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영화 100주년 위원장 이장호 감독] 바람 불어 좋은, 한국영화 백년 이야기
[한국영화 100주년 위원장 이장호 감독] 바람 불어 좋은, 한국영화 백년 이야기
  • 정성일(영화감독·평론가)
  • 승인 2019.10.0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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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어_정성일(영화감독·평론가)
사진_설재원(본지 에디터)
녹취정리_양진호(영화평론가)

현장에서 한국영화사를 통과한 영화감독 이장호의 이야기

정성일(이하 정)  오늘 이야기는 ‘한국영화의 100년’이지만 제가 감독님을 한국영화사를 연구하는 학자로 뵙는 건 아니니까 질문은 한국영화 현장에서 영화를 만들면서 한국영화사를 통과한 영화감독 이장호의 이야기를 경청하는 주관적인 영화사(映畵史)랄까 경험으로서의 영화사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감독님에 관한 글을 쓰면서 문득 깨닫게 된 한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원컨, 원치 않건 감독님의 존재 자체가 한국영화사의 하나의 분기점이라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해방둥이 세대’, 1945년에 태어난 세대. 이 세대는 첫 번째 한글세대이며, 일제 식민지 강점하의 경험으로부터 자유로운 첫 번째 세대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다시 시작하자마자 한국전쟁으로 폐허와 마주해야 했습니다. 말하자면 제로(zero) 세대라고나 할까요, 게다가 감독님의 인터뷰를 읽어보면 그 세대로는 드물게도 시네필이기도 했습니다. 감독님 자신에게 영화를 보면서 처음으로 영화를 의식한 영화는 언제였습니까? 제 질문이 다소 관념적인데 감독님에게 영화라는 원체험이라고 할까. 단지 구경거리가 아니라 영화라는 것을 의식하면서 영화를 보기 시작한 것은 언제부터였습니까?

일곱 살, 아버지 무릎에 앉아서 본  영화 <싱고아라>가 내 첫 경험

이장호(이하 이)  내가 다른 자리에서도 여러 번 얘기했는데, 아버지가 영화 검열관이었으니까, 아버지 무릎에 앉아서 제목도 기억 안 나고 내용도 기억 못 하는 화면들을 많이 봤어요. 특히 SF 영화들. 옛날에 외계인들 이상하게 보여주는 흑백 영화들. 그런 것도 보고, 그 중에서 지금도 또렷하게 제목하고 내용이 기억나는 그런 영화들이 있어요. 굉장히 몽환적인 영화였는데, 스페인 영화 같아. <싱고아라>라는 영화가 있어.(註, <Singoalla> 1948년 영화, 감독 크리스티앙 자크, 프랑스 영화) 지금도 제법 스토리까지 대충 알 수 있을 것 같은 그 영화가 내 첫 경험인 것 같아. 그때 영화의 매력적인 인상이 내 무의식 속에 남게 됐는지도 모르지. (잠시 생각) 아마 부산에서 봤지 않았을까. 피란 가서. 여서 일곱 살 시절이겠지. 그때 이후로 영화의 스토리에 빠져들기도 하면서 제법 영화가 좋아지기 시작했지.

또 기억에 남는 영화 중에 <악한 바스콤>이라는 흑백 웨스턴 영화. 그 다음에 제목이 <지미여 영원하라>였나? 그런 아동용 영화가 기억나네. 그 다음은 (휴전 이후 서울로) 환도해서 소년 시절에, 그때 아현동에 살았는데, 거기 ‘현대극장’이라고 있었는데, 거기서 <옥단춘>이라는, 지금은 돌아가신 윤인자 배우가 나온 영화였어. 그때 내가 여배우한테 “아 예쁘다”라고 처음 느끼기 시작했을 때였던 것 같고, 그런 게 아마 한국영화의 첫 경험인 것 같아. 그 당시에는 현대극장에서 마지막 변사라고 할까, 가끔 가다가 변사를 사용하는 영화도 있었어. 초등학교 6학년 마지막 졸업 전이었는데, (을지로에 있던) 국도극장’에 갔던 기억이 나네. 친구 아버지가 국도극장 직원이었던 걸로 기억해. 친구가 그때 거기를 데리고 갔어. 거기서 봤던 영화가 바로, 김기영 감독의 <황혼 열차>야. 그게 김지미 씨 데뷔작이거든. 내 어린 기억에, 김지미 씨가 꼭 코스모스 같은 느낌이 들었어. 어떻게 저렇게 청초할까. 아마 평소에 못 보던 신인 여배우가 등장해서 그랬었는지, 그렇게 여배우들을 통해서 나는 계속 영화에 빠져들었어요.

우리 아버지하고 밥을 먹다가, “오늘 영화 봤는데, 여배우한테 반했어”라고 고백한 적이 있어. <폭력시대> 라는 영화인데. 토니 커티스가 주연했고, 나는 살롱의 그, 까만 수영복 같은 거 입은 여자가 피아노 같은 데 앉아서 노래 부르는 거에 홀딱 반했어. (註, <Rawhide Years>(1956년)에 출연한 콜린 밀러) 그 얘기를 아버지한테 저녁 먹으면서 했더니, 내 별명이 그때 ‘부뚜코’였거든, “야, 이거 우리 ‘부뚜코’ 이제 여자한테 눈 뜨기 시작하는데!” 그러더라고. 밥 먹다 무심결에 한 말 때문에 내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부끄러웠는데, 아마 그때부터 내가 영화광이 되기 시작했던 것 같아. 그 이후로 봤던 영화들 중에 감동적인 것들이 많지. 굉장히 많지, 지금도 그렇지만 내가 좀 컬트적인 분위기의 영화를 좋아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그 즈음 <폭풍의 언덕>을 보고 여러 장면들이 뇌리에서 오래 남고 그랬어. 연출부 시절에 내가 사람들한테 그런 얘기를 했었다 고. 난 틀림없이 무슨 귀신 영화 같은 거 만들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도 있었지.

  흥미진진합니다. (웃음) 이번 질문은 제가 먼저 고백하겠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시절 영화를 보러 다닐 때 재개봉관, 아니면 동시 상영하는 삼봉관을 다녔는데, 어린아이가 미성년자 무사통과를 할 수 있는 건 변두리극장이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제가 보고 싶은 영화에 꼭 한국영화를 동시상영해서 늘 한국영화가 지겹다는 불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슨 생각에서인지 제가 1975년을 전환점으로, 그때가 고등학교 1학년이었는데, 세 편의 한국영화를 연달아 보게 되었습니다. <별들의 고향>과 <삼포 가는 길>, <바보들의 행진>이었습니다. 이유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 세 편의 영화를 본 다음 한국영화에 대해서 궁금하다, 라는 질문이 생겨났고, 그때부터 의식적으로 한국영화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감독님에게는 한국영화를 영화 안에서 분리해내서 아, 이 영화들을 알고 싶다, 라는 질문을 시작한 영화가 있습니까?  

안토니오니 감독의 <정사>를 보면서 영화감독에 대한 의식을 시작

  처음에는 영화를 하고 싶다, 라는 의식이 없이 이것저것 굉장히 많이 본 것 같은데, 내가 다녔던 서울 중·고등학교는 학생들한테 영화도 보여 주고 하는 그런 학교는 아닌데, 그래도 한 번 보여 준 적이 있었어요. 국제극장에 단체로 갔는데, 방사능 때문에 거대해진 개미가 나오는 SF영화였어. 그걸 보면서 상당히 흥분했던 기억이 있지. 하지만 내가 야, 영화라는 게 이런 거구나, 하고 느끼면서 봤던 게 있는데, 연출부 일을 하게 되면서부터 본 영화인데, 제일 강렬했던 영화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감독의 <정사>야. <태양은 외로워>도 인상적으로 보긴 했지만, <정사>를 보면서 영화감독이라는 게 어떤 건지 의식이 되기 시작했어.

