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월평] 네가 사는 곳은 어때?
[드라마 월평] 네가 사는 곳은 어때?
  • 김민정(드라마평론가·본지 기획위원)
  • 승인 2019.11.01 06: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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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열심히 듣고 있는 노래가 있다. 선우정아의 <그러려니>. 담담하게 읊조리는 듯한 창법도 마음에 들지만 무엇보다 굳은살 가득 박인 나의 심장을 울리는 건 창법보다 더 담담한 노랫말이다.

“만나는 사람은 줄어들고 그리운 사람은 늘어간다. 끊어진 연에 미련은 없더라도 그리운 마음은 막지 못해. 잘 지내지. 문득 떠오른 너에게 안부를 묻는다.”

만약 누군가 나에게 지금 이 순간 유언을 남겨야 하는데 무슨 말을 할 거냐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할 것이다. “그립다.” 그런데 나의 그리움은 과거의 특정 대상보다는 내가 아직 만나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한 것들, 앞으로 내가 상실할 것들을 향해 있다. '봄날이 간다'에 슬퍼하는 건 그나마 심장이 말랑말랑할 때의 이야기다. ‘봄날이 또 온다’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 심장이 딱딱하게 굳어 버린다.

첫사랑이 왜 첫사랑이겠는가. 두 번째 사랑도 있고 세 번째 사랑도 있기 때문이다. 사계절처럼 순환하는 삶의 희로애락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웬만한 일에는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경지에 도달한다. 등단 8년 차 소설가가 되어 수십 명의 사람을 살렸다가 죽였다가 이런저런 일들을 두루 경험하다 보니 실제 나이보다 폭삭 늙는 건 어쩔 도리가 없다. 드라마 평론가로 옆에서 지켜본 인생까지 합하면 그 경험치는 수백 년을 거뜬히 넘긴다. 오늘은 ‘또 하나’의 어제일 뿐이다. 그렇게 삶의 달콤쌉싸름한 클리셰에 심드렁해지고 있을 무렵 만난 드라마가 바로 한·중·미 합작 웹드라마 <드라마월드>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한국드라마를 좋아하는 미국 소녀가 실제 드라마 세계에 들어가게 되면서 흥미진진한 일들이 벌어진다. 한지민, 최시원과 같은 한류 스타가 카메오로 출연해 화제가 되기도 했지만 뭐니 뭐니 해도 이 드라마의 인기 요인은 한국 로맨스드라마의 장르적 관습을 패러디하는 세련된 감각이다. 불행도 반복되면 지겨워지는 법인데, <드라마월드>는 ‘한국식’ 로맨스드라마의 공식을 유쾌하게 비틀면서 새로운 재미를 만들어낸다.

극중 드라마 공식이 적힌 책이 등장한다. 가령, 남자 주인공은 자신감, 외모, 약간의 오만함을 갖추되 여자 주인공을 우선시해야 한다거나 여성 시청자를 위해 남자 주인공의 샤워장면은 필수라거나. 그 공식에 의해 운영되는 ‘드라마월드’ 속으로 들어가게 된 미국 소녀 클레어는 처음에는 매우 신기해하고 그 상황을 즐긴다. 드라마 속 남자 등장인물들은 여자를 보호할 의무가 있고, 클레어가 넘어지는 시늉만 해도 남자들이 달려와 그녀를 부축한다. 극 후반부에 남자 주인공과 오해가 쌓인 클레어는 음식을 던지며 싸우다가 나중에는 김치로 남자의 뺨을 후려치기도 한다. 이 장면은 그 유명한 ‘김치 싸대기’를 연상시키며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낸다.

ⓒ넷플릭스

드라마를 보며 가볍게 웃을 수 있는 건 여기까지다. 클레어가 드라마월드에 들어오게 된 것은 남녀 주인공의 사랑을 이루어주기 위해서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사건에 의해 남자 주인공은 여자 주인공이 아닌 엑스트라인 클레어를 사랑하게 되고 스토리는 기존 로맨스드라마의 공식과는 다르게 흘러간다. 너무도 평범하여 “내 인생에서도 나는 조연”이었다는 클레어는 갑작스럽게 다가온 사랑에 당황해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행복한 결말을 맞이한다.

드라마가 시청자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이런 것이 아니었을까. 누구나 자신의 인생에서는 주인공이다, 뭐 이런 거. 자신이 드라마 속 등장인물이라는 것과 드라마 공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된 남자 주인공 박준은 클레어에게 묻는다. “네가 사는 곳은 어때?” 그러자 클레어는 대답한다. “시궁창이야(It sucks!). 결말이 어떻게 되는지 아무도 몰라.” 삶의 불확실성 아래 인간의 자유의지와 미래에 대한 희망에 방점을 찍은 드라마 속 명대사랄까. 예측 불가능한 삶에 대한 최고의 찬사다. It sucks!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의 시선을 잡아끈 것은 ‘엑스트라를 연기하는 여자 주인공’ 클레어가 아니라 ‘진짜 엑스트라’ 세스였다. 사랑을 이룬 클레어와 달리, 세스는 엑스트라에서 벗어나 주인공이 되기 위해 여러 드라마에 엑스트라로 출연하면서 모은 돈으로 웨이터에서 레스토랑 대표가 되었지만, 결국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중심 서사에서 밀려난다. 여자 주인공에게 외면당한 채 그는 마침내 드라마월드에서 강제 추방당한다. 반란의 대가였다.

