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래식 산책] 백 년 전에는 어떤 음악이 우리를 찾아왔을까
[클래식 산책] 백 년 전에는 어떤 음악이 우리를 찾아왔을까
  • 한정원(클래식 칼럼니스트)
  • 승인 2019.10.01 0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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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음악의 경험과 유입

예로부터 음악은 우리의 삶 아주 가까운 곳에 존재해 왔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어머니가 불러주는 자장가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고, 아이들과 즐거운 놀이를 할 때엔 동요를 불렀으며, 기쁜 일에는 춤과 노래를 함께 하였다. 요즘은 만나보기 어려운 풍경이지만, 오래 전 시골 들판에서는 논두렁을 따라 많은 사람들이 긴 행렬로 걸어가면서 부르던 상여소리를 흔히 들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상여꾼의 노래를 들으며 일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우리 민족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 안에는 이처럼 늘 음악이 있었다. 가난한 농군들은 능률을 올리기 위해 노동요를 함께 부르며 농사일을 했고, 고되고 힘겨워 잠시 쉬면서도 언제나 노래를 불렀다. 사람들은 음악이라고 하면 대개 ‘서양음악’을 떠올리고, 우리 전통음악은 ‘국악’이라고 따로 분류한다. 우리 민족은 언제부터 서양음악을 접하게 되었을까?

조선시대로부터 전해오는 문헌들에 의하면 우리 나라는 오래 전부터 다양한 경로를 통해 서양음악에 노출되어 있었다. 가장 오랜 기록으로는 1631년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정두원이 돌아오는 길에 『직방외기』라는 책을 가져왔고, 조선 학자들은 이 문헌을 통해 서양문화를 알게 되었다. 이 책에는 중국에 머물던 예수회 선교사이자 신부였던 이탈리아인 줄리오 알리니가 중국 황제의 명에 따라 쓴 세계 여러 나라의 역사와 지리와 문화 그리고 서양음악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었다. 1700년대에 이르면 홍대용의 『담헌집』에 그가 베이징에서 외국인 선교사를 통해 경험한 서양문물과 가톨릭교회에서 본 오르간에 관한 느낌이 담겼으며,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그가 서양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의 느낌이 녹아 있다.

처음으로 서양음악 교육을 받은 사람은 최초의 성직자였던 김대건 신부로 알려져 있다. 그는 마카오에서 최양업 신부와 함께 그레고리안 성가 음악에 관한 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았다. 김대건 신부는 귀국한 지 일 년 만에 순교하였으며, 삼 년 늦게 돌아온 최양업 신부는 조선 초기 가톨릭 신자들이 습득한 성가를 토대로 교회음악의 영역을 넓히는 데 기여하였다. 19세기말 이전까지는 서양음악이 주로 학자들을 중심으로 소개되었지만, 그 후로는 가톨릭 신자들이 부르던 성가를 통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서양음악은 병인박해로 인해 더는 일반인에게 뿌리를 내릴 수 없었다. 그러나 근대화와 서구화의 물결이 거세게 흘러가고 19세기말에 이르면 학교와 군악대 그리고 개신교 선교사들에 의해 서양음악은 빠르게 자리를 잡게 된다.

 

근대음악의 여러 얼굴들

우리나라의 근대음악을 서술하는 데는 일제에 대한 저항적 성격을 지닌 음악의 역사를 빼놓을 수 없다. 일본은 효율적 식민 지배를 위해 그들의 문화를 우리의 음악 안에 이식하려 했고, 우리는 그들의 근대음악을 수용해야만 했다. 식민지 근대화라는 복잡하고 어려운 환경 안에서 독립군가, 광복군가 등의 ‘저항음악’이 탄생했고, 굴욕적인 역사의 한 면인 ‘친일음악’도 생성되어 현재까지도 그 잔영이 남아 있다. 20세기초 서양음악의 문법에 기반을 두고 창작 활동을 했던 음악가로는 김인식, 홍난파, 이상준, 정사인, 백우용 등이 있다. 이들은 개신교 선교사들과 독일에서 초빙되어 온 군악대 교사 프란츠 에케르트로부터 배웠던 서양음악 1세대이다.

이들은 모두 우리나라 초기 음악 장르였던 ‘창가’를 오선보를 이용하여 창작함으로써 새로운 서양음악의 창작 역사를 개척하였다. 이렇게 탄생된 ‘창작창가’는 동요, 예술가곡, 대중가요 등으로 분화되었고 점점 전통음악의 공간을 점유해갔다. 어린이 노래로서 창작동요 운동은 방정환이 조직한 ‘색동회’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는 조선의 어린이들에게 애국정신을 높이며 민족혼을 심어주기 위한 민간 주도의 민족운동이었다. 윤극영이 발표한 <반달>(1924)은 최초의 창작동요이며, 그가 작곡한 <오빠생각>, <설>, <고드름> 등은 지금도 애창되고 있다. 『조선동요 100곡 집』을 출간하며 가장 많은 동요를 발표한 작곡가 홍난파의 <고향의 봄>은 한국의 대표 노래로 여전히 애창되고 있다.

1930년대에 근대음악 양식의 하나로 정착된 ‘가곡’은 세미클래식 역할을 하면서 유행가보다는 건전한 예술적인 노래로 이해되었다. 우리 민초들의 최초 애창 가곡은 홍난파의 <봉선화>(1920)였는데, 이 곡은 본디 기악곡 <애수>로 발표되었으나 1926년에 김형준이 “지금 은 일제의 총칼에 짓밟히고 있지만 화창한 봄바람에 한국의 민족혼이 다시 회생한다.”라는 내용의 가사를 붙여 다시 불리기 시작했다. 또한 홍난파는 <성불사의 밤>, <봄처녀>, <옛 동산에 올라>, <장안사>, <금강에 살어리랏다> 등의 이은상 시조를 가사로 붙인 가곡들을 지어 『조선가요작곡집』을 펴냈다. 전통음악 중심으로부터 한국 대중가요 음반 시장의 전환 가능성을 보여준 노래로는 윤심덕의 <사의 찬미> (1926)가 있다. 순수하게 한국인이 창작한 유행가의 성공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식민지 조선의 가요시장을 뜨겁게 달구었던 <황성옛터>(1932)는 번안곡이 아닌 ‘한국 대중가요의 첫 창작가요’라는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일본인들 사이에서 ‘조선의 세레나데‘로 불리며 이 곡을 취입한 이애리수를 ’민족의 연인‘이라 칭했던 점만 봐도 그 당시 이 노래의 인기를 가늠해볼 수 있다. 트로트의 고전으로 유명했던 <타향살이>, <목포의 눈물> 등은 세대를 넘어 여전히 사랑받는 노래로 남아 있다. 올해가 한국 영화 백주년이라는 소식을 접하고서 백 년 전 우리 음악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궁금했다. 이 글은 20세기 전후 우리 음악을 엿보는 데 멈추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여지없이 수탈 구조 속에 놓이게 된 음악의 모습도 잠깐 살펴보았다. 그때 우리 민족의 삶에서 향유된 음악은 참으로 여러 얼굴을 하고 있었고, 백 년 전 비극적 시간을 여행하면서 내내 마음의 아픔이 가시질 않았다.

 

 

* 《쿨투라》 2019년 10월호(통권 64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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