그리고 이만희 감독 영화 <만추>를 보고, 야! 이만희 감독 천재 아닐까. 어떻게 <정사>나 <태양은 외로워>가 떠오를만한 멋진 영상을 만들 수 있었을까, 하고 신기하게 생각했었어. 지금도 생각하는 게, 어떻게 스토리와 상관없이 저렇게 화면, 화면의 느낌이, 어떤 ‘의식’을 나타낼 수 있을까, 하고 감탄했었어. 야, 이건 새로운 영화다, 라는 느낌을 가지면서 작품들을 봤던 거지. 그전까지는 영화를 스토리텔링 중심으로 보고 그랬는데, 안토니오니 영화는 화면 자체가 갖고 있는 힘이 있는, 아주 고독할 대로 고독한 느낌, 그, 펜스 쇠기둥들이 바람이 덜덜덜 흔들리는데, 감독이 어떻게 저런 감각을 포착했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 신기하게 느껴질 정도였지. 그게 아마 영화에 대해 내가 처음으로 감각적으로 의식하면서 빠져들었던 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안토니오니 영화에 그렇게 매혹을 느꼈던 건 감독님만의 어떤 특별한 경험이었던 것 같으세요, 아니면 영화에 관심 있었던 감독님 세대들이 <정사>를 만났을 때 아! 나도 그 영화가 굉장하다고 생각해, 하는 공감대가 있었나요?

  (잠시 생각) 공감대가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한국영화 100년사에서 세대 사이의 차이

  조금 다르게 질문해보고 싶습니다. 아마도 이건 한국영화 100년사에서 세대 사이의 차이를 설명할 수도 있을 것 같은 하나의 표지라고 할까요. 제가 서로 다른 자리에서, 유현목 감독님, 김기영 감독님, 김수용 감독님을 각자 인터뷰 했었을 때, 감독님들에게 젊은 시절 마음속의 모델이 되었던 걸작이 무엇이었느냐고 질문했을 때 신기하게도, 세 분이 정말 다른 취향의 감독님들이잖아요. 그런데도 모두 <자전거 도둑>을 대답하셨어요, 그 세대의 하나의 모델이라고 할까…….

  그런데 나는 <자전거 도둑>을 보고 의식화되지는 않았어. 그 영화에 대해서는 아주 자세한 장면까지 기억이 나는데, 나를 영화에 눈뜨게 하진 않았지. 펠리니 감독 영화는 <길>도 봤고 그랬는데……. 영화적으로 나에게 그렇게 와닿진 않았어.

  21세기의 한국영화에서 사라진 것 중의 하나는 도제 제도입니다. 사실 연출부는 기능적이라고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감독님 세대는 말 그대로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 가까웠는데, 감독님이 현장에 가실 때 한국영화는 거인들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유현목 감독님, 김기영 감독님, 김수용 감독님, 그 중에서 감독님은 신상옥 감독님 문하로 들어갔습니다. 물론 신상옥 감독님도 거인이죠. 그 거인들 중에서 신상옥 감독님을 특별하게 생각한 까닭이 있습니까?

  선택이라고 할 수 없는 게, 내가 뭔가를 판단할 수 있는 자리에 있었던 게 아니니까. 우리 아버지가 얘기를 나중에서야 했는데, 처음에는 유현목 감독한테 부탁을 한 모양이야. 이 얘기는 나중에 유현목 감독한테 들은 것 같아. 우리 아버지가 와서 부탁했는데, 그때 유현목 감독이 “애 대학이나 졸업시키고 데리고 와”라고 그랬다는데, 우리 아버지가 그 말을 듣고 신상옥 감독을 만나서 다시 얘기를 했어. 그런데 신상옥 감독이 흔쾌하게 수락해서 그분한테 간 거지, 근데 신상옥 감독 만난 게, 나는 굉장히 잘 된 일이라고 생각해. 그 사람은 뭐라 그럴까, 다른 사람들은 자기 스타일이나 개성을 만들려고 애쓰는데 신상옥 감독은 폭넓은 시도를 했었어. 그런 것이 나는 인위적으로 고집스러운 것보다 훨씬 좋다고 생각해. 열려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 그러니까 그 사람은, 오는 사람 막지 않고 가는 사람 붙잡지 않는, 그런 기질이 있는 것처럼, 항상 유연해. 무슨 작품이 들어오는데 자기가 꼭 이거 해야겠다, 라고 생각하지 않고, 그냥 그때그때 자기 사정에 맞게 하는 거 같았어.

신상옥 감독님 밑에 있으면서 내가, 영화감독이 되고 나서 느낀 거는 ‘집념’을 갖기 시작하면 위험하구나 하는 거야. 거대한 작품에 대한 집착. 신상옥 감독님이 늘 ‘징기스칸 징기스칸’ 그랬거든, 나는 그 사람이 징기스칸에 대한 집념을 가지는 건 좀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었거든. 감독들이 그러는 경우가 종종 있어. 좀 비현실적인 의지라든지 욕망을 가지는데, 그건 비극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더라고.

  저는 신상옥 감독님 영화를 보면서, 심지어 실패작조차도 명장면을 찍는 감독이라는 생각을 늘 합니다. 어떤 순간에, 거의 다른 감독들이 흉내 낼 수 없을 정도의 이상할 정도로 아름다운 장면을, 한 쇼트건 한 씬이건 보여준다는 점에서 신상옥 감독님은 한국영화에서 하나의 경지에 도달했다고 느꼈습니다. 연출부로 들어가기 전에 물론 당연히 신상옥 감독님의 영화를 이미 보셨을 터인데, 신상옥 감독님의 작품을 보면서 어떤 느낌을 가지셨나요?

  신상옥 감독님은, 내 편견일지 모르지만, 자연스러운 감독이었어. 모든 장면이 그랬었지. 유현목 감독만 해도, 뭔가 자기를 가두는 게 있거든. 나는 유현목 감독 영화 한다고 하면 개봉 날 가서 보고 그랬는데, <순교자> 이런 거 보면 테마가 진지하니까 화제가 되기 쉬웠지. 그 시대에는. 그래서 유현목 감독님 영화 하면 안 볼 수가 없어. 개봉관에 가서 보게 되더라고. 보고 그러면 항상 자기가 설정해 놓은 어떤 틀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같았어요. 고집스러운 게 있거든. 김기영 감독은 말할 것도 없고. 그건 자기 성격이니까 그러시는 거고. 그런데 신상옥 감독님 영화는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벙어리 삼룡이>, 다 보면, 아주 자유롭고, <어느 여대생의 고백>, <로맨스 빠빠>, 같은 것들 보면 굉장히 자유로워. 무술로 얘기하면 태권도, 유도 뭐 여러 가지 무술들을 그냥 자유자재, 뭐 필요할 땐 이것도 쓰고 저것도 쓰는 그런 달인의 경지 같은 게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좀전에 유현목 감독님 말씀을 해주셨는데, 마찬가지로 감독님 세대는 뭐…… 이 세대가 너무 떨어지면서 너무 지나치게 객관적으로 본다는 게 있는데, 감독님 세대는 그냥 바로 위의 세대들의 영화를 이렇게 쭉~ 그것도 긴 시간 새로운 영화가 나올 때마다 지켜본 세대니까, 유현목 감독님 영화를 볼 때에는 어떤 느낌이셨어요?

  다시 반복하자면 그 시대에는 유현목 감독님 영화가 워낙 화제가 되니까 안 볼 수가 없었어. <순교자>를 개봉관에 가서 봤지.

 

김수용 감독님이라는 이름은 어떤 의미

  한국영화사에 대해서는 아직도 정전이라고 할 만한 영화사가 여전히 진행 중인 상태인데. 그 과정에서 편견을 가졌다가 영화를 보면서 수정하게 되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중의 한 사람이 김수용 감독님이었습니다. 이상할 정도로 김수용 감독임에 대해서는 다작(多作)이라는 이유로 영화사 안에서 폄훼된 감이 있습니다. 물론 많은 편수를 찍으셨죠. 그리고 실제로 실패작은 김수용 감독님의 흔적조차 찾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훌륭한 영화들, <만선>이나 <갯마을>, <안개>는 이정표 될 수 있는 걸작이었습니다. 거인들의 다음 세대였던 감독님에게 김수용 감독님이라는 이름은 어떤 의미였나요?

  나는 김기영 감독님 작가론을 책으로 만들 생각을 했었거든. (註, 이장호 감독은 제작사 판 영화사 시절에 영화총서를 출판했다. 그 첫 번째 책이 <한국영화연구 1; 임권택>이다. 하지만 영화사의 사정으로 이 총서는 그 한 권으로 끝났다) 그때 김기영 감독하고, 김수용 감독님하고 같이 다뤄볼까 하는 생각을 했어. ‘과작’과 ‘다작’으로. 그렇게 두 감독을 비교할 생각을 했었는데, 김수용 감독님은 진짜 다작이 문제야. 그러면서 세상이라든지 자기 인생에 대해서 진지하고 심오하게 생각하지 않고, 좀 쉽게 살아가는 쪽으로 바라보는, 그런 게 있었어요. 그래서 작품을 선택할 때에도 제작자가 돈만 문제를 만들지 않으면 웬만하면 다 수락했던 것 같아요.

