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예영화] 한국 문예영화의 대부 김수용
[한국문예영화] 한국 문예영화의 대부 김수용
  • 김종원(영화평론가, 영화사 연구자)
  • 승인 2020.01.0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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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과 예술적 성과

양산에도 잃지 않는 작가적 면모

영화계가 삭막해졌다. 몇 년 사이에 한 시대를 풍미했던 신상옥, 유현목 감독이 유명을 달리하였다. <장군의 수염>의 이성구마저 이역의 하늘 아래서 숨을 거두었다. 그런 지금, 우리 곁에 김수용 감독이 존재한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김수용(金洙容) 감독은 한국영화사상 고영남 감독(111편)에 이어 두 번째로 왕성한 활동을 한 다작의 보유자이다. 1958년 <공처가>로 데뷔한 이후 1999년 <침향>에 이르는 40년 동안 109편의 영화를 만들면서 많을 때는 한 해(1967년)에 10여 편이나 내놓는 의욕을 과시하였다.

그러나 이런 양산에도 불구하고 그는 영화 작가적 면모를 잃지 않았다. <혈맥>(1963년)을 비롯한 <저하늘에도 슬픔이>, <갯마을>(이상 1965), <만선>, <산불>, <안개>, <사격장의 아이들>(이상 1967), <도시로 간 처녀>(1981) 등에서 거둔 질적 성과가 이를 말해준다. 주로 문예영화였다. 그는 특히 신상옥, 김기영,유현목 및 이만희, 이성구 감독 등과 더불어 1960년대 한국영화 전성기를 이끈 주역 중의 한 사람이다 .

김수용은 그동안 대중성은 물론 특유의 예술 감각과 사회의식을 담은 작품을 고루 선보였다. <청춘교실>(1963), <굴비>(1963), <저 하늘에도 슬픔이>, <유정>(1966) 등이 대중적 공감을 이끌어내는 데에 성공했다면, <혈맥>(1963), <갯마을>, <만선>, <안개>, <산불>(1967), <봄·봄> 등은 문학적 감성과 형식미로 예술적 완성도를 높였으며, <사격장의 아이들>(1967),<물보라>(1980), <도시로 간 처녀> 등은 사회와 현실에 대한 인식의 단면을 보여 주었다 .

이들의 지향점은 삶의 애환과 현실의 모순을 담은 <혈맥>, <저 하늘에도 슬픔이>, <만선>, <도시로 간 처녀> 등 리얼리즘 계열, <까치소리>(1967), <극락조>(1975), <화려한 외출>(1977) 유의 불교적 윤회와 환생의 세계, <갯마을>, <봄·봄>(1969) 등이 보인 토속적 정서, 그리고 <굴비>, <안개> 등이 추구한 인간의 인습적 속성과 에고이즘이다.

김수용의 작품 자취를 보면, 다음과 같이 다섯 갈래로 정리할 수 있다.

 

다섯 갈래로 본 연대기적 접근

1. 모색의 시기 (1958~1963)

모색의 시기는 그의 작품 전반기에 해당된다. 1958년 데뷔작 <공처가> 이후 <후라이보이 무전여행>(1963)까지 5년 남짓 되는 시기이다. 이 시기의 특징은 <공처가>(1958), <삼인의 신부>, <청춘배달>, <구혼결사대>(1959), <연애전선>(1960), <부부독본>(1961),<부라보 청춘>(1962) 등 10여 편으로 코미디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신인 신분으로 제작자의 주문에 따라 선택의 여지없이 뛰어야 했던 시절의 작품들이다.

<공처가>는 딸의 혼사를 앞두고 가정불화를 겪는곰탕집 주인이 기발한 해결책을 내놓아 영업도 성황을 이루고 딸의 일도 원만히 해결해 공처가의 낙인을 씻게 된다는 줄거리이다. 당대의 만담가 장소팔과 코미디언 백금녀를 내세워 관객의 호응을 받았다. <삼인의 신부>(1959)는 시골에서 상경한 삼형제가 짝을 만나 합동결혼식을 올린다는 내용이고, <청춘배달>(1959)은 목장을 경영하며 우유 배달을 하는 세 명의 대학 동기생들이 애인을 만나는 과정에서 벌어지는 일화를 엮은 것이다.

