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TERVIEW] 꿈을 꾸고 꿈을 이루는 조율사 음향감독 Troy Choi를 만나다
[INTERVIEW] 꿈을 꾸고 꿈을 이루는 조율사 음향감독 Troy Choi를 만나다
  • 김준철(시인, 본지 미주 지사장)
  • 승인 2020.01.01 02: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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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물론 한국, 전 세계에서 큰 인기를 끌었던 영화 <라라랜드>, 그 여파로 몇 년 전, ‘라라랜드 월드투어 쇼’가 구성되었고 지금까지도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음악과 영화의 환상적인 감동을 전하고 있다. 한국에도 이미 3번이나 공연이 되었다. 이 ‘라라랜드 월드투어 쇼’의 음향감독이 한국인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한국인으로서 미국 음악 주류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Troy Choi(한국명: 최경태)를 만났다.

그는 얼마 전까지 록그룹 토토(ToTo)의 마지막 공식투어에서 음향감독으로 일을 했다. 전설적인 록밴드 <토토:ToTo>는 1978년 데뷔 앨범 《ToTo》가 2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며 한국에도 알려지게 되었다. 이후 지금까지 왕성한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그룹이다.

투어를 막 마치고 돌아온 깔끔하고 단단한 느낌의 트로이는 첫인사에서 자신을 음향엔지니어라고 소개했다. 그리 대단하거나 특별할 것 없는 기술자라고 말했다. 이처럼 그는 그의 몸속 깊숙이 배인 겸손함으로, 현재의 자신을 포장하거나 높이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단순한 엔지니어라고만 명명할 수 없다.

그는 2007년에 미국으로 건너왔다. 당시 한국에서 드럼과 음향을 함께 전공했던 그는 어린 나이에도 제법 큰 작업들을 많이 해왔다. 주변에서도 그의 재능을 인정해서 드럼과 음향 사이에서 갈등도 있었지만 음향 쪽에서 그의 능력이 먼저 주목받게 되었다. 하지만 드럼에 욕심이 있던 그는 조금 더 깊이 있는 드럼 공부를 위해 아내와 아이 둘을 데리고 늦은 유학을 결심했다.

그는 자신을 “자신의 꿈을 위해 돌도 안 된 아이들을 비행기에 태우고 미국으로 넘어 온 이기적인 아버지”라고 표현하며 “너무나 무모한 결정이었고 또 아내와 아이들에게 너무나 미안해했다. 이후 근 10여년을 내내 고생을 시키며 가정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당시에는 거의 일에 미쳐 있었던 것 같다.”고 그는 기억한다.

아무래도 하는 일이 음악 쪽이라 그는 연말, 연초는 물론 각종 기념일에는 당연히 가족과 함께 할 수 없었던 것이다. 또한 극심한 경제난도 겹쳐서 집세를 못낸 집에서 3번이나 야반도주를 했으며, 차비가 없어서 걸어서 다닌 일이 빈번했다고 한다.

미국에서 걸어 다닌다는 것은 단순한 일이 아니다. 굉장히 위험하고 무모한 일인 것이다. 당연히 강도를 만나 죽을 고비도 겪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에 미 주류 메인 스트림으로 진출하게 되는 기회를 얻게 된다. 그는 미국의 작은 행사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그 행사에 참여한 음향 장비 업체 고위 인사에게 우연히 눈에 띄게 된 것이다.

그리고 2014년 그 고위 인사의 도움으로 드디어 오렌지카운티페어(Orange County Fair)라는 미국 정부에서 주관하는 굉장히 큰 행사에서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메인 스테이지가 아닌 큰 스테이지 사이에 있는 작은 한 스테이지를 담당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그는 또다시 한 번 더 기회를 더 얻게 된다. 메인 스테이지를 담당하던 사람이 그만두면서 트로이에게 그 스테이지에 설 수 있는 기회가 생기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날, 메인 가수가 그의 작업을 매우 만족했다는 이메일을 회사에 보내게 된다. 그러한 행운과 기회의 연속에도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그 회사는 쉽게 그를 메인시장에 올리지 않았다. 1년여 간을 작고 어렵고 힘든 일에 그를 보냈다. 그에게 일을 주는 사람은 안타깝게도 백인우월주의자로, 말 그대로 인종차별로 유명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미 마음을 정했다고 한다.

“미국에 사는 이상, 그리고 이 일을 하는 이상, 미국 사람과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시장은 이곳에서는 좁고 경쟁도 심하고 무엇보다 루머들도 많았습니다. 굳이 크고 넓은 곳에 와서 작고 좁은 곳에서 일을 한다는 게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피해 의식을 가지고 불평불만을 늘어놓아 봤자 변하는 것이 없다는 것을 일찍 깨달은 그는 어차피 변할 것이 없고, 이곳에서 계속 일을 하고 싶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극복하겠다는 결심을 한 것이다.

남들보다 조금 더 어려운 일을 주거나 귀찮은 일이 부여되는 날이 잦았다. 혼자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외롭게 버티던 일이 자연스러워지고 오히려 더욱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 속에서 그는 실력으로 자신을 증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느새 그는 모든 큰 프로젝트에 이젠 가장 먼저 콜을 받는 사람이 되어 있던 것이다.

“사실 얼마 전 엘에이 Greek Theater에서 공연되었던 <로켓맨 쇼> 음향 쪽도 저에게 가장 먼저 콜이 왔었습니다. 안타깝게 <토토투어>가 진행 중이라 거절할 수밖에 없었죠.”