반면에 신상옥 감독이나 김기영 감독이나 유현목 감독은 목표를 확실히 갖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 분들은 자기 이름. 이름이라는 걸  중요하게 생각한 거지. 그런데 김수용 감독은 그 시대에, 현실에 적응을 빨리빨리 했던 분이야. 그게 그 시대에는 제일 안전한 방법이기도 했고. 그때는 모든 게 불안하고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었으니까. 그래서 제작도 안 하고, 작품만 부지런히 찍어 나간 거고, 그 분은 영화감독을 직업으로 받아들이신 거지.

개성 강한 김기영 감독의 <하녀>는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과는 대조적

  한국영화 100년사의 화두 증의 하나는 <오발탄>과 <하녀>입니다. 오랜 시간 동안 한국영화 비평 담론은 <오발탄>을 (볼 수 없는 나운규 감독님의 <아리랑>과 이만희 감독님의 <만추>를 제외하고) 한국영화의 최고 걸작의 자리에 올려놓았습니다. 그런데 1990년대부터 김기영 감독님의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하녀>가 거기에 버금가는 한국영화의 대표작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러면서 21세기 한국영화비평 담론의 한국영화 100년사의 무게 추는 두 영화 사이에서 나뉘게 되었습니다. 저는 끊임없는 재평가 작업을 긍정적으로 바라봅니다. 감독님은 두 영화를 개봉했을 때 본 세대이고, 그런 다음 두 영화의 재평가의 과정을 바라본 영화감독이기도 합니다. 두 영화를 바라보는 심정이랄까, 그 견해가 궁금합니다.

  <하녀>에 관해서는, (잠시 생각) 내가 아직 아무것도 몰랐을 때, 대한민국에서 이 이상 따라 갈 예술 작품은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개성이 강하다고 느꼈었어. 그건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이만희 감독 류는 아니었어. 그 사람이 가지고 있는 작품 세계의 독특함과 감각의 독특함에 대해 내가 압도당한 거였으니까. 그러니까, 감히 흉내를 낼 수 없다, 라고 생각한 게 <하녀>였어요. 그런데 내가 <오발탄>을 못 봤어. 기회가 잘 닿지 않아서 그랬을 거야. 그래서 늘 <오발탄>에 관한 얘기들이 나올 때마다, 나는 그 영화가 리얼리즘으로 확실한 영화구나 하는 생각만 갖고 있었지. 내가 가장 대표적인 한국 리얼리즘 영화로 얘기하는 게 강대진 감독의 <박서방>, 그리고 <마부> 정도였어. 그러다가 얼마 전에 <오발탄>을 봤다고.

  긴 시간 동안 일부러 안 보신 건가요? 볼 기회가 많으셨을 텐데…….

  많기는 했지만 (잠시 생각). 내가 그만큼 신상옥 편이어서 그랬던 거지. (웃음) 유현목 감독님이 돌아가셨으니까 마음 놓고 얘기하는데, 감독님이 알면 굉장히 섭섭한 얘기지. <오발탄>을 이번에 보면서 느낀 건, 그 시대 사람들한테 충격을 주었겠구나, 라는 거지. 근데 <하녀>를 이번에 새로 다시 보면서 느낀 건, 그때는 못 느낀 걸 발견했지. 뭐냐면, 한국영화에서 리얼리즘 실종이 된 게 한 20년 동안 이루어진 일이거든. 근데 <하녀>에서 이미 리얼리즘이 사라지고 있더라고. 그러니까, <하녀>에는 김기영 감독님의 뚜렷한 작품 세계는 살았지만, 내가 <하녀>를 보고 와, 이런 실수가 있나, 라고 생각한 게, 그 시대에 공장 직공이라는 게 정말 비참한 세대야. 가정부 식모로 와서 일하는 그런 시대인데, 그런데 여자 직공(엄앵란)이 음악 선생(김진규) 집에서 피아노 레슨을 받아. 그것도 돈을 주고. 나는 그건 도저히 납득이 안 되고 용납이 안 돼. 현실을 못 그리고 있어. 근데 그걸 보니까. 아, 김기영 감독의 작품 세계는 한국이 아니고 일본 영화 쪽과 견주어보는 게 좋을 것 같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

한국영화에서 리얼리즘을 이렇게 사라지게 한 게, 누차 얘기한 거지만, 군사정권이 들어와서 남한이 가난하게 사는 모습이 북한에 가면 선전 재료가 되니까, 검열을 했잖아요. 그렇게 20년 동안 길들여져서 리얼리즘이 사라져 버렸는데, 김기영 감독님 영화 <하녀>는 5.16 쿠데타 이전이잖아요. 그런데도 어떻게 리얼리즘에 대해서 전혀 반성이 없었을까, 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깜짝 놀랐어요. 아마도 그건, 김기영 감독 영화를 보면서 그 사람의 작품 세계의 독특함 때문에 그런 결점들이 안 느껴지는 거야. 그리고 지금 얘기한 것처럼, 김기영 감독님은 일본 영화 수준으로 (현실을 무시하고) 그냥 영화를 영화로만 받아들인 거야. 게다가 관객들은 영화를 보러 극장에 오면서 이미 현실에서 떠나 있었고, 너무 가난했던 그런 시절에 영화에서 리얼리즘을 보고 싶지 않았던 거지. 그런 점에서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 하고는 너무 대조적이지. 

21살에 본 이만희 감독님의 <만추>는 충격적

  1960년대 한국영화를 이야기하면서 여기서는 증언을 해주셔야 하는 대목입니다. 저와 제 동료들은 이만희 감독님의 <만추>를 못 봤습니다. 감독님은 <만추>를 젊은 날의 예민함이 살아 있었던 나이에 보았습니다. (註, 이장호 감독은 <만추>를 21살에 보았다) <만추>는 어떤 영화였습니까?

  충격적인 영화라고 봐야지.

  그 ‘충격의 정체’가 어떤 것이었나요?

  한국에 이런 영상 천재가 있나, 라는 생각. 안토니오니가 갖고 있는 걸 어떻게 저렇게 한국에서 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 (잠시 생각)  게다가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는 스토리텔링이 없잖아. 그런데 이건 또 스토리텔링이 있어. 영화 안에 사연이 많아.

  감독님이 안토니오니 영화를 좋아하시잖아요. 그리고 이만희 감독님도 당연히 안토니오니 영화를 보았겠죠. 그런데 카피라는 생각은 안 드셨나요?

  글쎄, (잠시 생각) 카피라는 게 쉬운 게 아니거든. 이만희 감독은 천재임에 틀림없어. 모든 영화들이, 이만희 감독의 특별한 감각이 있다고. 감각이 있는데, 그런데 이만희 감독의 영화를 쭉 보면, 제일 결함이 뭐냐면, 그 사람이 갖고 있는 결함이, 한국적인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 <만추>도 마지막에는 신파 같은 게 있다고. 라스트가 꼭 신파야. 꼭 그 라스트의 신파를 너무 길게 끌고 가는 거. 그래서 아, 이게 참 안타깝다, 하는 생각이 드는데, 오히려 <삼포 가는 길>에서는 이만희 감독의 특색이 안 나타났어요. 그때 이미 내리막길이라 그런지, 자기 감각을 자신만만하게 살리지 못했어.