<부라보 청춘>은 「얄개전」의 작가 조흔파(원작) 특유의 익살이 넘치는 작품이다. ‘대비마마’로 불리는 복혜숙 할머니에게 종아리를 맞기 일쑤인 50대의 증권회사 간부(양훈)의 과년한 세 딸 조미령, 엄앵란, 김영옥 자매가 동상이몽 속에 남자를 유인하면서 생기는 에피소드를 담았다. 당시 인기 성우 남성우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만능 개그맨 곽규석을 타이틀롤로 내세운 <후라이보이 무전여행기>는 백수건달의 사기 행각기이다.

그 자신이 저서 『나의 사랑 씨네마』(2005, 씨네21발행, 24쪽)에서 고백했듯이, <공처가>로 데뷔한 이유 하나 만으로 계속 엎치락뒤치락하는 코미디 영화를 찍다가, 겨우 궤도를 수정하게 되는 것이 이루지 못한 사랑을 소중히 여기며 추억 속에 살아가는 김진규, 이빈화 주연의 <애상(愛想)>(1959)이다. 데뷔초기 내리 세 편을 코미디로 일관하다가 모처럼 만난 멜로드라마였다.

뒤이어 선을 보인 것이 모파상의 「첫사랑」을 번안한 <돌아온 사나이>(1960)와 신파성 탈피에 주력한<버림받은 천사>(이상 1960), <약혼녀>(1963) 등 다섯 편의 멜로드라마와 한편의 시대극이다. <돌아온 사나이>는 태평양전쟁 당시 징용으로 끌려가 전사 통지서까지 남긴 남편(김진규)이 살아 돌아오면서 빚어지는 개가한 아내(최은희)의 딱한 운명을 그렸으며, <버림받은 천사>는 홀대받는 본처의 자식(황해)과 학대받는 첩의 자식(허장강)이 겪는 가족사를 담은 것이다.

<일편단심>(1961)은 고을에 부임한 신임 사또(허장강)의 부당한 압력에도 굴복하지 않고 정혼한 남자(신영균)만을 생각하는 여자(조미령)의 정절을 담은 것으로, 그의 작품 가운데서 보기 드문 시대극이다.

<약혼녀>는 동네 주모(황정순)에게 눈독을 들이는 잡화상인 홀아비(김희갑)와 그 친구들의 허물없는 우정을 곁가지로 그들의 자녀가 펼쳐가는 사랑의 줄타기를 엮은 희극조의 멜로드라마이다. 서울 뒷골목의 정경 속에 신, 구세대의 사랑의 모습을 흥미롭게 대비시킨다.

2. 전환기 (1963~1965)

김수용 감독에게 전환의 계기를 가져온 것은 KBS 라디오연속극으로 널리 알려진 김영수 원작 각본의 <굴비>(1963)이다. 농사를 천직으로 여기고 살아온 김승호, 황정순 노부부가 서울의 아들딸을 찾아 나서며 겪는 수모를 그리고 있다. 여관을 경영하는 큰 사위집에 갔다가 한증막 같은 보일러실에 몰아넣는 바람에 곤욕을 치르고, 무역회사 사장인 둘째 사위(허장강)에게는 산지기 영감 취급을 당하는가 하면, 큰 아들(김석훈) 집에서는 굴비를 안주 삼아 양주를 마셨다가 며느리(조미령)에게 싫은 소리를 듣게 된다. 그나마 6·25전쟁 때 남편을 잃고 아들과 함께 삯바느질로 살아가는 작은 며느리(엄앵란)로부터 예기치 않은 대접을 받아 위로가 된 노부는 시골로 돌아오는 삼등객차 안에서 자식들 자랑에 침이 마른다.

이 영화는 시작과 끝이 한 장소에서 이루어진다. 산기슭을 빠져 나오는 기차(프롤로그)가 터널 속(에필로그)으로 사라지면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구조이다. 지금도 상투에 갓을 쓰고 도시의 거리에 나타난 김승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오즈 야스지로의 <동경 이야기>와 착상(원작)이 크게 다르지 않지만, 보다 선이 굵은 편이다. 핵가족 사회로 다가가는 이기주의적 세태와 인생성찰의 눈을 엿보게 하는 영화이다.

