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월평] 딱히 기쁠 일도 특별히 슬플 이유도 없는 삶의 기록
[문학 월평] 딱히 기쁠 일도 특별히 슬플 이유도 없는 삶의 기록
  • 전철희(문학평론가)
  • 승인 2020.01.01 05: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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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문학작품은 독자로 하여금 기쁨이나 슬픔을 느끼게 해 준다. 그런데 또 어떤 작품들은 딱히 기쁠 일도 없고 특별히 슬플 이유도 없는 현실을 무덤덤하게 묘사만 하는 경우가 있다. 이번 월평에서는 후자의 경우에 속하는 2권의 책을 함께 읽겠다.

먼저 살필 책은 장류진의 첫 소설집 『일의 기쁨과 슬픔』이다. 장류진은 이 책의 표제작으로 2018년 창비신인상을 받았다. 「일의 기쁨과 슬픔」은 발표되자마자 SNS 등을 통해 엄청난 화제가 되었고, 인터넷에 공개되었을 당시에는 창비 사이트가 마비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작품의 배경은 판교 테크노밸리에 있는 스타트업(IT기업)인데 이 기업의 대표는 직원들이 서로 영어 이름을 부르고 상시적 스크럼(scrum, 회의)을 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하면 업무가 합리화되고 직원들이 평등한 관계를 갖게 될 것이란 이유 때문이었다. 당연히 그런 제도들을 시행한다고 하루아침에 직장이 합리화되고 평등한 문화가 정착할 리 없었다. 어쩌면 서로가 영어 이름을 부르도록 한 것은 대표가 자신의 촌스러운 이름을 숨기기 위해서이고, 스크럼을 매일 아침마다 하는 것 또한 직원들에게 훈화를 하고 싶다는 마음 때문이었던 것은 아닐까? 「일의 기쁨과 슬픔」의 주인공은 그런 의문을 가진 채 회사생활을 하는 직장인이다. 그는 자신의 직장과 상사에게 아무런 기대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니까 소설의 제목과 달리 그는 일에서 기쁨이나 슬픔을 느끼지도 못하는 셈이다. 그는 오직 자신이 좋아하는 피아니스트의 ‘덕질’을 할 때에만 행복해진다 .

많은 독자들이 「일의 기쁨과 슬픔」에 열광한 것은, 회사 생활에서 딱히 보람을 느끼지 못하고 그 외의 영역에서 “워라벨”을 찾는 젊은 세대의 감성에 부합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일의 기쁨과 슬픔』의 수록작품들은 사회초년생들이 응당 마주칠 법한 문제들을 재치 있게 묘사한다. 가령 「잘 살겠습니다」는 어정쩡한 관계의 사람에게 청첩장을 보내야 하는지의 문제와 또 청첩장을 받으면 반드시 결혼식에 가거나 축의금을 보내야 하는지 고민하는 인물들을 통해, 한국의 청첩문화를 유쾌하게 꼬집는다.

임홍진은 『90년생이 온다』라는 책에서, 오늘날의 젊은 세대가 공무원을 꿈꾸며 안정된 삶을 추구하면서도 호구가 되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하고 자기 나름의 “재미”를 지향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사회 초년생의 시각으로 한국의 경직된 문화들에 대한 불편함을 솔직하게 묘사하면서도 쿨한 삶의 태도를 보여주는 장류진은 소설은, 이 세대의 감각을 적확하게 형상화해낸 것 중 하나라고 평가할 만하다.

이와 함께 읽을 책은 신동옥의 네 번째 시집 『밤이 계속될 거야』이다. 나는 처음 이 시집을 봤을 때 “밤이 계속 될 거야”가 어떤 의미인지 궁금했다. 만약 사랑하는 연인에게 이 말을 건넨다면, 서정적인 시간을 앞으로도 함께 향유할 수 있을 것이란 달달한 애정표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밤이 어둠을 상징한다면 이 말은 영광의 때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란 절망적 한탄일 수도 있다. 시인은 어떤 의미로 이 말을 쓴 것일까. 답은 둘 중 하나가 아니었다.

밤이 계속될 거야.
별들은 낙과처럼 떨어질 테고(중략)
얼음이 덮이고, 마침내 끝을 짐작할 수 없는 빙평선이 도시를 잠식할 때, 짐승을 피해 도망 다니던 사람들은 짐승의 울음을 익히며 떨다가

짐승의 젖과 고기로 배를 채우고 그 가죽으로 옷을 해입겠지. 살뜰하게 발라낸 뼛조각으로는 불을 피우고 남은 불씨는 묻어 두겠지.(「극야」)

여기에서 화자는, 밤이 계속되는 빙하기와 같은 상황을 그려내면서도 그 밤에 누군가는 “불씨”를 묻어둘 것이라고 썼다. 마치 세상은 어둠으로 뒤덮인 암담한 곳이지만 그 어둠에서 누군가는 씨를 뿌리고 그 씨가 언젠가 신생을 이뤄낼 것이라는 기대라도 품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 작품이 암시하듯 신동옥은 이번 시집에서 세상을 염세적으로 바라보면서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돌이켜보면 그는 첫 시집 『악공, 아나키스트 기타』에서 “악공”을 자처하며 자신의 생각과 이상이라고 할 만한 것들을 펼쳐냈다. 이 시집에서는 90년대의 문화적 세례를 받은 예술가이자 박식한 다독가였던 시인이 뽑아내는 독자적인 언어들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당시에 그가 낭만적-전위적인 예술가를 지향하는 것처럼 보였다면, 이후의 시집들에서는 조금씩 생활인의 면모가 더해졌다. 이런 변화양상을 고려하면, 그가 이번 시집 『밤이 계속될 거야』에 이르러 “꿈꾸지 마라, 다른 세상은 없다.”(「시작노트」)고 일갈하는 현실적 인물의 목소리가 드러나게 된 것은 얼마간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물론 “다른 세상은 없다”는 인식이 반드시 절망적인 패배감을 동반하리란 법은 없다. 거창한 이상을 탈출구로 삼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오히려 지금-여기에서의 삶을 더욱 충실하게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직시하게 되기도 한다. 『밤이 계속될 거야』에서 시인은 그런 태도를 통해 절망에서 희망을 찾아내려 한다. 따라서 비관적 현실인식과 낙관적인 꿈(이상) 사이에서 자신만의 목소리를 길어 올리려는 야심이 돋보이는 신동옥의 이번 시집은, 비루한 세상에서 그래도 꿈을 갖고 살아가려는 이들에게 장류진의 소설과는 전혀 다른 방식의 감동을 선사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쿨투라》 2019년 12월호(통권 66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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