그런데 <만추>는 정말 영상미가 대단했어. 그 당시 한국영화는 그런 적이 없었는데, 어떤 시추에이션에서는 정적 속에서 다음 쇼트, 다음 쇼트, 이 정적이 계속 됐는데, 그게 이 사람의 의식을 나타내는, 말하자면 그 영상들이 드라마와 상관없이 우리한테 전달을 해 줘. 감동을. 나는 그런 영향을 받아서인지, <별들의 고향>에서도 플래시백으로 과거로 갈 때, 신성일이가 담배를 던졌는데, 떨어지는 건 볼펜이 떨어지고, 또 스틸처럼 멈춰 가면서 쇼트를 진행하고, 내 영화의 그런 씬들이 아마도 이만희 감독한테서 영향을 받아서 발전시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1974년 세대들의 영화에 대한 태도 <별들의 고향>은 동시대 감각으로 호소

  이제, 감독님의 시간에 도착했습니다. 저는 먼저 1974년 세대들의 영화에 대한 태도에 대해서 질문 드리고 싶습니다. 감독님 세대는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나쁜 시기에 첫 영화를 찍기 시작했습니다. 박정희 정부는 유신헌법을 선포한 다음 긴급 조치까지 발동하면서 영화에 이중검열이라는 최악의 정치적 탄압을 했지요. 한국영화의 거인들은 눈에 보이게 영화가 나빠졌고, 제작사들은 열악한 환경에 더해 정치적으로도 굴복을 했지요. 그때는 필름으로 찍고 극장 개봉 이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에 대부분 국책영화인 반공영화와 새마을 영화, 그리고 스크린 쿼터를 위한 문예영화를 찍거나 아니면 세 종류의 장르 영화, 다찌마와리 액션영화, 호스티스 영화, 하이틴 청춘영화를 찍었습니다. 오직 감독님 세대만이 굴복하지 않고, 마치 각자의 전투를 벌이듯이, 저항의 영화를 찍었습니다. 그때는 신기했고, 지금은 이상해보입니다. 너무 무서운 대통령 치하에서 어떻게 이 세대는 그렇게 굴복하지 않고 하여튼 자기의 영화를 찍을 수 있었을까, 이 세대의 영화에 대한 믿음은 무엇이었을까.

  그건, 그때 공포감보다 (잠시 생각) 그 당시 젊은이들의 문화가 다를 수밖에 없었다는 게 중요한 거 같아요. 우리는 미국식 민주주의 교육의 첫 세대잖아. 해방둥이가 초등학교 들어갔는데, 그때 교육제도가 완전히 바뀐 거잖아. 그리고 미국식 문화가 막 들어오기 시작했고, 거기에 물들기 시작하면서 성장한 거거든. 우리 위의 선배들은 일본 노래를 즐기고, 또 바로 그 아래에서는 빨리 영어를 배운 사람들은 팝송을 그렇게 즐기고, 그러면서 한국 노래로 팝이나 발라드를 만들 수 없는 그런 세대였거든. 근데 나 이후의 세대들은, 말하자면 송창식이나 이런 세대는, 한글로 노래를 만드는 거야. 그러면서 이 문화가 서로 아주 달라진 거지. 나보다 나이 많은 여자 관객들은 <미워도 다시 한 번> 같은 영화를 좋아했는데. ‘고무신 관객’이란 말 생각나요? 한국영화 관객을 ‘고무신 관객’이라고 했거든. 왜냐? 그 당시에는 여자들이 한복을 다들 대중적으로 입었으니까. 고무신 신고 극장에 오는 게 여자들밖에 없거든. 여기에서 서로 섞이질 못해. 서로의 문화가.

아무리 신상옥 감독님이 만들어도, 편집 할 때 옆에서 보면, 뭔지 나하고는 거리감이 생기는 게 있잖아. 그렇게 혼자서 외로움 느끼다가 최인호가 쓴 소설을 보면, 사실 나중에 생각해보니 김승옥, 최인호, 그게 다 번역 문체야. 나는 뭐,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이런 명작들을 번역으로 읽었던 세대니까, 최인호 소설을 보면 기분이 그렇게 고향에 돌아온 것처럼 좋아. 그러다가 나는, 나중에서야 토속적인 전라도 사투리 쓰는 소설들을 읽기 시작했거든. 처음엔 최인호, 김승옥만 읽고 살았으니까. 그런 감각으로 <별들의 고향> 영화를 만들게 되니까, 내가 갖고 있는 동시대 감각들이 저절로 나타난 거지. 그게 우리 세대 영화의 특징이었고, 게다가 <별들의 고향>이 나온 다음에, 문학 작품에서 영화를 찾는 게 훨씬 더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왜냐하면 우리 시대에는 오리지널 시나리오라는 건 정말 믿을 수 없고, 볼품 없고, <별들의 고향>도 이희우라는 작가가 처음에 각색한 건 형편없었어. 만약에, 다른 감독이 이희우라는 사람의 시나리오로 영화를 만들었다면, <미워도 다시 한 번>처럼 되어 버렸을 거야. 다행히 동시대 감각으로 호소를 하니까 이게 먹힌 거지, 김호선 감독의 <영자의 전성시대>도 김승옥씨가 시나리오를 썼거든. 그런 것이 서로에게 연장이 되고, 또 하길종 감독은 김승옥 씨랑 서울대학교를 같이 다녔고, 그러면서 최인호의 <바보들의 행진>을 연출하게 되니까, 서로 영향을 준 거지.

그때 우리에게 진짜 사건은 홍파가 오리지널 시나리오로,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된 <몸 전체로 사랑을>을 영화로 만드는데, 우리는 그 시나리오에 반했어요. 아, 이 친구 보통이 아니구나. 그렇게 우리 세대가 영화로 성공하고 난 다음 ‘영상시대’를 한 거지요. (註, ‘영상시대’는 계간으로 영화잡지를 두 권 발행하였다) 그때 리더는 하길종 감독이었어요. 그때 논리적으로 유신정권에 대해서 반대를 했던 사람이고, 실제로 사사건건 투지가 있었어. 그러면서 젊은 흥행 감독들 모아놓고 영화 예술가 운동을 하자. 하면서 자신은 영화평론도 쓰면서 자기 의지를 나타냈는데, 우리도 같이 동조를 하긴 했지만, 하길종 감독이 갖고 있는 앞선 문제의식을 갖지는 않았어요, 그리고 하길종 감독도 비평 쓸 때와 실제 행위는 처음과는 달라졌어요. 나중에는 <병태와 영자> 같은 것도 찍고 그랬잖아요. 그때 하길종을 긴장하게 했던 투지가, 나나 김호선, 홍파에게 있었으면 ‘영상시대’가 제대로 돌아갔을 거야. 한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근데 하길종 혼자서 하니까 견제도 없고, 무슨 라이벌도 있고 그래야지 서로 긴장하고 그러잖아. ‘영상시대’는 시대에 맞게 등장했지만 끈기가 없었던 거지요.

같은 세대의 하길종 감독님 이야기

  ‘영상시대’ 잡지는 두 권 모두 사서 읽었습 니다. 그때 선언문을 읽는데. 처음에는 이상했고, 나중에는 궁금해진 것은 그 선언문 중에 “아버지 영화는 죽어야 한다”라는 주장이었습니다. 의아한 건, 감독님 세대가 독립영화가 아니라 도제제도 세대이고, 또 감독님 세대의 아버지 영화들, 유현목 감독님이나. 김기영 감독님, 신상옥 감독, 이만희 감독 영화들이 그렇게 나쁜 영화들도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죽여야 할 만큼 정치적으로 타락했다고 말하기도 곤란한, 충분히 이해할만한 상황이 있었습니다. 단지 제로에서 시작한다, 라는 주장을 훨씬 넘어서버렸다고 할까요, 그렇다면 이 증오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 라는 질문이 생겼습니다.

  하길종이 그런 주장을 했군. (잠시 생각) 그게 부끄러운 것 중 하나인데, 세계영화 100주년을 맞으면서 다큐멘터리들이 나왔는데, 그 중에 중국영화 편을 보았어요. 그때 감탄한 게, 미국 영향을 하나도 안 받은 중국 제5세대는 영화를 배울 때 다 선배들의 영화로 배웠거든. 거기에 중국의 긍지도 있고, 선배들에 대한 존경심도 있고 그랬거든. 그런데 한국은 개척적인 마인드가 어디에 있었냐면, 외국영화 잘된 것 보고, 그리고 선배들 영화와 비교하면서 선배들에 대해서 경멸했다고. 그러니까, 그런 것 때문에 지금 그런 얘기가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만약에 우리가 외국영화와 비교하지 않고 한국영화만 공부했으면 탄탄하게 뿌리를 내리면서 시대가 주는 현실감과 합쳐서 새로운 영화가 나오고, 뿌리는 또 계속 거기서 자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감독님과 같은 세대의 하길종 감독님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습니다. 단지 일곱 편의 영화를 만들고 난 다음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는데 (註, 하길종 감독은 1941년생이며, 1979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러면서 다소 신화화된 느낌이 있습니다. 하지만 영화만 놓고 이야기하면 아직 자신의 영화 세계를 이루기도 전에 떠나버린 것 같은 아쉬움이 있습니다. 감독님 세대에게 하길종이란 이름은 어떤 의미였습니까? 