그는 <상속자>(1965)에 이르는 2년여 동안 <청춘교실>, <혈맥> (1963), <아편전쟁>, <위험한 육체>(1964)등 열네 편을 만들었다.

<청춘교실>은 김기덕 감독의 <맨발의 청춘>(1964),정진우 감독의 <배신>(1964) 등과 함께 1960년대 초 우리나라에 청춘영화 붐을 일으키는 데에 기여한 작품이다. 일본작가 이시자카 요지로(石坂洋次郞)의 「그 녀석과 나」(아이쯔또 와다시)를 번안 각색한 것으로, ‘허우대만 멋진 영화’(경향신문, 1963년 8월 28일자 새 영화)라는 비판과 함께 ‘쁘띠 부르주아적 취미’를 일관되게 풍기며 ‘빤짝빤짝하는 재주와 솜씨’를 보여주었다는 긍정적인 평가(조선일보, 1963년 8월 25일자. 영화평 「발산하는 젊음」)를 받았다 .

미용사의 아들로 자가용 스포츠카를 몰고 다니며 돈을 낭비하고 바람을 피우기 일쑤인 문제의 청년(신성일)과 입술에 상처날까봐 두려워 키스를 꺼리는 순진한 여대생(엄앵란)의 교제를 통해 전후 젊은 세대의 생태와 참사랑의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신성일, 엄앵란 콤비스타를 탄생시키고 1960년대청춘영화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게 하는데 기여했다.

<혈맥>은 그가 처음 도전한 사실주의 계열의 작품이다. 해방 이후 남산 기슭 빈민가 일대에 자리 잡은 실향민들, 이른바 ‘3·8따라지’의 궁핍한 삶에 앵글을 맞추고 있다. 복덕방이라는 생업에 의지하며 소일하는 인색한 홀아비 털보(김승호) 일가를 중심으로, 병을 앓는 아내 (이경희)와 노모, 절름발이 딸 등 부양가족을 거느리고 꽁초를 모아 만든 담배 수입으로 생계를 잇는 고달픈 가장(신영균)과 이상주 의자인 원칠(최무룡) 형제, 그가 짝사랑하는 양공주(김지미), 깡통을 펴 만드는 수공업으로 생활하는 깡통영감 내외(최남현, 황정순) 등 하루하루가 힘겨운 사람들의 일상사이다.

연극적인 인물 배치와 구도 속에 롱테이크를 적절히 활용한 화면 등 연출 감각이 두드러졌다. 이 시기를 전환기로 이끄는 데 손색이 없는 역작이다.

이밖에 관심을 끈 영화로 중국 근대사의 비극을 담은 대작 <아편전쟁>(1964)과 서울에서 만난 젊은 남녀가 첫 정사의 밤을 떠오르는 동해의 태양에 바치기로 언약하는 청춘물 <위험한 육체>(1964) 등이 있다.

3. 전성기 (1963~1967)

김수용 감독은 1965년 <저 하늘에도 슬픔이>에 이르면서 더욱 세련되고 완숙한 모습을 보인다. 1967년 <까치소리>에 이르기까지 박봉에 시달리는 가장을 극성스럽게 내조하는 <날개부인>(1965)에 이어 <갯마을>(1965), <유정>(1966), <만선>(1967), <산불>, <안개>, <사격장의 아이들>(이상 1967) 등 20여편을 내놓았다. 일반 감독들이 일생 동안 내놓기 힘든 수작들이 삼 년 남짓한 사이에 쏟아져 나왔다. 대부분이 문예영화였다. 그는 어느새 ‘생애 최고의 해’를 맞이하고 있었다. 이 시기를 전성기로 분류한 이유이다.

<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는 작품성과 함께 흥행성을 인정받은 작품이다. 이 영화는 가출한 어머니와 병든 아버지를 대신해 어린 세 남매를 돌보며 살아가는 초등학교 4년생 이윤복의 일기(각본 신봉승)를 바탕으로 한 것이다. 놀음에 빠져 가정을 돌보지 않는 아버지의 외면 속에 구두닦이와 껌팔이를 하며 벌어오는 푼돈으로 삶을 꾸려 나가면서도 희망을 잃지 않는 소년가장(김천만)의 자립의지가 감상에 빠지지 않고 정제된 화면에 잘 녹아들어 있다. 우리나라의 아동영화 중에 첫손으로 꼽을 만한가작이다.

