니라, 다만 ‘새로’ 사랑할 수 있는 매우 운좋은 기회를 얻게 된 것이라고 해야 한다.

그래서 패터슨은 차라리 (지워진) 빈 노트가 새로운 창조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일본 작가의 말을 받아들인다. 지루하고 단조로운 일상일지라도 시의 창조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그러나 늘 시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패턴화된 시간에서조차 반복 불가능한 풍경을 포착하고 이 풍경을 유일무이한 작가적 체험으로 가공할 수 있는 ‘관점의 드라이빙’이다. 시는 바깥에 있지 않다. 내 마음이 시를 만든다. 무수한 사랑의 대상과 반복되는 삶의 계기가 생활에 존재하지만, 유일무이한 사랑의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동력은 바로 나 자신이다. 모든 사랑은 그래서 엄밀히 말해 ‘풍경’이 아니라 ‘드라마(drama)’다. 그리스어로 드라마란 '행위'란 뜻이다. 행동해야, 저질러야 사랑도 발생한다. 그때 당신은 알고 있어야 한다. 그 행동은 당신의 인생에서 실존을 흔드는 유일무이한 시적 사건의 새로운 도발이라는 사실을.

 

 

* 《쿨투라》 2019년 11월호(통권 6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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