  나는 그 사람이 굉장히 힘들었을 것으로 생각해요. 미국에서 영화를 공부하고, 거기서 배운 거, 거기서 영화를 보면서 자기가 이상적으로 생각 했던 목표, 그런데 귀국해서 충무로에 오니까 현실이 너무 비참한 거지. 여기서 영화를 시작한 우리는 오히려 정치에 순응하면서 충무로에 왔으니까 어떤 압력이라든지 비관적인 생각을 못 느꼈는데, 하길종은 유독 그게 너무 커진 거야. 나는 이 정권 때문에 영화를 마음대로 만들 수 없어 라는 벽을 스스로 쌓아 놓은 거 아닌가, 라는 느낌이 늘 있었어요. 그래서 모든 표현이, 불편한 표현만 나와. 자유롭지가 않아. 상상력이 편안하지가 않아. 그런 것 때문에 영화가, 선언은 가끔 가다가 나타나는데, 뭔가 유연하지 못하지 않았을까 해요. <화분>도 그렇고, <한네의 승천>도 보니까 의식은 굉장히 앞서 있는 걸 알겠는데, 영화는 신상옥 감독처럼 유연하게 흘러 가지가 않는 거지. (잠시 생각)

하길종은 이 시대 영화판의 무지몽매한 것에 대해서 경멸했고, 그러면서 자기는 상당히 외로운 기질을 갖고 있었어요. 늘 얘기하면 버릇처럼 하는 게, 항상 술 마시다가 우리한테 “피고~” 그랬다고. 그리고 술 먹으면 그런 게 과장되어서 나타나고, 주변 영화인들을 좀 경멸하고 그러니까 주먹다짐이 오고가고, 얻어맞고 그랬지. 그건 잘 알려진 이야기잖아요. (웃음)

 

1980년대에 가장 중요한 세 감독, 배창호, 장선우, 박광수 감독

  1980년대에 가장 중요한 감독 세 사람, 배창호, 장선우, 박광수. 이 세 명이 모두 감독님 밑에서 연출 수업을 받았고, 그런 다음 서로 다 각자의 길을 갔습니다. 이제까지는 감독님의 이전 세대를 바라보았다면, 지금부터는 다음 세대를 바라보는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그건 <바람 불어 좋은 날>이 불을 질러서 이 친구들이 나를 찾아왔단 말이에요. <별들의 고향>, <영자의 전성시대>, <바보들의 행진>이 절정이었다면 그런 다음 금방 내리막길을 가고 있었어요. 그때 나는 대마초에 걸려서 활동을 못하고 있었고, 그러면서 내 영화를 돌아보게 되었어요,  그때 <별들의 고향>이 부끄러워졌어요. 정말 부끄러운 게, 리얼리즘이 거기엔 전혀 없어. 그러니까, 김기영 같은 실수를 나도 했는데, 당연히 몰랐어. 느끼지 못한 거지. 나는, 그때 놀고 있으니까 자꾸 가난해지고 있는데, 그러면서 다른 감독들 시사회에 자꾸 가서 보고 그러면서, 아, 한국영화가 자꾸 현실을 따로 그리고 있구나, 라는 걸 본 거예요. 한국영화 속의 현실, 영화의 현실은 한국 현실과 서로 따로 있는 거야. 그때 내가 느낀 게, 다시 활동해서 영화를 만들 수 있으면 진짜 리얼리즘 해볼게. 그랬다고. 그때까지 최인호, 김승옥의 팬이었다면, 대마초로 4년 동안 쉬면서, 이문구씨 소설, 최일남씨 소설, 전라도 토박이 소설들을 읽기 시작한 거야. 그 때 또 뭘 읽었냐면, 염무웅 비평가의 ‘민족문학론’에 관해 읽었어요. 그때까지는 한국이라는 현실을 생각 안 했었거든. 이렇게 모르고 살면서 맨날 불문학의 실존주의, 독일의 성장문학 이런 것만 우수하다고 생각했지, 대한민국을 너무 몰랐다는 생각이 든 거예요, 그래서 <우리들의 넝쿨>이라는 중편을 <바람 불어 좋은 날>이라는 제목을 붙여서 준비를 시작한 거지.

영화를 만들고 나니까 장선우 같은 놈은 어느 날, 고등학교 후배인데 “감독님하고 영화 좀 같이 하게 해 주십시오” 하고 왔고, 배창호는 그 전에 왔었고, 그 다음에 박광수는 서울대 얄라셩 팀이었는데 찾아왔고, 그때 나는 그렇게 새로운 변화에 참여하는 이 친구들이 앞으로 미래의 변화라는 느낌을 받았거든. 배창호도 한 3년 밑에 있다가 감독 되고, 장선우도 한 2~3년 있다가 그냥 나갔고, 박광수도 그렇고. 그렇게 빨랑빨랑 배출할 필요가 있었고, 내가 데뷔했을 때 신상옥 감독님이 이형표 감독하고 하라고 그랬을 때, 내가 도망쳐 나왔잖아. 책상 딱 정리하고. 그래서 난, 내가 말하기 좋아하니까, 야, 성공하려면 인마, 배신해야 돼. 그래서 빨리빨리 나가라고. 그런 식으로 하니까 다행히 장선우가 <우묵배미의 사랑>, 배창호가 <꼬방 동네 사람들>, 박광수가 <칠수와 만수>, 그렇게 이제 리얼리즘 영화들이 막 나오는 거야. 변화가 느껴지고, 그러다가 그 변화가 결국은 여균동의 <세상 밖으로>에서 리얼리즘의 극치를 이뤄가지고, 막 욕설을 하니까, 미국 놈들 영화들 보면 ‘fucking’이 나오듯이 ‘시팔’이 나오기 시작하더라고. (웃음)

<왕십리>에서 임권택 감독님의 변화를 느끼다

  감독님과 한국영화의 거인들 사이에 머물렀던 이름에 대해서도 들어보고 싶습니다. 임권택 감독님은 오랫동안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긴 시간 동안 많은 영화를 찍은 장인이었다고 할까요. 그러다가 <만다라>로 갑자기 비평의 주목을 모으기 시작하면서 작가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감독님은 충무로에 일찍 도착했고 그 이전부터 마주치셨을 텐데요.

  내가 처음에는 임권택 감독님 존재를 상당히 무시했었는데, <왕십리>에서 임 감독의 변화를 느끼기 시작했거든요. 개인적으로는 가까이 지낸 적이 없어요. 내 생각에 그때 하여간 임권택 감독님이 뭔가, 어떤 자기 영화 세계에서 변화를 갖고 싶어 했던 게 있었을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 지극히 개인적으로. <내일 또 내일>을 봤을 때 나는 임권택 감독님을 내 마음에서 완전히 버렸었거든. 그리고 주변에서 칭찬을 많이 하는 <짝코>를 보고서도 리얼리즘이라기보다는 상투적인 그런 것을 느꼈어요. 하지만 <왕십리>를 굉장히 좋게 봤어. 그래도 결정적인 영화는 <만다라>부터였지. 갑자기 이 사람이 완전히 독보적인 지존처럼 달라지더라고. 그래서 그 영화를 촬영한 정일성 씨하고 좀 맞는구나, 라는 생각을 했지. 정일성이라는 사람은 나하고 일을 한번 해봤지만, 나는 이틀 촬영하고는 불편해서 못 했거든요. 그 분은 그런 다음에 자기의 세계를 만들어가기 시작한 거지.

 

영화의 원칙은 리얼리즘이다, 라는 생각

  계속해서 ‘리얼리즘’이라는 말을 쓰셨는데, 감독님이 생각하는 그 ‘리얼리즘’이라는 건, 감독님이 리얼리즘이라는 가치에 대해서 “나는 이게 중요한 나의 미학적 가치다”라고 생각하시는 건지, 아니면 한국영화의 전통은 리얼리즘이라는 생각을 갖고 계신 건지, 아니면 영화라는 매체 자체는 결국 리얼리즘이구나 라는 건지…….

  그래 그 얘기야. 나는. 세계적으로 모든 영화가 근본적으로는 리얼리즘이라고 생각해. 영화를 만들다 보니까 알게 된 거지. 사극에도 리얼리즘이 존재한다, 라는 생각이 들고, 한때는 이런 적도 있었어. 포르노를 만들어도 굉장히 사실적으로 해야겠다, 라는 생각. 그러니까 영화의 원칙은 리얼리즘이다, 라는 생각을 갖고 있지. (잠시 생각) 대마초 때부터 남의 영화를 보러 다니면서 그런 생각이 시작된 것이, 그리고 <바람 불어 좋은 날>을 만든 다음에, <어둠의 자식들>, 그리고 <과부춤>, 이렇게 만들면서, 그게 확실하게 고집이 된 거지.