<갯마을>은 남성 중심의 인습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들의 숙명과 인간의 귀소(歸巢)본능을 질퍽한 향토색과 농염한 여인들의 살 냄새로 일궈낸 ‘문예영화’의 대명사라고 할 수 있다. 원작(오영수)이 단편소설인데도 갯마을-채석장-산속-갯마을 등 모두 네 시퀀스로 구성, 원경과 클로즈업, 인서트를 효과적으로 활용하며 남편을 앗아간 어촌 과부들의 평탄치 않는 삶을 수채화처럼 그려내었다.

영화의 서정성을 높인 김소희의 창과 이민자, 김정옥 등 과부 아낙네들이 해변의 모래밭에 드러누워 신세타령과 질퍽한 음담들을 주고받는 도입부의 장면이 뛰어나다.

이광수 원작 <유정>은 김수용의 첫 천연색 시네마 스코프일 뿐 아니라. 문희, 윤정희와 더불어 1960년대 트로이카 시대를 연 남정임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자신이 키운 친구의 딸을 사랑하게 된 고위 교육자가 이역만리에서 병마와 싸우다가 양녀의 보살핌 속에 숨을 거두고 만다는 귀결. 세속적으로 비치기 쉬운 두 사람의 관계를 흠모와 자제의 사랑으로 승화시키고 있다.

<만선>은 남해의 섬마을(용초도)을 무대로 전개되는 어부들의 삶을 그린 토속적인 리얼리즘 영화이다. 바다 풍경과 함께 고기잡이 나갔다가 태풍으로 죽어간 어부의 장례로 시작되는 서막부터 가난한 어부들의 숙명을 예감케 한다. 두 자식을 바다에 수장시킨 곰치(김승호)는 뭍으로 나가 살자는 아내와 아들의 성화에도 뿌리친다. 그가 출어를 나가 만선의 희열을 안고 돌아오던 배가 난파하고 또 아들을 잃자 실성한 아내(주증녀)는 갓난 아들마저 배에 누여 바다에 띄어 보낸다. 영화는 지긋지긋한 물을 떠나 품팔이라도 할 수 있는 뭍으로 가야겠다는 아내의 외침과 세 아들을 빼앗아 갔으나 삶을 이어준 거대한 어머니의 바다를 떠나 살 수 없다고 고집하는 곰치의 숙명적인 심상을 교착시킨다.

<산불>은 6·25 직후 전란의 상황을 이념의 잣대가 아니라 본능적인 욕정의 관점에서 접근한 역작이다. 젊은 과부들과 처녀들만이 남은 호남 지방 산간벽지에 공비들에게 속아 입산했다가 탈출한 전직교사(신영균)가 한 과부(주증녀) 집에 숨어들면서 일어나는 동족상잔의 후유증을 담았다.

난리 통의 불안한 생활 속에서도 본능적인 성 욕망을 누릴 길이 없는 아낙네들은 오랜만에 남자의체취를 맡으면서 변화가 일어난다. 이웃 과부(도금봉)의 위협으로 한 사내를 둘러싼 두 여자의 어색한 분배관계가 이루어지는 가운데 한 여자의 임신과 경찰 토벌대의 출동으로 파국을 맞게 된다. 불길이 번지는 타이틀백과 회상 장면을 파트칼라로 만들어 화면의 변화를 노린 점이 눈에 띈다.

<안개>는 파격적일 만큼 모던한 작품이다. 한때 폐병을 앓은 병역 기피자였으나 제약회사 회장 딸(이빈화)과 결혼하여 출세가도를 달리는 윤상무(신성일)는 잠시나마 삭막한 도시생활에서 도피하듯이 고향을 찾는다. 4년 만에 찾은 안개의 고장 무진에서 그는 무의미하게 삶을 탕진하는 친구들을 보고 실망한다. 그들과 어울린 술자리에서 음악교사인 하인숙(윤정희)과 사귀게 되고 서울로 옮길 것을 권하기에 이르지만, 아내로부터 회의가 소집됐다는 연락을 받자 서둘러 일상으로 돌아간다.

