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에세이] 지식의 저주
[교육에세이] 지식의 저주
  • 설규주(경인교대 교수)
  • 승인 2020.01.01 05: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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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니스 레슨이 재미없는 이유

찬바람이 날로 거세지지만 아침 7시면 꼬박 집을 나선다. 몇 달 전부터 동네 테니스 코트에서 다시 레슨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7시부터 20분씩 받는 레슨은 생각보다 고통스럽다. 네트 너머 코치 선생님이 이쪽저쪽으로 넘겨주는 공을 좌우로 오가며 백 번쯤 받아내다 보면 어느덧 다리가 풀리고 몸이 느려진다. 이제 5분쯤 남았으려니 하고 시계를 보면, 겨우 5분이 흘러가 있을 뿐이다. 레슨이 거의 끝나갈 무렵, 나는 거의 거북이처럼 움직이며 주저앉기 직전의 상황에 이른다.

이 고통을 참아내며 레슨을 받는 이유는, 건강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잘 치기 위해서다. 건강 때문이라면 내가 속해 있는 테니스 동호회에서 일주일에 두세 번 치는 정도로 부족하지 않을 것 같다. 땀도 적당히 흘릴 수 있고 재미도 있다.

레슨은 좀 다르다. 일단 운동량이 많으니 건강에 도움은 될 것이다. 그런데 땀과 재미가 꼭 비례하지는 않는 것 같다. 레슨을 받으면 몸은 땀에 흠뻑 젖지만 재미는 없다. 테니스 실력을 쑥쑥 올리지 못한 내 탓이 제일 크지만, 내 탓만 하기엔 조금 억울하니 핑계거리로 외적인 이유를 하나 추가한다면 코치 선생님의 잦은 꾸중을 들고 싶다.
 

 

나는 무엇을 잘못한 걸까?

나는 레슨 받을 때 코치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가르쳐준 대로 했다(고 생각한다). 나는 분명히 배운 대로 한 것 같은데 코치 선생님으로부터 돌아오는 건 꾸지람과 나무람이 대부분이다. 왜 가르쳐 준대로 ‘안’ 하냐는 것이다 .

그런데 나는 배운 대로 ‘안’ 한 적이 없다. 배운 대로 ‘못’ 했을 뿐이다. 나는 왜 배운 대로 못했을까? 그건 배운 대로 안되기 때문이다. 나도 배운 대로 하고 싶다. 그런데 안 된다.

그럼, 나는 왜 배운 대로 안 될까? 이건 두 가지로 설명할 수 있겠다. 내가 테니스라는 종목에 둔하거나, 아니면 내가 아직 충분할 만큼의 테니스 연습을 안 했거나. 후자이길 바란다. 전자라면 실력을 올려 보겠다며 레슨 받느라 고생할 필요 없이 그냥 현재 수준에서 만족하면 되니까.

일단 후자라고 치고 생각해 보면, 굳이 ‘일만 시간의 법칙’ 같은 걸 거론하지 않더라도 나의 테니스 연습량은 코치 선생님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적다. 타고난 신체 조건과 길러진 운동 능력의 차이도 클 것이다. 그러니 코치 선생님은 예컨대 백핸드 발리 동작쯤은 식은 죽 먹기로 멋지게 해낼 수 있지만 내겐 그런 기본 동작조차도 만만치 않다. 실수하는 횟수가 네댓 번을 넘어가면 코치 선생님의 목소리는 점차 높아지고 짜증이 묻어난다. 어느덧 가르침은잔소리로, 잔소리는 꾸중으로 변해 간다 .

코치 선생님은 내가 배운 대로 못하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아마 앞으로도 이해 못할 것이다. 그럴 수 있다. 나는 코치 선생님을 비난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 아니다. 나 자신을 돌아보기 위한 것이다.
 

 

올챙이 적 시절은 어디에?

25년쯤 전엔가 운전면허 학원에서도 그랬다. 학원에서 코스와 주행을 연습하면서 강사에게 얼마나 많이 깨졌는지 모른다. 1톤 트럭으로 연습을 했던 나는 그나마 시동이라도 안 꺼뜨려서 사정이 좀 나았지만, 승용차로 연습하던 십여 명의 30-40대 여성들은 강사에게 모욕적인 말도 많이 들었다. 처음으로 운전을 배우러 온 사람들이 운전석에서 앞만 바라보며 운전대를 꽉 붙든 채 깜빡이 넣는 걸 잊어버리는 것을 ‘운전 도사’인 강사들은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그리고 야단을 친다.