그룹 토토는 음악계에서 음향에 상당히 까다로운 것으로 유명한 그룹이라고 한다. 오랜 시간 공연과 투어로 다져진 그룹이라 처음 오퍼가 들어왔을 때 망설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린 시절, 토토의 뮤직비디오를 보면서 음악에 대한 신선한 충격과 호기심을 키울 수 있었다고 한다. 토토는 자신을 꿈꾸게 해 준 그룹이었던 것이다.

그는 기쁨 마음으로 오퍼를 받아들였다. 하지만 역시 사람들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정신없이 쏟아지는 요구와 지시들에 그는 지치고 힘들었다. 자신에게 벌어진 믿을 수 없는 기적이 마냥 기쁘고 감사하지만은 않게 된 것이다. 당장이라도 때려치우고 싶었지만 그는 묵묵히 어시스트를 계속 했다. 이유는 하나였다. 어설프거나 억지스러운 요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갈수록 더 빨리 그룹의 요구에 적응했으며 또한 집중했다. 젊은 스탭들은 일이 끝나면 함께 술을 마시고 늦게까지 놀았으나 그는 그런 의미 없는 히히덕거림이 맞지 않았다. 성실하게, 예의 바르게, 약속을 지키고 실력으로 보여주는 편을 택한 것이다.

그리고 가장 요구가 많고 힘들었던 날, 에이전트가 그를 찾아 왔다. 그는 “오늘이 끝이구나.”라고 아쉬워하고 또 반면 드디어 끝이라는 게 기쁘기도 했다. 미국 음악 쪽 시장이 굉장히 차갑고 매몰차서 당장 맘에 안 들면 잘라 버리는 일이 일반적이라 그는 자신도 그렇게 잘리게 된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에이전트 입에서는 다른 말이 나왔다. 그룹 리더를 포함한 모두가 그의 엔지니어링에 너무 감사하고 기뻐한다는 말이었다. 드디어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 영웅과 그의 공식적 마지막 투어를 끝까지 함께 할 수 있는 영광과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그는 아무리 미국 시장에 집중한다고 해도 이미 한국의 음악 시장도 세계적으로 성장하고 또 어느 면에서는 세계시장을 주도하는 면이 있기에 몇 차례 한국과 일을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구조적으로 한국과 미국의 진행 패턴이 달랐다.

“일단 구조적 차이가 굉장히 크다고 생각됩니다. 위계질서에 대한 시선 자체가 다르죠. 여기서는 식사하고 있는데 20대 초반 아이들이 뒤통수를 치며 농담을 해대거든요. 또한 전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몇몇 한국 음악관련 업체의 경우, 진행 중간에 비전문가가 연계되어 진행되는 경우가 상당히 있었습니다. 그래서 미국 최고의 엔지니어들이 만들어낸 음악을 한국의 비전문가가 중간에서 취소하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또한 리허설을 하다보면 한국과 미국의 차이가 보이죠. 한국의 경우는 매니저나 가족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중간 중간 의견을 전해옵니다, 미국의 경우는 무서울 정도로 그대로 맡깁니다. 누구의 간섭도 없습니다. 하지만 아니다 싶으면 바로 당일 잘리는 거죠. 세컨트 찬스는 없습니다."

그는 이런 미국과 한국의 차이를 장단점이라고 하기 보다는 단지 틀린 것이라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현재 이반 클라우드의 클래식 첫 작곡 발표회를 한국 공연으로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또한 대만에서 이루어질 ‘라라랜드 쇼’ 작업도 준비하고 있다. 그에게 가장 큰 계획을 묻자 이렇게 답한다.

“이제 그 어느 것보다 가정을 우선에 두려고 노력합니다, 너무 외롭게 고생을 시킨 아내에게 죄스럽고 아이들에게 미안합니다. 물론 저 역시 가장 귀한 시간들을 일하는데 미쳐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가능한 많은 시간을 가족과 시간을 보내려고 합니다.”

음향 엔지니어라는 직업 자체가 소리를 조율하는 작업이라 할 수 있다. 공연의 하나하나를 구석구석까지 소리로 메우는 것이다. 또한 공연자와 관객의 감정을 연결하는 브릿지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렇게 이제 그는 그의 인생을, 그의 가정을 조율해나가려는 듯 보였다. 마지막으로 같은 계통의 일을 하려고 계획하고 또 미국으로의 진출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물었다.

“꿈은 이루어집니다. 저는 그것을 경험했습니다, 어린 시절 토토 뮤직비디오에 충격을 받고 꿈을 꾸었고 얼마 전, 저는 그 뮤직비디오의 음향 엔지니어와 같은 자리에서 함께 작업을 했고 서로에게 귀한 친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꿈을 꾸었다면 실력으로 준비해야 합니다. 그게 안 되면 꿈은 그렇게 흘러갈 것입니다.”

탄탄한 실력과 자신감으로 묵묵히 자신의 꿈을 이룬 Troy Choi. 아직 한인들이 많이 진출하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이쪽 시장이 쉽게 문을 열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지만 그는 이미 더 많은 한인들이 미국에 진출하여 꿈을 향해 걸어 갈 수 있는 발자국을 깊이 남기고 있는 것 같다. 꿈을 꾸었고, 꿈을 이룬 그가 이제 누군가의 꿈이 되어가는 그 길을 기쁜 마음으로 응원하고, 또 기대한다.

 

 

* 《쿨투라》 2019년 12월호(통권 6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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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환 2024-02-14 08:44:29
안녕하세요,
저는 미국 버지니아에 살고 있는 이승환이라고 합니다. 최경태씨와는 고등학교 동창입니다. 고등학교 졸업 후 연락이 끊겼었는데, 기사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혹시, 최경태씨의 연락처를 알수 있을까요? 도움주심에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