이 영화는 주인공의 내면에 깔린 의식의 흐름까지 포착하는 진전을 보여 준다. 서울이라는 삭막한 도시와 나태한 고향 무진, 과거의 무료함과 현재의 권태가 교차되면서 내적 갈등을 겪는 주인공(윤기준)이 과거의 자신에게 말을 거는 장면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뿐만 아니라, 현재와 과거의 경계 없이 수평적으로 배치하고 서울과 무진으로 대칭되는 수직적공간과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평행적 시간을 자연스럽게 넘나드는 기법을 사용하여 주목을 받았다. 이는 그가 일찍이 서구 모더니즘영화의 양식에 관심을 가져 왔음을 말해 준다.

 

4. 답보기 (1968~1976)

답보의 조짐은 홍세미 주연의 <춘향>(1968) 이후에 나타난 현상이다. <순애보>(1968), <추격자>(1969),<남자는 괴로워>(1970), <딸 부잣집>(1973), <내일은 진실>(1975) 등이 이 범주에 속한다. 이 시기는 <내 사랑 에레나>가 공개된 1976년까지 8년간으로 36편이 제작되었다. 이 가운데는 <봄·봄>(1969),<토지>(1974), 등 예외적인 작품들도 더러 있었지만, 전성기의 수준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토지>(1974)는 1890년대의 경상남도 하동군에 5대를 이어오는 만석지기 지주 최 참판 집과 그 일대 마을 사람들을 주축으로 전개되는 이야기이다. 절에 갔다가 동학군 대장에게 몸을 빼앗긴 이 문중의 마지막 안주인(김지미)과 아들 치수(이순재), 손녀(서희) 세대로 이어지는 파란 많은 가족사로서 동학란,한일합방, 전염병, 대흉년 등 역사적 격동의 시대와 어우러져 비애감을 높여 주고 있다.

이밖에 <맨발의 영광>(1968), <극락조>(1975), <가위 바위 보> (1975) 등이 이 시기의 산물이다. <맨발의 영광>은 사회로부터 냉대 받는 아동보호소 고아들이 축구 볼의 의지에 뭉쳐 전국 어린이 축구계를 재패하고 고교에 진학하게 된다는 실화를 뼈대로 한것이다. 자칫 비뚤어지기 쉬운 고아들의 반항심을 리얼하게 순화시키고 있다. 김동리 원작, 최금동 시나리오인 <극락조>(1975)는 어떤 힘에 끌려 겨울의 산정에 오른 남녀가 환생을 체험하는 스토리로 엮어지고 있으며, <가위 바위 보>(1976)는 공산군에 의해 사이공이 함락되자 한국에 온 베트남 여성(황정아) 가족이 사라진 조국에 바치는 애절한 진혼곡이다.

 

5. 변화 추구기 (1977~1999)

지속적인 답보로 침체에서 벗어나지 못한 김수용이 제2의 전성기를 노리는 자세로 내놓은 것이 김승옥 원작, 각본의 <야행>(1977)이다.

단조로운 일상이 불만인 여 은행원(윤정희)은 동거중인 대리직 행원(신성일)과 예사로 정사를 즐기면서도 겉도는 남자의 행위에 불만을 갖는다. 휴가를 받고 고향에 갔다가 낯선 남자를 유혹하여 몸을 주거나, 밤늦게 술을 마시고 누가 유혹하지 않을까 뒷골목을 서성대는 따위의 일도 마다 하지 않는다. 그녀의 후렴 같은 생활은 버스에 몸을 싣고 동작동 국군묘지 앞에서 내려 경비병의 시선도 아랑곳없이 스타킹을 고쳐 맨 다음 자신이 사는 아파트촌으로 걸어가는 모습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극적 기복 없이 여주인공의 반복되는 일상과 정신적 방황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의식의 흐름이 개입할 여지와 공간을 넓혀 놓고 있다. 하지만, 경비병이 여자의 스타킹을 올리는 모습을 훔쳐보는 장면 등 53군데가 가당치 않은 이유로 잘려 나갔다.