이건 어린 시절 많이 보았던 무술 영화에서 스승이 제자에게 따뜻한 눈길 한번 주지 않으며 고급 기술을 터득할 때까지 혹독하게 훈련시키는 모습 같은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 같다. 대단히 죄송한 말씀이지만, 내가 보기엔 코치 선생님이나 운전학원 강사의 꾸지람이 어떤 심오한 교육적 원칙이나 신념에 기반을 둔 것 같지는 않다. 그저 이렇게 쉬운 걸 저 사람들은 왜 못할까 하는 생각에서 비롯된 즉각적인 반응인 것 같다.

그럼 나는 어떤가? 멀리 갈 것도 없다. 몇 달 전 우리 아이들에게 자전거 타는 법을 가르쳤다. 마침내 보조 바퀴를 떼고 아이 혼자서 처음으로 두 발 자전거를 타던 날, 넘어질까봐 겁을 먹고 긴장한 아이의 몸에는 힘이 잔뜩 들어갔다. 힘을 빼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라고 숱하게 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계속 그게 잘 안 되니 나도 슬슬 짜증이 났다. ‘이렇게 쉬운 걸 왜 못 타지?’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꾹 참고 그런 말을 하지만 않았을 뿐이다. 아이가 그리 오래지 않아 자전거를 혼자 탈 수 있게 되어서 그렇지, 만약 실수하는 기간이 더 길어졌다면 나 역시 짜증 섞인 말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건 공정하지 않다. 초등학생 시절 나도 자전거를 배울 때 얼마나 많이 부딪히고 넘어졌는지 모른다. 팔다리에 상처도 많았다. 그렇게 넘어지고 부딪혔으면 면역이 될 법도 하지만 어림도 없었다. 넘어짐과 부딪힘은 여전히 두려웠고 피하고 싶었다. 어느새 그걸 까맣게 잊어 버렸다. 그저 내가 지금 자전거를 잘 타는 것만 생각한다.
 

 

나무람과 기다림

언젠가 ‘지식의 저주’라는 말을 들었다. 처음 들었을 때 ‘지식’과 ‘저주’가 잘 호응되지 않는다고 느꼈다. 앎이 축복이 아니라 저주라니? 그런데 알고 보니, 일종의 형용 모순처럼 보이는 이 말을 적용할 수 있는 경우가 내 주변에 무척 많다는 걸 깨달았다.

‘지식의 저주’는 어떤 분야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 그 분야에 대해 무지한 사람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현상을 가리킨다. 이건 지식뿐 아니라 기능에도 해당한다. 7×8=56이라는 걸 0.1초만에 아는 어른과 달리, 한창 구구단을 배우는 아이는 7×1부터 차례차례 올라가거나 손가락으로 세어 가며 계산해봐야 알 수도 있다. 수십 년 전에 구구단을 뗀 어른에게 아이의 더딘 셈은 그저 답답해 보일 뿐이다. 그 다음 수순은 어쩌면 짜증이나 꾸지람일 것이다.

나는 어떻게 해 왔는지, 나는 어떠해야 하는지를 돌아본다. 선생이랍시고 학생보다 더 많이 안다고 착각하지는 않았는지… 아빠니까 아이들보다 뭐든 잘한다고 착각하지는 않았는지… 사실 나는 학생이나 아이들보다 먼저 태어났기 때문에 먼저 공부했고, 먼저 해봤기 때문에 먼저 할 줄 알게 된 것 뿐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한줌밖에 안 되는 지식이나 기능은 시간과 경험 때문이지 나의 우월함 때문
이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가진 지식이나 기능은 행여 누군가를 나무라는 데 쓰여서는 안 된다. 지금까지 나도 그래왔듯 어떤 단계에 이르기까지에는 누구에게나 시간과 경험이 필요하다. 그러니 먼저 배우고 먼저 경험한 자가 나중에 배우고 나중에 경험하는 자에 대해 할 일은 꾸지람이 아니라 기다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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