플롯 측면에서 <드라마월드>가 지향하는 드라마 장르적 관습과 차이화는 클레어의 행복과 세스의 불행을 통해 적절한 지점에서 균형을 맞추며 성공적으로 안착한 것으로 보인다. 둘 다 실패하면 이야기 성립이 안 되고 둘 다 성공하면 시즌2의 이야기는 네 명의 남녀 주인공이 한데 뒤섞인 채 카오스 상태가 되기 때문이다. 세스의 실패가 드라마월드의 질서와 평화를 위해 꼭 필요하단 걸 머리로는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전히 엑스트라로 남겨진 세스가 눈에 밟혀 마음 한구석이 불편했다.

‘자기 캐릭터에 충실할 것’ ‘줄거리에 직접 엮이지 말 것’ 등과 같은 조력자 공식 또한 너무 폭력적으로 느껴졌다. 주제 파악하란 소리 아닌가. 자기 분수대로 살라고 강요하는 것만 같았다. 세스의 실패를 이대로 묵인하고 방관해도 되는 것일까. 영화 <블랙 팬서> 속 ‘온건파’ 티찰라와 ‘혁명파’ 킬 몽거를 연상시키는 클레어와 세스의 상반된 결말은 세상을 변화시키는 방식의 차이라기보다는 인간을 대하는 세상의 태도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들게 했다. 물론 이러한 감정은 시청자가 아닌 한 명의 사람, 자신의 삶에서조차 주인공으로 살아가지 못하는 수 많은 사람 중 한 명으로서 느끼는 것이었다.

ⓒ넷플릭스

인간은 자신에게 주어진 설정값을 벗어날 수 있을까. 인간은 주체적으로 자신의 삶을 살 수 있을까. 이런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게 늘어질 무렵, 나는 또 한 편의 드라마를 만났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밴더스 내치>였다. <블랙 미러> 시즌 5 중 한 편인 이 드라마는 시청자를 창작자의 자리로 초대하는 인터랙티브 콘텐츠로 큰 주목을 받았다. 그저 가만히 앉아 드라마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드라마에서 제시하는 선택지 중 하나를 고르는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형식실험을 시도한 것이다. 내가 보는 드라마는 내가 직접 만든다, 랄까.

작가가 독점했던 창조주로서의 절대적 권위가 시청자와 관객에게로 수직 이동한 것이다. 큰 기대를 안고 클릭하는 것도 잠시, 나는 또 절망했다. 첫 선택은 아침 식사로 어떤 브랜드의 시리얼을 먹을지 고르는 장면이었다. 짧은 제한시간 동안 열심히 고민했으나 선택의 결과는 허무할 정도로 이야기 전개에 영향을 주지 않았다. 선택지가 두 개밖에 없다는 것만으로도 슬슬 짜증이 나는데, 그것마저 별다른 변수가 되지 못하다니. 이게 무슨 인터랙티브인가! 아버지에게 화를 낼 것인가 아니면 컴퓨터에 음료수를 쏟을 것인가, 하는 선택지에서는 후자를 선택하면 이야기가 계속 제자리를 빙빙 돌아서 결국엔 아버지에게 화를 내는 걸 선택해야만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내 선택처럼 보이지만 결국엔 선택을 강요받는 셈이었다.

<밴더스 내치>의 결말이 ‘어찌어찌하여’ 아버지를 살해하는 아들의 이야기로 수렴된다는 걸 알게 되고서는 ‘선택’하기를 그만두었다. 그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진정한 ‘선택’일 것 같았다. 아버지를 죽이고 신을 죽이고 작가를 죽이고, 오이디푸스 콤플렉스 이런 것도 너무 식상하지 않나. 뭔가 또 크게 속은 것 같았다. 이게 도대체 뭔가. 사는 게 너무 시시해져 버린 느낌이었다. 원래 이렇게 재미없는 것이, 정답이 정해진 세계에서 선택의 무의미함을 깨닫는 것이 <밴더스 내치>의 작품의의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시청자 선택에 따른 알고리즘을 파악하기 위한 시뮬레이션이었기에 재미란 건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튼, 다 좋다. 그런데, 안 그래도 내 인생이 내 맘대로 안 풀려서 울화병이 생길 지경인데, 드라마를 보면서까지 이렇게 낭패감을 느껴야 하는 걸까. 마음이 지치고 힘들 때, 슬프고 괴로울 때, 내 영혼을 달래주는 따뜻한 수프가 바로 나의 ‘드라마월드’인데.

야, 누가 먹는 것 갖고 장난치래!

 

 

* 《쿨투라》 2019년 11월호(통권 65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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