  그런데 <바람 불어 좋은 날>을 만들고 난 다음 <바보 선언>을 만들었습니다. 리얼리즘에서 더 바깥으로 나아갔다기보다 거의 영화를 때려 부수는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바람 불어 좋은 날>을 본 다음 여기서 그 세계를 더 확장시키고 더 완성도를 끌어올리려고 할 줄 알았는데 마치 그걸 부정하는 것만 같았다고 할까요. 보는 쪽은 흥미진진했지 만 그렇게 되면 연출자는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서는 것이 아닌가요?

 

망치려고 찍은 <바보선언>

  그때 영화 정책이 정말 나빴고, 한국영화 제작자들이 그냥 의무적으로 만들었어요. 정부가 법령으로 강제로 1년에 4편을 만들게 했어요. <어둠의 자식들> 속편을 계약하고, 시나리오를 만들었는데, 그때는 사전검열이었으니까, 계속 반려당하는 거야. 더 불쾌한 건 <어둠의 자식들>이 해외 반출 불가로 검열이 나왔어요. <바람 불어 좋은 날>도 해외 반출 불가였고, 그러면서 제목도 <어둠의 자식들> 속편은 못 쓴다는 거야. 그리고 황석영이나 이동철 작가 이름도 거론시키지 마라. 분기별로 영화를 제작했는데, 그렇게 한 달을 반려당하고 나면서 제작시기에 몰린 거지. 제작자는 계속 나를 못살게 구는거야. 이거 못 채우면 금년도 외화수입 쿼터를 못 받으니까. 그러면서 내가 회의에 빠진 거야. 내가 영화를 관둘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그런데 내가 손 털고, 나 못하겠습니다, 라고 하면 제작자는 계약을 했기 때문에 틀림없이 뭔가 액션을 취할 거라고. 그래서 그때 생각한 게. 아. 망치자! 영화를. 스스로 망치면 제작자가 할 말도 없고, 나는 저절로 떠나야 되고, 그런 생각에서, 어떻게 망치느냐가 중요해진 거지.

일단 사전검열 허가를 받아야 하니까, 아주, 교과서적인 모범 답안으로 시나리오를 만들었어. 하나도 문제가 될 게 없게 하고. 그런데 <어둠의 자식들> 속편을 못 쓴다고 하니까 제목을 여러 개 만들어서 문공부 사람들에게 고르게 하라고 그럽시다. 그러니까 (제작사 대표인 화천공사) 박종찬 사장도 허락했지. 그때 화천공사가 <바보들의 행진>을 만들었으니까, <바보선언>이라는 제목을 만들고, 나는 여러 가지 제목 중에 이걸로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게 <온갖 잡새가 날아든다> 였지. 당시 대학가에 숨어든 수사 요원들 보고 ‘짭새’ 라고 했잖아. 그런데 문공부에서 ‘바보선언’이 제일 좋다 이거야. 부드럽고. (웃음) 허가가 나왔으니까 이제 영화를 찍는 건데, 그때 김명곤은 <어둠의 자식들> 2부에, 태봉이라고 기둥서방 이야기잖아. 그 역할로 뽑아놓고. 그래서 다리 저는 연습을 시키고, 이보희는 뭣도 모르고 여주인공이 됐고. 제작사는 매일 촬영 나가라고 하고, 정말 방법이 없을 때야.

그래서 내가 원칙을 하나 세웠어. 망가뜨리는 것도 뭐가 있어야지 망가뜨리겠구나, 그래서 내가 여태까지 영화 만든 것의 무조건 반대. 그 제일 반대가 뭐냐면, 찰리 채플린처럼 저속으로 찍었다가 고속으로 찍었다가, 정상 액션을 안 보여주면 된다. 그리고 시나리오가 없으니까, 현장에 나가서 다큐멘터리처럼 만들어보자, 가 된 거지. 다큐멘터리는 리얼리즘이잖아. 첫날 촬영기사가, “이 감독, 뭘 찍으려고 그러우” 그래서 “솔직히 저도 모르겠습니 다” 그랬지. 조감독들도 “뭘 준비할까요”라고 그래서 “나도 몰라” 이게 답변이야. 다들 내가 포기하려는 건 알겠는데, 그래도 뭐 대책이 있어야 할 것 아니냐, 그렇게 생각한 거지. 그래서 내가 콤마 촬영 (time laps shooting), 한 프레임을 30초마다 한 번씩 찍는 방법으로 시작한 거야.

처음 장면을 어떤 옥상에 가서, 이대 정문 앞 풍경을 30초마다 한 프레임씩 돌리니까 오전 스케줄이 싹 지나가더라고. 제작부가 회사에 얘기해서 촬영하고 있다고 알리고, 촬영하는 동안 김명곤하고 이보희는 버스에서 기다리는데, 김명곤이 답답하니까 길에 나와서 절름발이 연습을 하더라고. 이대 앞을 그렇게 막 돌아다니다가, 지나다니는 사람들 찍으려고 돌아다니면서, 여대생들이 육교에서 내려오는 걸 보다가 아이디어가 생긴 거야. 이놈이 룸펜이니까, 거울을 놓고 여자 치마 속 보는 걸 찍어야겠다. 그렇게 해서 배우를 쓰기 시작했어. 이보희가 다리가 예쁘거든. 어떤 예쁜 다리가 쭉 하나 걸어오니까 이보희가 나타나고, 김명곤이 눈이 번쩍 뜨이면서 이보희 뒤를 따라 다니는 거.

그걸로 첫날부터 둘째 날, 셋째 날까지 찍을 거리가 생긴 거야. 그렇게 일주일 동안 찍으면서 납치하는 것까지 다 찍었어. 정말, 다시 보니까 배짱으로 찍었더라고. 그걸 보더니 김희수 편집 기사가 나 좀 보자고 그러더라고. 자기가 순서 편집을 해 놓았어. “이 감독, 이번 영화는 한국영화에서 못 보던 영화 같아. 독특한 영화 같아” 그래서 봤더니, 내가 생각하던 거하고 달라. 망치려고 했는데. 진짜 무슨, 실험영화 찍어 놓은 것 같기도 하고, 그 때부터 그래, 이런 방법으로 영화 한 번 찍어봐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래도 이야기를 진행하기 위해서 핑계는 하나 만들어야 될 것 같아서. 

* 《쿨투라》 2019년 10월호(통권 64호) *

 이 영화는 감독이 죽은 다음에 만든 영화다. 그걸 암시를 해야겠다. 그래서 다음 촬영 때 영화감독이 자살하는 장면을 찍었어요. 거기서 뭐가 떨어지냐면, 뻔한 상징이지만, 신문이 떨어지는 걸로 표현했는데, 이 시대는 언론도 죽었다. 이런 걸 표현한 거지. 그렇게 다 찍고 나서, 음악 없이 일단 프린트를 만들 었어요. 처음에는 음악이 없다가 마지막에 김명곤 이 판소리로 ‘아리랑’을 불렀어요. 녹음실에서 영화를 보니까, 그나마 구제가 좀 되었는데, 대사도 없는데 음악도 없으니까 문제다, 라는 결론이 나서 박 사장한테 다시 한 번 녹음하게 해 달라, 그렇게 해서 녹음실에서 효과음을 넣고. 그 당시는 게임이 유행일 때라, 게임에 나온 음향으로 전체 효과를 냈어요.

다 하고 나서 시사회를 하는데, 제작자가 흥행사들하고 모두 내 뒤에 앉았어. 스탭들은 앞에 앉잖아. 영화가 시작되었는데, 한 15분 지나는데 대사가 없이 계속 영화가 진행되니까, 뒤에서 궁시렁 궁시렁 거리더라고. 무슨 이게 대사가 없냐. 그러더니, 조금 있다가 문 여는 소리가 나. 근데 문 여는 소리가 계속 나는 거야. 그래도 욕을 안 하고 나가는 게 다행이지. 그렇게 다 끝나고 쑥 들어와서 보니까 흥행사들은 다 나갔어. 돈 주고 미리 사는 놈들. (註. 당시에는 그런 관행을 입도선매(立稻先賣) 라고 불렀다) 그리고 박종찬 사장만 남은 거야. 스탭들이 모두 조용하게 얼어서 눈치만 보고 있는데, 박종찬 사장이 그러는 거야. 야, 이장호, 잠깐 사이에 개판 쳤구나!