<화려한 외출>(1977)도 <야행>과 마찬가지로 실험적인 요소가 강한 이색 작이다. 유능하고 박식한 30대 후반의 여류 기업가 공도희 회장(윤정희)은 점쟁이로부터 전생에 대한 얘기를 듣고 지방도시의 해변가에 나섰다가 납치된다. 그녀를 인계받은 낙도의 사나이(이대근)는 자기에게서 떠났던 아내라고 주장한다. 정체성의 혼란을 느낀 그녀는 서울로 탈출하여 회사 건물 옥상에서 투신자살을 꾀하지만 어느 해변가 승용차 운전대에 엎드린 모습으로 나타난다. 혼돈과 상징성이 혼재돼 애매한 부분이 있지만 1970년대 후반 그의 탐구적인 의욕이 넘치는 작품으로 평가할 만하다.

<도시로 간 처녀>(1981)는 현실 비판적 시각이 강한 화제작이다. 시골 출신의 버스 안내양들이 ‘삥땅’을 이유로 남자 감시원 앞에서 알몸 수색을 당하고 그때 받은 모욕 때문에 한 안내양(유지인)이 동료들에게 정직하게 살 것을 호소하며 옥상에서 몸을 던진다. 열악한 근로환경과 비인간적인 처우 등 인권의 사각지대를 고발함으로써 회사 측이 동원한 노조의 압력에 직면, 해방 후 처음 상영이 중단되는 사태까지 빚었다. 표현의 자유가 민간의 압력에 의해서도 침해받을 수 있음을 보여준 보기 드문 사례이다 . 변화 추구기의 작품들은 이상의 영화 외에도 <웃음소리>, <망명의 늪>(1978), <만추>(1981), <허튼소리>(1986) <사랑의 묵시록>(1995) 등을 포함, 22편에 이른다. 이 가운데는 전작의 후광에 기댄 <산불>(1978), <저 하늘에도 슬픔이>(1984) 와 같은 리메이크도 있다.

 

평가되어야 할 그의 리얼리즘

김수용의 영화 40년을 돌아볼 때 그의 성과들이 1960년대에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는 그의 다작 시대와 더불어 한국영화 전성기의 한복판이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빈번한 ‘겹치기 연출’의 다작 속에서도 산발적이 아니라 거의 연속적으로 가작에 속하는 작품들을 만들어냈다는 사실이다. 심지어 <까치소리> 등 열편을 내놓은 1967년의 경우,그 절반에 가까운 <만선>, <산불>, <안개>, <사격장의아이들> 등 가작들을 쏟아내었다. 이런 예는 영화사상 일찍이 찾아볼 수 없는 일이다 .

1백편이 넘는 그의 작품들은 다양한 장르와 내용, 형태, 구조를 갖고 있다. 장르만 해도 멜로, 코미디, 문예, 시대물은 물론, 극소수지만 액션 드라마까지 포진되어 있다. 그런데 그 대상을 작품성으로 국한할 때 주목해야 할 것은 사실주의 계열의 영화가 핵심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혈맥>은 물론, <저 하늘에도 슬픔이>, <갯마을>, <만선>, <산불>, <사격장의 아이들>,<도시로 간 처녀> 등이 여기에 해당된다. 거기에는 역사의식과 함께 그 시대를 반영하는 삶의 문제와 정서가 녹아들어 있다. <갯마을>이 운명 순응적 리얼리즘 계열에 속한다면, <저 하늘에도 슬픔이>, <산불>, <만선> 및 <사격장의 아이들>, <도시로 간 처녀> 등은 비판적 리얼리즘 경향의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

양적인 면에서는 오히려 <오발탄>(1961), <잉여인간>(1964) 등을 무기로 하는 유현목을 압도할 정도이다. 그의 리얼리즘은 <도시로 간 처녀>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극한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화합의 여유를 갖고 있다. 사물을 긍정적으로 보려는 그의 낙관주의적 경향은 여러 작품에서 감지된다. 비록 어두운 환경을 모티브로 했더라도 도달하는 지점은 밝고 희망적이다. 두 분의 리얼리즘이 대비되는 것은 유현목이 도시 지향적이라면, 김수용은 토속적 리얼리즘을 선호한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추구한 리얼리즘은 조명을 받지 못했다. 이 점이 아쉽지 않을 수 없다.

 

 

* 《쿨투라》 2019년 12월호(통권 6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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