<바보선언>은 그렇게 창고에 처박아둔 거지, 지방에서도 안 가져가겠대. 그렇게 1년이 지났어. 그렇게 나는 자연스럽게 도태된 거야. 먹고는 살아야겠는데 계약은 안 되고, 그전까지는 뭐 줄줄이 계약인데, 그러고 있는데 내무부에서 새마을 영화 문화 영화 하나 찍어 달라고 그러더라고. 생활비는 벌어야겠고. 그래서 오케이 하고. 강원도 횡계 산속에서 새마을 영화 찍고 있는데, 그때는 이미 감독이 된 배창호가 <그해 겨울은 따뜻했네>를 거기 와서 찍고 있더라구, 우리는 생각도 못했던 거지. 나한테는 불행이야. 조감독이 감독이 되어서 왔는데, 크레인, 엑스트라 몇 백 명씩 와서 하는데, 나는 16미리 들고 와서 새마을 문화영화를 찍고 있는 거지. 제일 부끄러운 게, 아침에 밥 먹을 때야 식당에서 만나면, 우리는 되게 초라하게 먹고 있는데, 거기는 (주연배우인) 안성기, 강석우, 이미숙이 들어와 가지고 뭐, 요란 떨고 그러면, 그걸 보면서 아, 내가 어쩌다 이 꼴이 되었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미래가 아주 절망적으로 보이는 거야. 그런데 1년이 됐을 때 전화가 왔어. 단성사에서 개봉한다는 거야. 뭔가 했더니. 펑크 프로야. 화천에서 수입해서 상영하던 외국영화가 흥행이 잘 될 줄 알았는데 너무 빨리 끝났어. 그때는 의무 교차상영이니까 한국영화 하나를 상영해야 하는 거야. 화천은 그 상영기간이 자기 권리니까, 한국영화 하나. 그냥 버릴 셈으로, 망할 영화는 제대로 고른 거지. 그런데 이게 히트한 거야. 제일 신기한 게, 완전히 버렸다고 했는데, 성공한 걸 보더니 제작자가 야 이거 속편 찍자! 이러더라고. 그게 <과부춤>이야.

세피아 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바보선언>의 길은 거기서 끝났습니다. 그런데 감독님은 가지 않은 길이 하나 더 있습니다. 비평가로서, 그리고 감독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아쉬운 일인데. 그 영화가 <나그네는 길에 서도 쉬지 않는다>입니다. 그 영화의 길은 그 영화 한 편으로 끝난 것 같아요.

  사실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주문이 들어온 거에요. 김화영 교수가 이상문학상을 받은 소설, 이제하 작가가 썼는데 이거 영화로 좀 만들어 보라고 그러더라고. 그래서 내가 한번 읽어 봤는데, 그 전에도 이제하 씨 소설을 읽으면서 스토리나 이런 거는 참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 분위기가 상당히 좋았거든, 내가 그런 경향이 있거든, 그로테스크한 감각을 내가 좋아했거든. 그 소설을 읽으니까, 아, 내가 영화를 만들고 싶다,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내가 제일 꽂힌 게, 산 위에 거대한 손 하나가 올라오는 마지막 대목, 그때 이제하 씨 자기가 직접 각본을 쓰겠다, 그래서 오케이 했어. 시나리오를 보니까 영화 만들기도 쉽고, 좋겠더라고. 그런 다음, 어느 날 갑자기, 그 시절엔 그런 게 가능했으니까. 김명곤 신인이지, 이보희 신인이지, 관광버스 대절해서 배우랑 스탭이랑 모두 태우고 강원도로 떠난 거야. 그렇게 눈을 찾아가면서 청평, 설악, 임계 그렇게 가면서, 차곡차곡 찍은 거야. 그게 내 취향하고 맞은 거지.  내가 영화 연출부 시절에, 텔레비전에서 AFKN 미군방송에서 보여준 2차 세계 대전 다큐멘터리를 유심히 보았어요. 그 화면이 퇴색해서, 진흙 빛이라고 해야 하나. 세피아 톤을 보면서 내가 다큐멘터리를 찍으면 언제 한 번 써야겠다. 했는데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를 하면서 그 생각이 난 거지요. 그래서 영화 전체를 세피아 톤으로 가자고 해서 그렇게 만들었지.

  질문의 방향을 바꿔 보겠습니다. 감독님이 제작사 ‘판 영화사’를 정리할 즈음, 한국영화에 대기업 자본들이 들어왔습니다. 처음에는 충무로 영화인들이 그 의미를 잘 몰랐던 것 같습니다. 아니면 일시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자본이 들어오자 자기의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한국영화 시장이 너무 영세하고 게다가 암시장 구조와 같았기 때문에 이윤의 분배라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부분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윤의 순환구조 자체가 완전하게 자본에 봉사하면서 비로소 한국영화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시장이 되었습니다. 감독님은 변화가 시작되었을 때 그 한복판에 있었습니다.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되었습니다. 그 시기를 돌아보면서 영화인들 중에는 그때 정부가 강력하게 시장에 개입해야 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우리는 정부가 영화에 개입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를 내내 바라본 역사를 갖고 있습니다. 감독님이 돌아보면서 우리는 그 결정적인 시점에 무엇을 놓친 것일까요?

 

한국영화의 시작, 일본하고 달라 독립영화의 힘을 키워 놓아야 해

  (잠시 생각) 영화 역사를 바라보는 눈, 그건 공무원도 그렇고 영화인들도 그렇고, 자국의 영화 역사를 보는 안목이 있었어야 그런 게 조정이 되는데, 그런 게 없이 우리가 지금 지나와 보니까 새삼스럽게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 ‘한국영화 100년’ 하니까. 나도 그전부터 그 질문에 생각했는데 한국영화의 시작이 일본하고 달라요. 우리는 그 시작을 함께 생각할 수밖에 없어요. 왜냐하면 한국영화가 일본 식민지에서 시작했으니까. 일본은 메이지 유신에 앞서서 유럽을 먼저 돌아보면서 소위 모델로, 법은 독일에서 받아들이고, 산업은 영국에서 받아들이고, 문화는 프랑스에서 받아들였잖아요. 그때 일본은 초창기 영화를 도입했을 때, 프랑스가 가지고 있었던 대기업 시스템, 거대한 스튜디오, 거대한 극장, 거대한 영화사. 이걸 보고 받아들였거든. 일본은 시작부터 그렇게 대규모로 시스템으로 영화를 만들었단 말이야.

근데 한국은 식민지니까. 거기서 밀려난 소자본, 밀려난 삼류 재능. 이런 사람들이 반도에 와서 한국 사람들하고 같이 영화를 만드는데, 적은 예산으로 해야 하니까 감독이 어떨 때는 배우도 하고, 어떨 때는 일인 다역을 해야 할 수밖에 없었잖아. 그런 작은 시스템으로 한국영화가 시작한 게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해방이 된 다음에도 전쟁이 일어나고, 그리고 분단이 되고, 그런 와중에 영화를 만들 수 있는 힘은, 소수의 어떤 작은 시스템, 지금은 독립영화 시스템이지, 그렇게 만들 수 밖에 없었잖아. 이건 한국영화가 역사적 과정에 적응하면서 만들어낸 시스템이에요. 말하자면 전천후에 적응할 수 있게 하는 힘이고 원동력이 되었어요. 이런 독립영화적 사고가 어떻게 보면 대규모 시스템이 못 따라가는 특공대 같은 힘이 있는 거거든.

예를 들면, 할리우드에서는 감독이 A급이 되어야지 편집에 참여할 수 있는 계약이 가능하잖아요. 우리는 시스템이 작으니까 삼류든 이류든 다 편집에 참여해야 되고. 그 과정에서 창작이 더 묻어나오니까. 이런 게 한국영화가 갖고 있는 빈곤의 장점이에요. 이걸 정치하는 사람이든 영화하는 사람이든, 우리의 힘은 이거다, 라고 생각했으면, 대기업의 조건을 받아들일 때, 우리 영화 역사에 맞게끔 받아들이면 되는 거였는데. 그때 기업 자본이 들어오면서 그냥 무저항이었어요. 그러면서 결정과정에서 기업의 말단 같은 걸로 들어가 버린 거죠. 그래서 나는 이 힘이 대한민국 영화가 가지고 있는 장점이기 때문에, 이걸 살릴 수 있는 방법은 지금 독립영화 만드는 사람들, 그 사람들에 대한 특별한 연구와 배려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돈으로 만든 영화는 언젠가 돈 때문에 망가질 수 있거든.

뉴 아메리칸 시네마가 나온 이유가, 할리우드가 도산했을 때 대안으로 뉴욕에서 나왔잖아. 그게 미국영화를 살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고, 무솔리니 때 이탈리아 영화는 할리우드 흉내 내려고 했던 그런 정책에서, 전쟁에서 패한 다음에 카메라 들고 길거리에서 네오리얼리즘 감독들이 나왔지. 프랑스도 기존에 대한 반발로 누벨바그가 나왔고, 한국도 대기업이 안정되기 전에, 독립영화의 힘을 키워 놓아야 했어요. 거기서 대안과 한국영화의 장점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이 나온다고 생각해. 그런데 이걸 미리 발견하지 못하고 나중에서야 깨달은 거지. 그걸 중국 독립영화들을 보면서 깨달았어요. 미국 영화 안 보고, 자기네 영화, 자기 선배들의 영화를 중요하게 생각하면서 거기서 만드는 방법을 찾아낸 거지. 나는 그런 의미를 배우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1996년 세대’의 새로운 영화

  영화비평에서는 한국영화사의 시기 구분에서 ‘1996년 세대’라는 표현을 사용합니다. 그 해에 홍상수(<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강제규(<은행나무 침대>). 김기덕(<악어>)이 첫 영화를 찍었지요. 그런 다음 허진호(<8월의 크리스마스>), 이광모 (<아름다운 시절>), 이창동(<초록 물고기>), 임상수 (<처녀들의 저녁식사>), 류승완(<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김지운(<조용한 가족>)이 나왔습니다. 물론 박찬욱은 그 이전에 첫 영화를 찍었지만 박찬욱이 박찬욱이 된 것은 2000년, <공동경비구역 JSA> 이후부터니까요. 그리고 그 해 봉준호가 <플란다스의 개>를 찍었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은 그 이름들의 무한반복입니다. 한국영화의 1974년 세대로서, 영상시대 세대로서, 1980년대 코리안 뉴 웨이브를 거쳐, 1996년 이후의 영화를 보면서 새로운 영화나 나타났구나, 라는 인상을 받은 적이 있는지요? 새롭다면 그 새로움은 어떤 것이었는지요?

  나에게 첫 번째 이름은, 내가 이만희 영화를 처음 보고 반했던 것처럼, 틀림없이 이 사람은 영화감독의 기질과 센스가 있다고 생각한 게, <오아시스>의 이창동이야. 마지막에 가로수 자르는 장면은, 그거는 진짜 세계 모든 훌륭한 영화들의 그런 에센스라 할 수 있는 영화적인 표현이야. 그때 아, 이 친구 대단하구나,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 다음에 김기영 감독 같은 류의 성격이 김기덕. <수취인불명>에서 엄마가 아들 잡아먹는 이야기. 김기덕 영화 보면서 또 쇼크였어. 김기덕 영화에서 가장 걸작이고 영화적이라고 생각하는 게 <빈집>이야. <빈집> 보면서, 아, 이 영화는 진짜 이창동과 비슷한 그런 센스가 흐르고 있다, 라고 봤지. 이단아는 홍상수고. 홍상수는 어떻게 저렇게 스토리텔링과 상관없이, 어떻게 저런 연기를 끌어내고 저런 걸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잠시 생각) 괴물이야 홍상수. (잠시 생각) 박찬욱은 특별히 우리와 구별되는 점을 못 느꼈어…….

그리고 봉준호는 나랑 가까이 지냈거든. 얘기를 해보면 다른 감독들과 다른 게 나이가 어린 데 나이 많고 적고 상관없이, 이 사람은 다 대화가 가능해. 우선 인문학을 공유할 수가 있어. 다른 감독은 수줍어서 말을 안 하거나, 우리한테 거리를 두거나 그러는데, 봉준호는 자연스럽게 소통이 가능하고 교류가 가능해요. 그리고 옛날 영화를 그렇게 많이 아는 놈이 없어. 그래서 이 친구는 아직까지도 클래식으로 남을 수 있는 게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기는 김기영 감독의 <하녀>를 얘기하지만, 내가 봤을 때는 신상옥 감독 기질 쪽으로 가까이 있는 것 같아요.

  21세기 영화의 큰 변화 중의 하나는 디지털 카메라일 것입니다. 감독님은 필름으로 시작해서 최근 영화인 <시선>을 디지털로 작업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감독님에게 영화의 경험은 필름의 경험인데, 디지털을 만나면서 어떤 새로움을 발견하셨나요?

  나는 디지털이 잘못되었거나 불편했다고 생각하지 못했어요. 내가 의외로 그렇게 예민하지 못해. 디지털의 색감이라든지 깊이라든지, 나는 이런 거는 불편한 거 못 느꼈어요. 오히려 장점이 많은 게, 우리는 필름 때문에 얼마나 많이 속을 썩였어요. 근데 이건 마냥 찍을 수 있으니까, 한국영화 감독이 할리우드하고 견줄 수 있게 된 게 디지털 때문에, 세계화되었고 선진화된 것 같아. 가난한 조건으로는 뛰어넘을 수 없지.

 

한국영화 100년, 한국영화만이 가져야 하는 가장 중요한 감정은 ‘한국인의 넋’

  한국영화 100년을 보면서, 어쩌면 이 질문을 하기 위해서 먼 길을 돌아왔을 수도 있습니다. 어려서 영화를 사랑하기 시작했고, 일찍 영화감독이 되기로 결심하셨고, 첫 영화로 큰 성공을 거두었고, 침묵을 강요당했고, 다시 대기하였고, 또 실패를 경험하면서. 다시 영화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아마도 항상 생각하셨을 것 같습니다. 한국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감정이란 어떤 것일까. 한국 영화가 절대 이 감정을 잃어버려서는 안되는 마음. 미학이 리얼리즘이라면. 한국영화를 한국영화답게 만들고, 다음 일백년 이후에도 한국영화를 한국영화로 만들어 줄 수 있는 감정.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감독님이 생각하시는 한국영화만이 가질 수 있는, 가져야 하는 가장 중요한 감정은 뭐라고 생각하시면서 영화를 연출하셨습니까?

  (잠시 생각) 난 그게 ‘넋’이라고 생각해요. 한국인의 넋. 그걸 찍으려고 리얼리즘이 나에게 절실한 미학이 된 거 같아요. 아마 그럴 거예요.

  감독님은 계속 ‘클래식’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사실 감독님이 <별들의 고향>. <바람 불어 좋은 날>, <바보 선언>, 그리고 <나그네는 길에서 쉬지 않는다>는 한국영화 100년의 클래식이 되었습니다. 그 영화들이 각자 서로 다르지만, 후배로서 누군가 감독님 영화를 깊이 들여다보고 배우고 싶다면 무얼 더 깊이 들여다보아 달라고 말하고 싶습니까?

  (잠시 생각) 나는 솔직히 말해서 내 영화에 대해서 자신감이 없어요. 이게 겸손한 게 아니고 솔직한 건데, 내가 만든 영화가 순진한데, 순진하고 솔직한데, 시대의 변화가 이 영화들을 뒷받침해줬다고 생각을 해요. 나로서는. (시대를) 예측한다든지 이런 게 나에게는 없어요, 그렇게 내 운명과 시대 변화가 맞아떨어진 것 같아. 그래서 나는 내 영화에 대해서 자랑할 것이 없다고 생각해요. (잠시 생각) 그래도 하나가 있다면 내 영화에서 순진함과 정직성을 발견해줬으면 좋겠어요.

 

한국영화는 이 영화였구나, 라는 한 작품 신상옥 감독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마지막 질문입니다. 감독님 영화를 제외하고, 라는 전제로 드리는 질문입니다. 긴 시간 한국영화 안에 있으면서, 결국 한국영화는 이 영화였구나, 라고 한 작품을 이야기한다면 감독님에게는 어느 영화를 호명하시겠습니까. 제 질문은 가장 훌륭한 영화나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아니라, 이 영화가 말하자면 한국영화, 라는 질문입니다.

  제일 어려운 질문인데…… (잠시 생각) 한국영화의 가장 클래식이 뭘까. 편견으로 얘기하면 아마도 내 선생님이니까, 신상옥 감독의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나에게는 괜히 클래식한 느낌이 들고 그러니까. 아마 이유는 설명하기 힘들 것 같아. 질문을 받자 그 영화가 떠올랐으니까.

  귀한 말씀, 긴 시간동안 감사합니다.

 

 

* 《쿨투라》 2019년 10월호(통권 6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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